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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Sep 05. 2023

일상의 모험 - 서동욱

동해선에서 읽은 책 61

목록

여기 하나의 목록이 있다. 소통, 잠, 자기기만, 유령, 관상술, 얼굴, 패션, 웰빙, 이름, 분열증의 문학, 애무의 글쓰기, 해방의 글쓰기, 노스탤지어, 춤, 예언.... 저자는 이 목록으로 책을 썼다.


"따라서 이 책은 쥐면 이미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부스러기들로 이루어진 책, 물리적으로 가능했다면 시작하는 곳과 끝나는 곳이 없도록 만들었을 책, 어디서부터나 펼쳐서 읽을 수 있는 책이 되었다. 우리의 일상이 시작도 끝도 순서도 없는 것처럼, 연결되거나 마는 복잡한 계단들 속에 들어있는 것처럼, 아무리 원한들 전체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이 책은 길 없이 다니는 자들의 텐트와도 같다.", P15.


능청스러움

그는 이렇게 날 안심시켰다. "아, 뭐, 그냥 생각나는 대로 떠들 겁니다. 써지는 대로 쓸 것이고요. 그러니 대충 아무렇게나 읽으셔도 됩니다." 하며 서문에서 이미 긴장을 풀게 한다. 그는 아마 강의실에도 이러지 않을까? "아, 뭐, 이번 학기는 특별히 어려울 거 없습니다. 일상적인 소재를 갖고 함께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이번 학기의 강의 제목도, 그래서 <일상의 모험>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러나, 속지 마라. 그는 들뢰즈와 레비나스의 철학을 대장 삼고 한국과 해외의 여러 문학을 부하 삼아 21세기 초반의 이슈들을, 몇 개의 화두들을 사정없이 점령해 간다. 처음엔 아무 지역이나, 아무 건물이나 공격하고 점령하는 줄 알았다. 그렇게 각각의 전투를 쫓아가다 보니 하나의 전선이 그려진다. 그는 전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체, 타자, 윤리, 그리고 남은 생을 산다는 것

잠을 통해서는 주체의 자기 동일시의 조건을, 관상술을 통해선 나와 타자의 얼굴을 대면하는 것의 의미를, 자기기만을 통해서는 자기 속임의 이중 속임과 그 트릭과 그 트릭 안에 감춰진 산다는 것의 괴로움을, 유령을 통해서는 죽어서도 사라질 수 없는 주체와 그 주체를 여기에 묶어두는 타자와 관계를, 패션을 통해서는 이 시대의 우상을, 웰빙과 이름을 통해서는 타자에 대한 환대를, 주체와 타자의 호명과 서로의 수용을 말한다.


조금은 다른, 애무의 글쓰기

누군가의 페이스북 프로필에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 사진이 부족해서 글을 쓰고, 글로는 다 말할 수 없어서 사진을 찍는다고.... 애무의 글쓰기에는 이 말이 함축되어 있다. 마음에 두고 있는 말을 정확히 쓸 수 있는 사람은 없고 그 말을 다 쓸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심지어 생각과 말은 불현듯 차올라서, 급기야 넘쳐흘러, 손으로 하여금 쓰게 하는데, 마치 쏟아지는 물을 손으로 받는 것처럼 글은 생각을 다 받아내지 못하여 여기저기 흘리거나 마음에 물기를 남긴다.


애무도 마찬가지다. 아니 정직하게 말하면 섹스도 마찬가지겠지. 저자가 차마 못한 말이지 않을까? 거기엔 갈급함이 있다. 마음 같아선 싹 갈아서 먹어치워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연인이다. 그 연인을 부둥켜안고 수많은 날과 시간을 보내도 내 욕망은 여전히 남는다. 여전히 남기에 사랑하고 사랑하기에 욕망하고, 결핍은 남는다.


철이 없을 땐 이 결핍의 원인을 다른 탓으로 돌리지만.... 나이가 들면 안다. 세상엔 다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걸. 다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다는 걸.... 실천하는 순간 사라지는 환상의 잔여가 있다는 것을, 깨무는 순간 이빨 사이로 빠져나가는 과육이 있다는 것을.


교묘한 작가

그의 강의를 대충 들은 학생은 건질 게 없다고 느끼지 않을까? 그러나 꼼꼼히 들은 학생이라면 그가 무심히 남긴 각주와 참고문헌과 여러 단서들을 종합할 것이다. 그리고 알 것이다. 그가 들뢰즈와 레비나스를 이해하는, 그것도 우리의 일상 속에서, 우리가 늘 접하는 단어와 사태 속에서 이해하는 방법을 넌지시 말하고 있음을....


그러나 그 이해를 강요하지 않고 넘어간다. 자세한 내용은 약사에게 물어보라는 비타민 광고처럼 말이다. 그는 자신의 책과 논문 몇 개, 동료 철학자들의 논문 몇 개를 단서로 남겼다. 마치 "아, 읽으시면 좋은데, 뭐 굳이 안 읽으셔도 되지만.... 기왕이면 읽으시는 게 여러모로...", 흠... 참 교묘한 사람이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이 그가 여기저기 흩어 놓은 단서들, 그 책들을 내가 대부분 이 책을 읽기 전에 사들였다는 것. 그래서 읽으면서 "내 이럴 줄 알았지." 하며 몇 번 무릎을 탁 쳤다.


사족 1

저번에도 말했지만, 그는 나보다 서너 살 많다. 그래서 대학원 세미나에서 선배의 말을 듣는 기분이 들었다. 아, 그리고 글이 기가 막히다. 읽는 재미가 있다. 자, 이렇게 시작해서 저렇게 갔는데 어떻게 빠져나갈 생각이신가... 혼자 걱정하고 있을 때, 그는 마치 명탐정 코난에 나오는 괴도키드처럼 유유히 글의 결말로 쓱 빠져나간다. 흠... 참 교묘한 사람이다.


사족 2

민음사에서 이런 책을 냈다는 것이, 그것도 거의 이십 년 전에 냈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고.... 아니, 어쩌면 이십 년 전에는 대형 출판사가 이런 책을 내는 것이 당연하게 여길 만큼 이런 책이 잘 팔렸던 걸까?


사족 3

분량에 비해 읽는 데 제법 오래 걸렸다. 거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하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제법 많이 마셨다. 다른 이유는 이 책은 눈으로 읽지 않고 소리 내어 읽는 느낌으로 읽었다. 그러니까 그냥 눈으로 활자를 쫓아간 것이 아니라 속으로 소리 내어 읽어나갔다는 것이다. 책을 읽어도 머리에 잘 안 들어올 때, 난 의도적으로 이렇게 낭독의 템포로 글을 읽곤 한다. 물론 서동욱의 글은 찬찬히 읽고 싶어서 이렇게 읽었다.


사족 4

뭐, 별 건 아닌데.... 알라딘 울산점에 있는 <지각의 현상학>은 아직 안 팔렸다. 그냥 그렇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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