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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Aug 10. 2023

감각의 논리 - 질 들뢰즈

동해선에서 읽은 책들 60

이번 주 휴가였다. 휴가라고 딱히 뭐 특별한 건 없고, 감독이 수도권에 촬영을 가는 바람에 내가 울산에 가 봐야 할 게 없어서 이 주에 휴가를 하기로 한 것이다. 휴가 때 세운 목표는 딱 두 가지였다.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빠지지 않고 수영을 가기, 다른 하나는 이 책, <감각의 논리>를 끝까지 읽기였다.      


벡신스키

거의 삼십 년 전-세월은 정말 빠르다. 대학 때 이야기를 꺼내는데 이십 년도 아니고 삼십 년 가까이 된 일이라고 말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 일이다. 대학 때, 우연히 벡신스키를 알게 됐다. 그의 그림은 충격이었다. 내가 알던 그림과는 달랐다. 그 그림은 몬드리안이나 폴락의 추상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유화나 수채화 같은 회화도 아니었다. 그것은,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면 구상과 추상 사이에 있는 일종의 형상이 유발하는 현상이었다. 그 뒤 알게 된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에서 같은 느낌을 받았다. 누구나 다 아는 그 그림, 교황. 아니, 아무리 예술이어도 그렇지, 명색이 교황을 이렇게 그려도 되나? 이 교황은 도대체 뭐지?  

   

사로잡힌 것들

회화든, 조각이든 서양의 것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리스/로마 신화와 성경을 알아야 한다. 성경 속 인물과 성자들, 관련 에피소드들을 알아야 하고 신화 또한 신의 이름은 물론이고 신들과 요정, 사람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이야기를 알고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각 인물의 성격과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는 상징들에 대한 학습이 되어 있어야 한다. 이런 상징에 대한 학문은 따로 도상학이라고 부를 정도다.      


이 이후의 그림과 조각에도 여전히 서사는 존재한다. 제목이 있고 인물이 있으며 풍경이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세잔이나 모네가 등장하기 전까지 사물과 형상은 그 순간의 형상으로 묶여 있었다. 모네는 그게 싫어서 루앙 성당을 열 몇 번이나 그렸다고 하지 않던가?     


회화는 이를 통해 화가와 감상자를 사로잡는다. 그림의 감상은 경외의 영역에서 이해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그림은 해석의 맥락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사물과 형상은 그림 속에서 스스로의 이야기를 하지 못한 채 화폭 안에서, 감상자의 이해를 바라는 존재로 남는다.      


"발레리의 말에 따르면 감각이란 이야기할 스토리를 통해 우회하거나 번거로움을 거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49.     


"감각은 살 한가운데서 신경의 파장이나 생생한 흥분 위에 직접 실린다. ", 58     


탈주하는 것

베이컨의 회화는 대탈주를 꿈꾼다. 아니 알다시피 20세기의 모든 미술이 이 탈주를 꿈꿨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 달달 외웠던 큐비즘이니 다다이즘이니 초현실주의니 하는 것들, 그리고 몬드리안의 사각형과 폴락의 흩뿌림은 그 탈주의 한 방편이었다. 추상.      


베이컨은 형상의 에너지로 간다. 말없이 말하려 한다. 아니 이해 없이 그저 충격이고자 한다. 앞의 구절처럼 살 한가운데를 파고들려 한다. “신체는 형상이지 구조가 아니다.”, 구조가 아니기에 논리적으로 그 처음과 끝을 파악할 수 없고 단지 알아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여전히 주체로서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않는다. 신체는 “덩어리”로 거기 있다. 많은 말을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거기 있으면서 어딘가를 보지만 그 “거기”가 어디인지, 보는 곳이 어디인지 설명하지 않는다. 때론 누군가와 함께 엉켜 뭔가를 하는데 그 두 신체가 남녀인지, 남남인지, 여여인지 알 수가 없다. 그 둘이 뭘 하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말하는 대신 에너지를 내뿜는다. 그 에너지는 이집트 미술의 부조처럼 눈으로 만져지는 것이며 손으로 행해진 우발적 동작이 만들어낸 사건이다. 색과 빛, 형상은 해석을 거부하는 에너지를 만들기 위해 함께한다.  

    

베이컨은 거부한다.

베이컨은 거부한다. 그가 그린 수많은 삼면화와 초상화, 그 유명한 교황을 그린 그림까지. 그 안에 담긴 인물들의 기관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의 신체로 거기 존재한다. 그림 세 개를 나란히 붙여놓은 뒤 제목까지 붙였는데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다. 동양의 열두 쪽짜리 병풍을 떠올려 봐라. 그림도 부족해서 글까지 써 놨다. 모란, 닭, 맨드라미, 나비, 산, 물, 바위... 모든 사물이 다 의미를 갖고 있다.      


베이컨은 거부한다. 삼면화의 그 모든 면에 다른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서사가 없다. 심지어 호텔인가 싶으면 호텔이 아니고 바닥인가 싶으면 뜬금없이 굵은 선이 지나간다. 의자에 앉아 있나 싶으면 원이나 사각형 안에 머물러 있다. 섹스를 하는 가 싶으면 레슬링을 하는 것 같다. 어떤 그림에서도 서사의 단초, 추리의 단서는 없다.


베이컨은 끊임없이 관객의 해석을 거부한다. 이성을 기반으로 한, 학습된 무엇을 기반으로 한 고정된 구상을 거부한다. 마치 영화 <대탈주>의 스티브 맥퀸 같다. 포로수용소에서 탈주했다가 다시 잡혀오고, 그렇게 갇히자마자 다시 탈주를 꿈꾸는 주인공. 그렇게 베이컨의 그림은 낯선 것으로 남는다. 어제 본 그 그림은 오늘 본 그 그림과 다르다.     


“어떤 기초적인 힘들을 찾아 유기적인 것 밖으로 내몰고 가는 것은 바로 이 기(氣)적 의지이기 때문이다. 단지 이 기적인 성격은 신체가 가진 성격이다. 기란 바로 신체 자신이고 기관이 없는 신체이다.”, 60    


기관 없는 신체

이 말은 들뢰즈 이론에서 중요한 단어다. 도대체 기관 없는 신체라는 건 뭐냐? 이 책에도 몇 번 나온다. 이걸 학문적으로 그럴듯하게 설명한 사람은 많으니, 우린, 자, 우리 맘대로 한번 생각해 보자.      


기관은 Organ이다. 우리가 잘 아는 다른 뜻의 기관과 조직(Organization)의 어원이다. 조직은 특정 목적 달성을 위해 기능적으로 모인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재분류하여 일을 하게 하는 무리다. 생물의 기관, 인간의 기관 또한 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      


기관은 결국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에서 그 쓸모와 존재의 가치를 얻는다. 눈은 보고, 입은 말하고 먹고 숨을 쉬며, 귀는 듣는다. 손은 만지고 쥐며, 발은 걷고 뛰고 선다. 이 용도는 당연한 것일까? 아기를 키워봤다면, 조카가 크는 걸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이 용도는 당연하지 않다. 아기들이 촉감놀이를 하는 것은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자극이 감각 기관인 눈과 귀, 입과 혀로 받아들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자극을 받아들여 수용하고 그로 인해 뇌가 발달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관은 조직/기관처럼 목적에 길들여졌고 길들여진다. 사회와 문화에 의해, 사람다움의 획득을 위해. 그 결과 우리 앞에 어떤 사물, 형상, 자극이 놓이면 우린 관습적으로, 그에 걸맞은 기관을 사용하여 그것들을 수용하고 해석한다.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말했던, 선험적 구조를 바탕으로 한 자극의 수용이고 해석이다.      

그것은 사회적 서사, 문화적 서사의 수용이다. 마치 과거 유럽의 그림을 보고 이해하기 위해선 성경과 그리스/로마 신화와 도상학을 알아야 했던 것처럼, 그래서 라틴어로 된 성경의 독해와 해석이 일부 계층의 특권이었던 것처럼 그림의 감상과 해석조차 그런 것처럼, 지금 우리의 기관 또한 그 수용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 기관을 신체 본연의 것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신체 그 자체의 욕망에 충실해야 한다. 손으로 하여금 보게 하고, 눈과 혀로 하여금 만지게 하며, 발로 하여금 먹게 하는 것이다. 기관과 여타 다른 몸통이 구분이 안 가는 원시 생명체처럼 온몸으로 감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기관 없는 신체는, 앞서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말한 욕망하는 기계가 된다.      


욕망하는 기계, 신체 전체를 기관으로 사용하는 주체, 기관과 신체의 경계를 지우며, 신체의 덩어리로 존재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스스로를 퇴화시켜, 마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괴물처럼 눈앞에 놓인 욕망의 대상인 신체를 찢어발겨 삼키기 위해 꿈틀거리며 오는 신체를 본 적이 있다. 그르렁 소리를 내며 엉금엉금 기어 오는 번들거리고 미끈거리는 신체. 만족할 줄 모르고, 지치지 않으며, 어제와 다르며, 내일을 기약하지 않는 그 신체.


들뢰즈가 돌려 말하는 것

들뢰즈를 비판하는 이들은 그가 다른 이의 텍스트를 통해 말한다고들 한다. 프루스트, 니체, 스피노자, 베이컨, 카프카, 그리고 많은 영화들. 그런데 그는 같은 이야기를 한다. 일관된 목소리와 메시지를 보낸다. 마치 술자리마다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자기 자랑인 사람처럼 말이다.      


들뢰즈는 결국 우리는 발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문명을 이루고 지적인 존재가 된 것이 곧 발전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어쩌면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를 정체시켰으며 스스로를 복제하고 반복하며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것은 무의미한 재현이다. 과거의 회상이다. 어제의 반복이다. 환원이다.      


한 블로거가 댓글로 <차이와 반복>에 나오는 원환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순서 없이 읽는 내가 그 책을 읽었을 리 없다. 집에 그 책이 있어서 말한 페이지를 펼쳐 읽었다. 검색도 해봤다. 그 의미가 <프루스트와 기호들>에 나왔다는 걸 알았다.


앞서 단락에서 말한 반복, 기억의 되새김의 차원을 넘어서는 재현이다. 어제의 단순한 반복인 오늘이 아니라 그 반복 속에서 미세한 차이를 감지해 조금씩 의미를 확장시켜 나가는 재현이다. 그러기 위해선 들뢰즈의 조언을 염두에 둬야 한다.


우린 서사를 답습하면 안 된다. 모두가 다 알지만 그래서 다 보는 멜로드라마와 막장 드라마의 내러티브를 반복하면 안 된다. 아니 설령 반복하더라도, 그 반복이, 반복에 머물지 않도록 온몸을 깨워 그 반복 속에서 차이를 감지해 내야 한다. 주어진 기관, 학습된 기관으론 안 된다. 욕망으로 발현된 기계인 나를 통해 그 차이를 감지해야 한다. 그 꿈틀거리는 베이컨의 신체처럼 약동하며 존재해야 한다. (2023.0810)           


사족

책엔 그림의 번호가 나온다. 물론 책 뒤엔 번호의 그림이 뭔지 이름이 나오고... 그러나 그 번호와 이름만으로 그림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다. 처음엔 일일이 검색해서 읽었는데, 챕터별로 그림을 정리해 놓은 사이트를 알게 됐다. 어디를 가나 나보다 미친 인간은 있기 마련이다. 그런 인간들 덕분에 덜 미친 사람들이 좀 수월하게 사는 것이지... 나만 그 광기를 누리기 뭐해서 후에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을 위해 그 링크를 첨부한다.

http://www.epicurus.kr/Humanitas/389075


사족 2

-글의 한 단락은 자체 검열 끝에 페북과 블로그에선 삭제했다. 전문은 브런치에만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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