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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Jul 14. 2023

느슨하게 철학하기-아즈마 히로키

동해선에서 읽은 책 57

할 게 없어서

-사람은 새로운 환경, 새로운 자극을 겪지 않으면 자신을 모른다. 체력도 마찬가지다. 스스론 건강한 체질이 아니라고 여겨서 보기보단 살살 살고 있다. 나이가 들면서 좋아하던 운동 몇 개는 그만뒀고 요즘엔 내 기준으론 숨쉬기 운동 정도만 하면서 사이즈를 유지하며, 맥주를 마시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일을 하고 있다. 무리 없이...


그러다... 아내가 보기에 이런 내가 한심했는지 수영을 다시 하라고 했다. 아내가 옳았다. 사람들과 어울려 강사의 지도 아래 간만에 수영을 해보니 내 체력은 바닥이었다. 그래도 그 현실을 개무시하고 며칠 맥주를 마셨는데... 지난 금요일 아침,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모처럼 비싼 수영을 하면서 저녁엔 그렇게 처 마시다니... 그래서 줄이기로 했다. 마침 왼쪽 견갑골에 담이 걸린 탓도 있다. 


그렇게 주말에 술을 안 마시고 수영을 한 첫날, 오늘, 회개했다. 몸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마치 물 위를 떠가는 나무 조각 같다고나 할까? 컨디션이 좋은 날 수영을 하면 몸이 그렇게 느껴진다. 


술을 안 마신 며칠, 할 게 없었다. 남자들은 대체로 그러하다. 결국 저녁에 책을 읽었다. 원래는 출퇴근할 때 읽으려고 했는데 잘 읽히는 걸 먼저 읽는다는 것이 내 나름의 책 읽기 방법이라...


동년배

-다른 글에서도 얘기했지만 요즘 내가 좋아하는 일본 저자 세 명(사사키 아타루, 지바 마사야, 아즈마 히로키)은 나와 동년배다. 몇 살 차이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그래서인지 읽다 보면 문제의식이나 그 접근법, 이론, 좋아하는 학자나 작품, 대중문화 등에서 많은 동질감을 발견한다. 마치 대학원 동기의 책을 읽는 느낌이랄까?


90년대 후반에서 2010년대 사이

-이 글은 아즈마 히로키가 그야말로 혜성 같이 등장한 90년대 후반이 아니라 약간 정착한 2000년대부터 2010년대, 그러니까 이십 년간 두 개의 매체에 연재한 글과 여기저기 기고한 글을 모았다. 그래서 그 사이 일본의 비평 지향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저자는 그 변화에 어떻게 적응하려 했는지 파악할 수 있다. 


덕분에 사사키 아타루가 보여준 <야전과 영원>과 그 이후 작품들, 역시 지바 마사야가 보여준 <너무 움직이지 마라>와 그 이후 <공부의 철학>, 그 두 권의 난이도 차이에서 느껴진 괴리감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히로키는 섬-우주로 요약되는 일본 젊은 층의 오타쿠적 성향과 하나의 텍스트에 함몰되어 있는 성향, 이 성향이 인터넷으로 엮어져 자신들만의 우주만으로도 충분히 소통하고 생을 꾸려갈 수 있는 현실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현실 속에서도 이론과 비평, 철학이 소멸되지 않도록 자기 변신을 해가며 열심히 글을 쓰고 활동한다. 


그것이 , 데리다를 소재로 한 <존재론적 우편적>(아직 읽지 않았다.)과 그 이후에 나온 다른 작품들과의 차이를 발생시켰다. 즉 <관광객의 철학> 즈음부터 히로키는 약간 어깨에 힘을 빼고 다양한 대중들과 소통하면서 그들을 소위 인문 비평의 반경 안에 넣어두려 애썼다. 그 애씀의 흔적, 고군분투의 경로가 이 책에 잘 담겨 있다. 


왜 읽고 쓰는가...

-사실 주말에 브런치에 <어른 영화 동시 상영>이라는 주제 아래 두 편의 영화에 관한 글을 올리느라, 최근 두 달 정도 칼럼의 속도가 느려졌다. 앞의 열다섯 편 정도는 어딘가에 숨어 있던 내 글과 메모, 블로그를 기반으로 해서 써 내려간 것이고, 그 뒤의 몇 편은 새로 쓴 것들이다. 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글에 들인 시간과 신경은 비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주 그렇게 글을 쓰는 건, 그게 재미있기 때문이다. 딱히 이유가 없다. 누구나 다 아는 영화를 재료 삼아 내 나름의 생각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재미가 있다. 


그건 정치적이지도 않고 사회 비판적이지도, 시사적이지도 않고 딱히 철학적이지도 않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재미있다. 쓰는 행위 자체, 내가 쓴 걸 읽으며 고치고 다시 읽어가는 그 자체가 재미있다. 히로키가 <존재론적, 우편적>을 쓴 이유를 말할 때, 그냥 그게 쓰고 싶어서, 그렇게 생각해보고 싶어서라고 한 말에 공감했던 이유다. 


책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다. 딱히 어디 쓸데없다. 동년배의 일본 비평가의 글을 읽든, 들뢰즈나 벤야민을 읽든, 거기엔 하등의 실용적인 이유가 없다. 그냥 그게 재미있어서 읽는 것이다. 물론 왜 그렇게 책을 사 모으고 줄창 읽어대냐는 아내의 질문엔 그럴듯한 대답을 해야 하니, 요즘엔 칼럼 때문에 읽는다고 하는데, 당연히 뻥이다. 그냥 좋아서, 재미로 읽는다. 


그렇게 재미로  책을 읽으며 나오고 얻은 생각들을 재미로 쓰는 글에 옮기는 것이 재미가 있어서 결국엔 이 두 개의 재미있는 것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뿐이다. 취미란 건 원래 그렇게 타인의 이해를 구하지도 바라지도 않는 것이니까...


사족....

<어른 영화 동시 상영>은 두 편만 더 쓰고 마무리할 생각이다. 마지막 두 작품은 <베티블루 37.2>와 <화양연화>다. (2022.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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