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너리즘에 빠진 나와 당신에게

꼰대와 베테랑 그 사이 44

by 최영훈

작업실에 출근하자마자 전날 잡혀 있던 미팅을 바로 했다. AR/VR 기업 관계자와의 미팅이었다. 교육을 목적으로 한 체험 영상에선 사례의 선택과 함께 내러티브와 플롯의 구성이 관건이었기에 그것에 대해 중점적으로 의견을 나눴다. 그들을 보내고 나서 점심을 먹고 문화예술회관으로 향했다.


자리의 주인을 찾는 공연

현재 시립무용단의 예술 감독은 공석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교향악단에 비유하면 지휘자가 없는 셈이다. 시립예술단은 그 자리의 적임자를 찾기 위해 독특한 공연을 연이어하고 있다. 유명 안무가들에게 안무를 맡겨 공연을 한 후 시민의 의견을 물어 그 안무가 중에서 감독을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 팀은 그 공연의 홍보를 위한 영상 촬영을 맡았다. 첫 번째 안무가의 촬영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감독은 나를 데리고 가고 싶어 했다. 나에게도 어떤 자극이 되리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날, 두 번째 후보 안무가의 연습을 촬영하는데 동행했다.

전에 한번 와 본 적 있는 무용단의 연습실에 들어서서 예술단 홍보 담당자와 몇 마디 나눴다. 잠시 후 무용단 관계자가 와서 안무 관련 자료와 공연 팸플릿을 주고 갔다. 안무 관련 자료는, 광고로 말하면 일종의 콘티, 영화로 말하면 시놉시스 같은 것이었다.


처음 봤다. 거기엔 안무가의 아이디어와 안무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거기엔 춤의 동작이나 동선, 인원의 구성 같은 건 없었다. 그 춤을 통해 말하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관객이 받아 볼 팸플릿에 함축되어 표현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안무는? 정확히 1시 반에 시작한 연습은 두 시간 동안 진행 됐다. 그동안 무용단의 단원들은 거의 쉬지 않았다. 첫 번째 장의 공연을 맡은 팀이 연습을 시작했다. 1.5미터 정도 되는 스틱을 활용한 안무가 인상적이었다. 스틱은 배를 젓는 노가 되었다가 한데 모여 원을 만들기도 했다. 그들의 움직임은 아이들의 놀이 같기도 했고 광대들의 연희 같기도 했다.


숨 죽이게 했던 연습

두 번째 장의 공연을 맡은 팀의 연습을 보면서 난 숨을 죽였다. 아니 숨이 찼다는 표현이 맡겠다. 아이들의 전통 놀이를 재해석한 안무는 무용수들에게 쉴 새 없는 움직임을 요구했다. 발리의 께짝 댄스를 떠올리게 한 3분 20초의 음악에 맞춘 안무엔 느린 순간, 멈춤의 순간은 단 1초도 없었다. 모든 무용수들이 쉴 새 없이 발과 팔, 몸을 움직였고 전후좌우로 끊임없이 방향 전환을 했다. 또 서로의 안무 습득을 위해 박자와 적절한 구호를 쉴 새 없이 외쳤다. 3분 20초의 안무가 끝난 후 모든 무용수들이 바닥에 너부러졌다. 그때서야 나도 크게 숨을 쉴 수 있었다.


이 연습이 몇 번 반복 됐다. 보기만 해도 숨이 찬 연습이 서너 번 반복된 것이다. 그때서야 이 연습실의 온도가 왜 이렇게 낮게 설정되어 있는지 알게 됐다. 안무가의 복장이 제법 두툼해 보였던 이유도 이해했다. 이 공간은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아니었다. 이곳에 들어온 사람은 움직여야 한다.


타성에 빠졌을 때

어떤 일을 오래 하다 보면 타성에 빠진다. 아무리 새로운 고객을 통해 새로운 분야를 접해도 긴장하지 않는 나이가 되면 타성은 만성질환처럼 따라다닌다. 사는 게 지겨우면 시장에 나가서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보라는 이도 있지만 타성은 열심히 살지 않아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열심히 살다 보니 그 열심에 익숙해져서 생기는 것이다.


이다음엔 뭐가 있지? 이 일 다음엔 또 뭐가 있을까? 내가 무슨 영화를 보자고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이 정도만 해도 되지 않을까? 적당히, 적정하게 일을 해도 되지 않을까? 내년엔, 이년 후엔, 십 년 후에도 이 일을 하고 있을까? 이 일을 잘하긴 하는데 계속해도 될까? 타성, 즉 매너리즘은 이런 질문들은 부른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없이

몸으로 하는 일이 다 그렇듯 무용수들은 빨리 은퇴한다. 그러나 그 빠른 은퇴가 두려워 몸을 아끼진 않는다. 같은 동작을 매번 할 때마다 똑같은 높이, 똑같은 각도로 발을 차고 높은 소리로 서로를 격려했다. 음악에 맞춰 흥을 냈고 심지어 미소를 지으며, 더 나아가 까르르 웃어대며 연습을 했다. 그들에겐 두려움이 없었다. 미래에 대한, 육체의 쇠잔함에 대한,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게다가 그들에겐 같은 안무란 존재하지 않는다. 같은 제목의 공연이라도 디테일은 달라진다. 안무가가 바뀌면 무용단의 스타일도 바뀐다. 몸에 익었던 스타일은 버려야한다. 매번 새로워야 이어나갈 수 있는 삶이다.


모르겠다. 어떤 삶이 옳은 삶인지 아직 모르겠다. 그러나 두 시간 동안 무용단의 연습을 지켜보면서, 그리고 짐벌을 들고 그 연습을 고스란히 기록하고 있는 감독의 등을 보면서 생각했다. 우린 결국, 오늘, 이 순간을 살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별 수 없다.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다음 공연에도 오를 수 있을까? 마흔이 넘어서도 무용을 할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은 연습실 밖에 있다. 일단 연습실 안에 들어오면 전력을 다할 뿐이다.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의 삶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는 삶 밖에 머물 수 없다. 그 밖에서 내 삶을 관조할 수 없다. 그건, 마르쿠제가 얘기했듯이 철학자의 몫이다. 우리의 삶을 지켜보면서 삶에 대해, 더 나은 삶과 미래에 대해 탐색하고 조언해 주는 건 철학자의 몫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린 다만 살뿐이다.


잠시 지겨웠었다. 다들 그럴 수 있다. 아니 그래도 된다. 그러나 다시 연습실로 들어와야 된다. 무대에 서고 싶다면 뛰고 소리치고 도약해야 된다. 주인공이 되고 싶다면 오늘 내게 주어진 이 순간을 불살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