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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Jul 30. 2023

프루스트와 기호들 - 질 들뢰즈

동해선에서 읽은 책들 59

인트로

잠시 상상을 해 보자....


학교(회사)에 맘에 드는 여자가 있다. 멀리서 봐도, 한눈에 봐도 예쁘다. 더 긴 말이 필요한가? 그 여자를 아는 선후배, 지인들을 수소문했다. 그 여자에 대해 최대한 미리 알아두려 한다. 흠.. 알면 알 수록 쉬운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알면 알 수록 끌리는 사람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사람도 알고 나도 아는 사람이 그녀와 함께 있을 때 형식적인 인사를 나눴다. 지인을 사이에 두고 언제 밥 한번 먹자는 인사를 남겼다. 그녀도 좋다고 한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면서 그녀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기 위해 애썼다. 이만하면 됐다 싶을 때, 마침 우연히 마주쳤다. 밥 한번 먹자고 했다. 저녁 약속을 잡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보니, 생각한 대로고, 소문대로다. 똑똑하다. 말도 잘하고 듣기도 잘한다. 미모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점점 듣다 보니 나랑 생각이 비슷하다. 몇 마디 못 알아듣기도 했지만 나와 인생관도, 철학도 비슷하다. 그녀 또한 내게서 그런 기운을 느끼는 듯....


들뢰즈의 주변을 맴돌았다. 여기저기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그 이름과 이론을 읽다가, 결국엔 그에 "관한"책을 읽기 시작했다. 읽다 보니 그가 "쓴" 책이 읽고 싶어서 몇 권 샀다. 그렇게 어떤 책은 몇 주, 몇 달을 "읽지 못한 책꽂이"에 있었다. 솔직히 해를 넘긴 것도 있다. 그러다 불쑥, 이 책을 집어 들었다. 딱히 이유는 없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그 사람이 지니고 있거나 방출하는 기호들을 통해서 개별화시키는 것이다.", 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P.27.


비자발적 기억 / 사건/ 충돌

첫 번째 키워드다. 들뢰즈가 이 책, 그리고 그의 다른 책들에서도 일관되게 도전하고 반론을 제기한 것은 사유의 선험적 조건, 사유의 내재적 틀과 조건이었다. 데카르트와 칸트의 그것들 말이다. 쉽게 말해 "아, 이제 이것에 대해 사유해 볼까, 어디 보자 이건 이런 식으로, 이런 방향으로 사유하면 되려나?"하고 사유를 하는 것에 대해 의심을 품었다는 것이다.


들뢰즈가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를 평생의 메인 텍스트로 삼은 것은 사유가 우연한 만남, 비자발적 기억, 주체도 어찌하지 못하는 느닷없는 사건으로 촉발됨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저 문장에서 사랑대신 사물, 사유, 철학, 공부라는 단어를 집어넣으면 들뢰즈의 주장의 첫 단추를 가늠할 수 있다.


"사랑과 관련해서는 진실은 언제나 늦게 온다. 사랑의 시간은 잃어버린 시간이다. 왜냐하면 사랑의 기호는 그 기호의 의미와 관계된 자아가 사라졌을 때만 펼쳐지기 때문이다.",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132.


뒤에 오는 이성

그렇다. 들뢰즈의 사유에 있어서 이성과 지성은 뒤에 온다. 감각이 먼저 온다. 그 감각은 주체를 흔들어 깨운다. 응? 마들렌을 먹었는데 왜 콩브레가 생각나지? 응? 왜 소녀들 중에 알베르틴이 눈에 들어오지?.... 이성과 지성이 기호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기호가 주체를 엄습한다. 이성과 지성은 그때서야 겨우 그 기호와 일전을 치른다. 심지어 그 사건, 그 기호가 사라진 뒤, 마들렌처럼 어느 날 불쑥 그 의미와 본질을 알려주기도 한다. 이성과 지성이 너무 뒤에 오면 사건은 미처 해석되지 못한 채 무의식에 묻혀버린다.


"사람들은 이런 분열된 상태에다 어떤 유기적 통일성을 도입하고 싶어 하지만, 이 부분들, 통들, 관들은 모든 종류의 유기적 통일성이 폐기되었음을 미리 선포해 버린다. 프루스트는 자기 작품을 대성당이나 한 벌의 드레스에 비유하고는 하는데 이는 고귀한 전체성으로서의 로고스를 작품의 준거로 삼으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반대로 미완성, 꿰맨 자국, 기워댄 천 조각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다.", 251


사유하는 순간의 주체/모나드

이 소설처럼, 사유하는 주체에게도 일관된 정신이란 없다. 통합의 의지를 갖고 세계를 사유하지 않는다. 그 의지를 바탕으로 사유해서 이 세계와 기호를 체계화시키지 않는다. 그건 칸트적이고 데카르트적이다. 사건과 기호를 통해 사유하는 순간, 개별적 주체가 섬광처럼 등장한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처럼... 그 섬광 같은 주체들은 그전에 나타났던 주체들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계열체일 수도 있고, 연쇄의 사슬일 수 있지만, 그 계열체와 사슬은 지금 내 앞에 벌어진 사건과 펼쳐진 기호를 해석하는 순간 사라진다.


막힌 관/ 부분&통합된 주체

통합된 주체는 개별적인 해석자인 주체들과 나란히 있다. 쉽게 말해 누군가는 이 소설 속에서 하나의 구조를 찾아 전체의 틀 속에서 조망하려 할 것이다. 그 전체의 의미와 재미를 찾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프루스트에겐 그런 의도가 없었다. 모든 에피소드들은 낱개의 것이다. 마치 꿈속에서 이곳저곳을 드나들거나, 밤에 꾼 꿈과 새벽에 꾼 꿈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꿈에서 깬 뒤 한 꿈속에 등장했던 다양한 공간과 사람의 의미를, 한 번의 잠 속에서 꾸었던 여러 개의 꿈을 엮어 하나의 의미를 만들려 한다. 그러나 그 시도는 낮의 것이다. 꿈은, 그리고 무의식은 밤에 일한다. 그 파편들. 물론 그래도 된다. 그러나 그 꿈 해몽과 해석은 낱개의 꿈 옆에 낮의 이성의 일로 나란히 놓일 뿐이다.


분열된 주체, 생각하는 기계, 그리고 거미

우리는 욕망하고 사유하는 기계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사유의 동인으로 찾아낸 것이 욕망이다. 그런데 기계라니? 기계는 입력이 없으면 작동하지 않는다. 외부로부터 자극이 있어야 움직인다. 실제로 대형 선박용 철판을 가공하는 기계를 보면 이 들뢰즈/가타리의 기계가 이해가 간다. 일하기 전의 기계는 쇳덩이다. 마치 거대한 고래의 시체와 같다.


한 명의 직원이 뭔가를 두드린다. 입력을 하고 버튼을 누른다. 굉음을 내며 움직인다. 욕망을 동력으로 사물과 사건을 해석하는 행위는 이와 같다.


결국, 주체는 개별화되고 분열된다. 그러면서, 앞서 말했듯이 통합도 된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통합된 주체와 분열된 주체는 나란히 있다. 통합된 주체는 주체가 새롭게 분열될 때마다, 아니 분열된 주체가 새롭게 태어날 때마다 자기 자신을 교정한다. 마치 기계의 업그레이드처럼.


그 기계는, 거미와 같다. 눈도 귀도 없는 거미. 거미줄을 치고 벌레가 걸리길 기다리는 거미. 그 거미줄에 벌레가 앉아 걸렸을 때, 그때의 그 진동이 있어야 비로소 몸을 움직이는 거미와 같다. 들뢰즈가 말하는 사유는, 그 발생은 이런 거미의 사유다.


열린 가능성

느슨한 자아다. 완고함 없는 주체다. 권위 없는 이성이다. 내가 읽었던 들뢰즈에 관한 책에서, 그리고 이 책에서 들뢰즈가 말한 주체와 자아는 그런 존재다. 어쩐지 가벼운 해방감이 느껴지지 않나? 늘 새롭게 태어나는 나를 만날 수 있다는 예언을 들은 것 같지 않나?


사족 1.

앞서 말한 인트로처럼, 들뢰즈에 관한 책은 많이 읽었지만 들뢰즈가 쓴 책은 처음이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의외로 술술 읽혔다. 아, 물론 중간쯤엔, 맥주를 마시면서 읽은 탓인지는 몰라도. "응? 뭔 소리야?" 했던 부분도 있었지만, 대체로 내 평소의 생각과 비슷했다. 도도해 보였던 그녀가 의외로 나와 여러모로 비슷하다는 걸 발견했을 때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사족 2.

결국, 철학은 이해의 차원이 아니라 공감의 차원 아닐까? 그러니까 당신이 어떤 철학자의 책이나 이론이 어렵다면 그 책이 어렵거나 당신의 이해력이 떨어져서이기도 하겠지만, 그 철학자와 당신이,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면 공명하지 않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러니 인문학 책을 읽고 이해가 안 간다고 너무 열받지 마라. 당신은 그냥 사람을 잘 못 고른 것일 수도 있으니...


사족 3.

놀랍게도, 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이해하는 데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들뢰즈가 친절하게 본문을 많이 직접 인용했고, 각주를 풍부하게 달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역자 서동욱 교수님의 친절한 역주 해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이 정도로 친절한 들뢰즈라면, 그렇다, 철학은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금세 공감의 문제가 될 수 있다.


사족 4.

뒤의 역자의 말은 이 책과 들뢰즈 이론에 관한 훌륭한 요약서다. 역자 서동욱 교수의 논문들을, 역자 스스로 잘 편집하여 구성했다. 이 책을 읽다가 중간에 이해가 안 간다고 집어던지지 말고 일단 끝까지 읽어라. 그리고 이 논문을 읽으면 다 이해가 갈 것이다. 마치 딸이 도저히 안 풀리고 어려워하던 수학 학습지 문제를, 선생님이 단번에 풀어주고 이해시켜 주는 것처럼 말이다.


사족 5.

이 책의 대부분은 동해선에서 읽었다. 7월 셋째 주, 넷째 주, 며칠에 걸쳐서 울산시의원들의 개별 인터뷰를 진행했었기 때문이다. 아직 네 명인가 남았다. 시의원들의 인간적이고 진솔하며 의외의 모습을 봐서일까? 이 책이 더 와닿았다.


사족 6. 

예전에, 한 후배가 내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지인 하나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고 난 후 네가 꼭 읽어봤으면 좋겠다, 너에게 잘 어울린다며 강권했다고 한다. 뭐 종종 이렇게 책부심을 부리는 사람이 있지....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 느낀 건데... 들뢰즈의 해석이 맞다면... 이 소설을 읽은 사람 중에 이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거 아닐까?

(2023.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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