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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May 15. 2023

작가의 계절 - 안은미 엮고 옮김

동해선에서 읽은 책 45

결국 나라가 준 돈(코로나 정부 지원금) 대부분을 서점에 갖다 받쳤다. 딸이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주산하는 동안... 밑에 세 권은 중고서점에서. <작가의 계절> 은 영광도서에서.


1. 안 읽은 책을 쌓아놓고선 또 책을 사냐고 따지면 답은 궁색하다. 옷을 사도사도 계절이 바뀌면 입을 옷이 없다고 투덜대는 아가씨 마음이랑 비슷하려나.


2. 에세이를 사고 읽는 건 바람피우는 느낌이다.

딱딱하고 복잡한 책들을 읽다가 이렇게 생활감 고 운율 읽는 글을 읽으면 약간의 설렘과 청주를 마셨을 때 같은 적당한 취기를 느낀다.


3. 당연하게도 작가의 계절 옆에 <작가의 마감>이 있었다. 아무 데나 펴서 읽었는데 그 초조함이 느껴져서 다시 꽂아놨다. 마감에 쫓기지 않는 날이 오면 좀 편히 읽으려나?


4. 페친인 정은문고 대표께서 민트색 표지랑 비교해서 올려놓은 표지를 보는 순간 사야지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 유명한 다자이 오사무의 문구인 "여름은  샹들리에, 가을은 등롱" 의 전후좌우 맥락을 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읽어보고 싶었다. 아.. 그리고 이 책은 가을부터 시작한다. 대단하지 않나? 이런 책은 그러니까.. 다 읽은 뒤 잊고 있다가... 가을이 오면..."오, 그래... 가을인데 작가의 계절이나 다시 읽어볼까."... 뭐 그런 가을 적금 책 같은 역할을 하지 않을까?


"가을秋이란 글자 아래 마음心을 붙여 근심 愁이라 읽은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용케 잘 생각해냈지 싶다.... 새벽이 아름다운 시기는 역시 가을..." 가을 달무리, 오다 사쿠노스케, <작가의 계절> 중에서.


가을부터 시작하는 이 책을 펼칠 때는 마지막 페이지를 향해 달려 읽지 않아도 좋은 책이라고 여겼다. 가을엔 가을을 겨울엔 겨울을 봄엔 봄을 여름엔 여름을 읽어서, 그 부피와 상관없이, 해를 넘기며 읽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조용한 물소리가 가슴에 사무치긴 해도 일부러 그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아니다. 그저 술에 취해 지친 몸을 쉬게 하고 바람을 맞으며 있는 것이 즐거운 뿐이다." -와카야마 보스쿠이, 가을 소리 중에서


그런 이유로 하루에 한 꼭지씩 아껴 읽고 있었다. 카피가 안 써질 때, 기획서의 시작이 영 잡히지 않을 때, 가을이 갑자기 깊게 느껴질 때, 그럴 때마다 읽으려 했다. 저 위에 문장을 읽으면서, 그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아니라고 하는 문장에서 전해지는 사무침을 곱씹으며 읽으려 했다.


물론 이렇게 천천히 읽다 보니 오타도 눈에 들어온다. 저 위의 문장처럼. "즐거울 뿐이다."가 맞지 않을까? 대체적으로 의존명사일 경우에는 "~ㄹ 뿐"으로 쓰이고 조사로 쓰일 때는 "무기는 이것뿐"식으로 명사를 꾸미거나 하는데...


"어떤 것이든 한 번 사라지면 끝내 돌아오지 않는다. 짧은 여름밤의 꿈만은 아니다. 친구가 직접 술을 따른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면서.. 눈 내리는 날 마시지 않는 사람 팔짱만 끼고...라고 읊으며 내 얼굴을 쳐다보길래 나도, 술 못 마시면 허수아비처럼 그저 눈 구경... 하고 돌려주었다.", 나가이 가후, 눈 내리는 날.


겨울 되면 겨울을 읽으려 쉬엄쉬엄 읽었건만 읽다 보니 겨울로 접어들어 내친김에 겨울 한 복판으로 읽어 갔다. 이때 알았다. 해를 넘기기는커녕 달을 넘기기도 쉽지 않겠구나... 읽다 보니 또, 이 책, 가을에 어울리는구나 싶었다. 그렇다면, 뭐 겨울 오기 전에 다 읽어보자 싶었다. 그런 맘을 먹어서일까. 날이 추워지니 오히려 초조해졌다.


"네, 네 하여도 자꾸만 두드리네 눈 쌓인 대문", 무카이 교라이의 하이쿠. 시마자키 도손,  눈 속 장지문 중


읽어본 일본 작가라고는 두 무라카미와 몇몇 추리소설 작가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저 글을 읽다 보니 자연스레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이 생각났다. 젊을 땐, 읽으면서.."별 내용 없네." 했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읽으면 그 별 내용 없음의 의미를 알지 않을까? 겨울이 깊어지면 다시 읽어봐야지, 불쑥 다짐하고 말았다. 이다음 글에, 탈자가 나왔다. 가타야마 히로코의 등화절에 단어가 누락됐던 것. "그녀는 촛불뿐만(  ) 모든 불을 지키는 수호신이기도 하다."에서 "아니라"가 빠진 듯하다.


대표님의 페북을 보면 거의 매일 교정을 보러 사무실에 출근하시고, 그 교정이 까다로운 것 같은데, 그래도 이렇게 오탈자가 나오니... 뭐 칼럼에서 어쩌다 나오는 오탈자에 스트레스받지 말자 하는 이상한 자기 위안을 하고 말았다. (이후, 내 블로그를 보시고 오탈자를 수정하셨다.)


"그토록 옛날을 잊지 못하는 사람도 드물다.", 시마자키 도손, 짧은 여름밤.


오늘 백신 2차 접종을 했다. 몇 장 안 남았길래 이상 반응 대기 하는 동안 읽으려 가져갔다. 그렇게 오늘 결국, 여름의 끝을 봤다. 이쯤 해서 드는 궁금증... 왜 가을부터일까 싶을 거다. 읽어보면 안다. 아 물론, 프로모션 상 지금이 가을이니 가을을 전진 배치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모름지기 작가란 가을에 글이 잘 써지지 않을까 싶다. 우리도 이 계절에 오만 잡생각에 밤을 설치기 일쑤지 않나? 그럴 때 읽으라고 이 가을이 문지기로 있는지도 모르겠다.


19세기말에 태어나 20세기 초중반에 문필의 절정을 이룬 작가들의 열전이다. 글마다 작가 소개가 나오는데 어찌 그리 요절한 작가들은 많은지. 또 의외로 유럽에 갔다 온 이들이 많다. 프랑스를 무지하게 동경했던 듯도 하고. 그래서인지 고종석 선생이 <고종석의 문장>에서 전혜린을 비판했던 내용도 떠올랐다.


시시콜콜하다. 감정의 기복도 그리 없다. 그러나 그 시시콜콜한 일상과 그 일상의 사물과 사람 사이에 묘한 계절감이 드러난다. 가을은 쓸쓸하고, 겨울은 괴롭고, 봄엔 기대에 차고, 여름엔 지치거나 생기가 있다. 그러나 작가들이다 보니 필연적으로 사물과 일상, 사람, 심지어 가족에게도 거리감이 있다. 그 거리감이 느껴질 때마다 그 거리감으로 인해 숙명적으로 끼고 살았을 그들의 고독이랄까, 외로움이랄까, 그런 것들이 행간에서 전해졌다.


이맘때 딱 읽기 좋은 책이다. 특히 번역에 있어서, 우리 좋은 단어를 찾고, 맞는 표현을 고르는 데 있어 고심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나 같은 카피라이터에게는 또 하나의 단어 교과서 같은 책이라 할 수 있다.

2021.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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