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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Sep 22. 2023

지식인을 위한 변명 - 사르트르

동해선에서 읽은 책 62 

"분열된 사회의 산물인 지식인은 그가 이처럼 사회의 분열을 자신 속에 내면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분열된 사회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식인은 역사적 산물입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그 어떤 사회도 자기 자신을 비난하지 않고서는 결코 그 사회의 지식인에 대해 불평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회는 오로지 그 사회가 만들어낸 지식인만을 갖기 때문입니다."-54P


발단은 이렇다. 지난 목요일 백신 1차 접종을 했다. 백신을 맞은 뒤 이상 반응을 보기 위해 삼십 분가량 병원이 지정한 장소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걸 들어서 적당한 읽을거리를 한 권 가져갔다. 얇은 슬링백에 들어간만한 책으로 집어든 책이 이 책이다.


게다가 추석 연휴 동안 갈 곳이라곤 가까운 처가 밖에 없고, 그나마 추석 당일 하루뿐이다. 나머지 연휴기간 동안엔 아내와 딸은 모동숲이나 하고 삼촌집 가서 마리오 카트를 하고 놀면서 날 자유롭게 방치했으니... 그 덕에 이 얇지만 까다로운 책을 다 읽을 수 있게 됐다. 참고로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 아내와 딸은 링 핏을 하고 있다.


순진한 질문과 대답

이 책을 읽는 중간쯤, 대학원 시절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그 학기엔 신문방송학과 수업을 들었는데, 언론에 관한 수업이었던 듯하다. 뭐 어찌 됐든 이런저런 발제와 토론이 진행되던 중 신방과 박사과정 학생이 내게 물었다.(내가 부산에 살고, 울산도 왔다 갔다 하는 걸 알고 있었다.) "부산, 특히 울산의 현장 근로자들이 한겨레 신문을 다 읽어주면 한겨레 신문이 더 잘 될 것 같은데, 왜 그들은 한겨레 신문을 읽지 않을까요?"


지금 생각해 보면 아주 순진한 질문이다. 난 내 경험을 바탕으로 답해줬다. "노조와 노동자를 동일시하면 가능한 의문입니다. 또 노조가 진보적이고, 그 진보적 성향의 바탕에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특정 이론 있다면 가능합니다. 그러나 제 여자친구의 이모부님이 삼십 년 가까이 스타렉스 라인에서 일하셨는데 그냥 평범한 경상도 중년 남잡니다. 마르크스도 모르고, 진보도 모르고, 언론의 성향 따위에도 관심 없습니다. 그분들은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일 뿐입니다. 노조와 그 활동은 그 생계 수단의 유지와 발전을 위한 것이죠. 거기에 무슨 우리가 공부하는 그런 이론이 있지는 않다고 봅니다." 물론 내 대답 또한 순진하다.


진중권을 위한 변명

이 책을 읽다 보면 왜 사람들이 진중권을 변절자, 심지어 어용 지식인으로 오해하거나, 또 그렇게 인식하는지 이해가 간다. 진중권을 비롯한 자칭 타칭 지식인들은, 사르트르의 말을 빌리면 제도권 교육과정과 그 안에 담긴 이데올로기, 자신이 그 공부를 통해 얻은 이론의 보편적 가치, 그리고 자신이 보게 되는 이 현실... 이 세 가지 속에서 고민하고 갈등하게 된다. 그건 너무 자명하다. 


쉽게 말해 학교에서는 가르치는 광고 이론과 현실에서 광고 실행이 다를 때 갈등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때 지식인은 선택한다. 이데올로기로 유지되는 보수적인 세상을 자신이 아는 지식과 이론이 지칭하는 보편적 세상으로 바꾸기 위해 그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과 소위 협업하게 된다.


버려진 사람

양쪽 모두, 그를 싫어한다. 그렇다. 소외된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자인 사르트르의 표현을 빌리면 대다수 프롤레타리아다. 그들은 지식 습득의 체계로 가는 길과 방법이 차단된 계층이고, 지식인은 부르주아와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쁘띠 브르주아로써 부르주아를 위해 봉사하기 위해 교육받고 세상에 나온 존재다. 그런 존재가 자신이 아는 이론의 실천을 위해 노동자 계층과 만나게 되면 이중 첩자 신세가 돼버린다. 부르주아에겐 변절자, 노동자 계층에겐 현실을 모르는, 실천을 도외시하는 이론가로...


그러나 선택한다. 선택한 이상 정당에도 들어가고 노조에도 들어가 활동한다. 그러나 그곳엔 브르주아의 것과 유사한 권력과 헤게모니, 시스템 등이 있고, 당연히 지식인은 그 유령에 환멸을 느끼고 다시 나온다. 그리고 다시 다른 이를 찾는다. 


공부한 것을 말할 뿐

진중권이 이 정권을 비판하고, 보수야당 인사들과도 교류하는 원인이야 뭐 수십 가지고, 그 속내는 내 알 수 없으나.... 난 개인적으로 지식인이라면 그러해야 하고, 또 그러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하지 않나 싶다. 자신이 가진 이론에 견주어 지금 정권을 잡은 이들의 행태나 행위가 맞지 않으면 당연히 나와야 한다. 그게 사르트르가 생각하는 지식인이다. 


그리고 지금 교류하고 있는 보수여당에서 자신의 이론에 걸맞은 세상을 만들려는 시도를 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리고 그것이 이뤄지고 그것이 다시 지배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가 되거나, 아니면 그 과정에서 반혁명적인 행태를 보이면 지식인 진중권은 다시 나올 것이다. 그것이 어찌 보면 변절이고, 변덕으로 보이겠지만 그 멈춤 없는 핀볼 같은 행태, 그 행태를 통해 이 세계라는 판을 흔들어 깨우고, 불을 밝히는 행태가 지식인의 책무일지 모른다. 


지식인의 삶

관건은 무엇을 알고,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행동하느냐이지 그가 어디에 속해 있는가는 아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사르트르의 생각, 또는 실존주의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그렇게 끊임없이 선택하고 미래를 조망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상에 던져졌으나(피투), 미래는 내가 원하는 데로 선택하고 결정하며 살아가는 존재(기투)라는 것. 그것이 인간의 삶이고, 최소한 지식인의 삶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난 이 책을 비롯해서 실존주의를 다룬 책을 요즘 청춘들이 읽어봤으면 한다. 실제로 일본 책중엔 자기계발의 맥락에서 실존주의를 다룬 책도 있으니 말이다.


2년 전 오늘 쓴 글이다. 페이스북이 알려줬다. 요즘 새삼 "지식인"이 참 귀한 시대임을 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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