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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Sep 25. 2023

주름, 갈래, 울림;라이프니츠와 철학 - 이정우

동해선에서 읽은 책 63

예정설, 또는 주름/사건

결론부터 말하면, 만약 당신이 기독교인이거나 성경을 좀 아는 사람이라면 이 독특한 사상을 아주 쉽게 이해할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그랬으니까. 물론 난 전자가 아니라 후자다. 


당신이 오늘 이렇게 살고 먹고 싸고 만나고 헤어지고 웃고 울고 하는 모든 것이... 이 모든 인생의 순간들이 미리 정해진 각본에 의해 펼쳐진 것이라면 어떻겠는가? 무슨 소리야 모든 건 내가 결정해, 하고 말한다면 당신은 기독교, 또는 어떤 종교도 없거나 실존주의자다. 그야말로 무에서 출발하여 내가 행동함으로써 내 인생을 구축한다는 그 이론대로 사는 사람. 


그러나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 당신은 라이프니츠의 이론도 이해할 것이다. 당신과 타자가 만나는 사건, 내가 저번 토요일에 다시 달리기를 하면서 어떤 아줌마와 살짝 부딪혔던 사건, 그 사건들은 모두 당신과 타자와 나와 아줌마에게 내재되어 있던 사건들이다. 서로의 주름이, 심지어 사물과 사람의 주름이 만나 사건이 된다. 모나드다. 영혼 안에 내재되어 있는 사건의 빈위들, 마치 크루아상의 주름처럼 이미 차곡차곡 주름지어 포개져 있는 "나"라는, "인생"이라는 사건의 연쇄들.


가능 세계

SF의 매력적인 소재 중 하나가 가능 세계다. 그러니까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 평행 우주, 다른 차원을 사는 나의 존재 말이다.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그리고 성경에도 나와 있듯이 신은 자신의 모습을 흉내 내어 인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말씀으로 우주도 만들었다. 무기물이든 유기물이든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그 안엔 신의 계획이 내재되어 있다. 


라이프니츠도, 이정우도 주목하는 건 "말씀"으로 세계를 만들었다는 것. 말씀은 로고스고 로고스는 이성이며 쉽게 말해 설계도다. 신이 최상, 최적의 설계도를 기반으로 이 우주를 만들었다면 다른 설계도가 있을 수 있음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설계도 A가 아닌 B를 말이다. 구현되지 않은, 형상화되지 않은 가능 세계. 


우리 또한 마찬가지다. 다른 가능성, 다른 설계도가 존재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내 인생의 다른 시나리오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신은 우리에게 하나의 삶을 허락했다. 아니 우리 모두의 삶을 신의 뜻대로 설계했다. 보기에 좋았더라... 가장 이상적인, 가장 적합한, 신의 로고스에, 세계에 가장 적합한... 기독교인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산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신이 프로그램화해 놓은 사건의 계열, 주름의 빈위에 따라 산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산다는 것은 "인샬라.", 즉 내 자유 의지로 사는 것 같지만 결국엔 신의 뜻대로 살아지는 것임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이런 맥락에서 라이프니츠의 철학을 낙천적인 철학이라고 한다고 한다.


울림- 우리는 모두 우주를 표상한다.

사람은 모른다. 우리의 이성은 완벽하지 않아서 우리의 삶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그 무게를 실감하지 못한다. 그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며 살뿐이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우리는 우주의 일부를 드러내고 있다. 신의 말씀으로 만든 완벽한 우주와 이 세계와 더불어 그 안에 사는 피조물로써 신의 뜻을 구현해 내고 있는 것이다. 


멀리서 보면, 그러니까 우주 밖에서 보면, 인간 하나하나가 각자의 삶의 주름을 펼쳐나가면서 그렇게 큰 우주의 울림, 신의 조화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린 그걸 모를 뿐이다. 


라이프니츠라는 이상한 사람

이상하다. 이 사람, 17세기 사람이다. 이 앞에 태어난 사람이 데카르트, 뉴턴도 동시대 사람이다. 이 뒤에 태어난 사람이 칸트다. 이렇게 놓고 보니 더 이상하지 않나?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대로라면 계몽주의가 도래했던 시대다. 그런데 신의 예정설이라니...


그래서 잊혔다. 아니 최소한 칸트나 데카르트만큼 유명하지 않았다. 흔히들 철학과에서 서양 철학을 공부한다면 데카르트-칸트-쇼펜하우어-헤겔-니체... 뭐 이런 식으로 읽지들 않나? 이 사이에 있는 라이프니츠가 빠져 왔던 것이다. 이유? 앞서 말했다시피 신이 퇴장하던 시기에 다시 철학의 중심에 신을 불러왔으니까..


이후 철학은 알다시피, 대충, 칸트를 거쳐 이성을 중심으로 나아가고 계몽주의가 도래하다가... 주체의 철학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 합리성, 엄밀히 말하면 도구적 합리성을 바탕으로 근대가 열리고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그러다 불현듯 철학자들이 깨닫는다. 아니 도대체 이 이성적이면서 주체적인 인간들이 무슨 세상을 만들어 놓은 거야? 이 야만적인 세상이라니.... 그렇다. 알다시피 20세기 전반부엔 두 개의 세계 대전을 포함해 크고 작은 전쟁들이 계속 이어졌고 후반부에도 국지전과 내전들이 이어지지 않았나? 


이 회의를 바탕으로 비판 철학이, 그리고 자유롭다고 하지만 결코 그 "구조"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인간을 파헤치기 위해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 등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때, 이 이상한 학자, 모든 것은 이미 내재되어 있다고 말했던 라이프니츠가 소환된다. 그리고 새롭게 독해된다. 역설적이게도 구조와 그 구조를 극복할 수 있는 사건의 무한 가능성을 보게 되고....


남은 숙제...


-자 이제, 남은 숙제와 질문들이 있다. 그렇다면 들뢰즈는 어떻게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를 읽었을까? 자유의지를 바탕으로 하는 실존주의적 입장에선 이 주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핀볼처럼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내가 <트루먼쇼>의 주인공처럼 살았단 말이야? 아니, 내가 <다크시티>의 사람들처럼 살았다고? 연이어 소환된다. <매트릭스>, <블레이드 러너>, <메이즈 러너>, <너의 이름은>, <시간을 달리는 소녀> 등등등....


우연히도 한 달 전쯤, 기억날지 모르겠지만, 어떤 미친 X이 동네 중고서점에 들뢰즈의 <주름-라이프니츠와 바로크>를 팔고 갔다. 내가 그걸 샀고... 이제 들뢰즈의 라이프니츠를 읽어 볼 시간...


사족...

어떤 입장으로 살든, 주체의 가치는 소중하다. 당신이 스스로 선택하여 "나"라는 주체를 만들어간다고 생각하든.... 내 오늘의 삶이 신이 만든 완벽한 우주의 표상, 그 일부라 여기고 살아가든....


새로 출간된 <접힘과 펼쳐짐> 안에 이 책이 합본되어 있다. 난 과거의 판본으로 읽었다. 링크를 첨부한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736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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