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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Sep 26. 2023

접힘과 펼쳐짐;라이프니츠, 현대과학, 역易-이정우

동해선에서 읽은 책 64

난해한 목차

제목만 봐서는 뭔 소리를 할지 감이 안 온다. 일단 목차를 보자. 1,2,3강은 각각 복수성, 힘/에네르기, 주름이라는 제목 하에 라이프니츠의 이론을 다룬다. 4,5,6강은 복잡성, 형태변이, 카오스모스라는 제목으로 현대 과학의 비교적 최첨단 이론을 다룬다. 7, 8, 9강은 각각 표현, 기-의미, 대아라는 제목으로 역경, 우리가 흔히 아는 주역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다룬다.


얘기가 더 길어지기 전에 미리 말해두는 데 이 책은 강의록이다. 이화여대 대학원인지 학부인지 모르겠지만 여하간 강의록이다. 이 책은 <삶, 죽음, 운명>, <시뮬라크르의 시대>, <접힘과 펼쳐짐>, 그리고 그가 세운 철학 아카데미에서의 강의록인 <주름, 갈래, 울림>으로 이어진다. 이 중 앞에 두 권은 <사건의 철학>으로 묶여 재출간 됐다.


개인적으로 <삶, 죽음, 운명>은 읽지 않았고 중간에 두 권을 읽었고, 뒤의 한 권은 읽는 중이다. 그의 이 연작은 들뢰즈로 시작해 후기 구조주의를 거쳐 본 책의 라이프니츠의 과학이론과 현대과학, 그리고 주역을 지나, 세 번째 권에서는 라이프니츠의 철학으로 이어진다. 이 글들을 통해 그가 말하려는 것은 도대체 뭘까? 내가 읽은 다른 책 속에 힌트가 숨어 있다. 바로 그린비에 펴낸 개념어 총서 제5권 <주체란 무엇인가-무위인에 관하여>다.


친절한, 그러나 친절하지 않은

저자는 본 서에서 아주 복잡한 현대과학이론을 설명한다. 라이프니츠의 이론과 주역 사이에 가로 놓인 현대과학의 세 이론은 이 양쪽의 이론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그는 학생들에게 잘 기억하라, 음미해 보라, 생각해 보라고만 이야기하지 정확히 이것들이 총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고 가리키고 있는지 말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무엇을 연구해 나갈 것인지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이 일련의 시리즈는 자신의 공부와 연구 과정을 학생들에게 풀어내면서 스스로 다시 한번 정리한 결과물이다. 그래서 설명들은 비교적 친절한데 큰 그림이 좀처럼 잡히지 않는다.


사건, 주름, 우연, 주체, 인생

결국 이 책들에서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와 라이프니츠를 중심으로 그가 하는 말은 이것들이다. 내가 읽은 들뢰즈에 관한 책들과 들뢰즈의 다른 책들(<프루스트와 기호들>, <감각의 논리>)과 읽지 않은 다른 책들도 크게는 이런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고 본다. 어디까지 내 생각이다.


현대과학은 더 많은 변수를 파악하고 더 많은 운동을 해석하고 예측하며 더 작은 단위로 파고 들어간다. 결국 현대과학의 핵심은, 어찌 보면 불규칙성에서 규칙을 찾고, 혼란스러워 보이는 현상에서 복잡한 질서를 찾으며, 거대한 변화를 일으키는 사소한 사건을 찾아낸다.


우리가 진리를 만나는 것도, 주체를 마주하는 것도 이러한 것 아닐까? 주역의 본질 또한 수천 년 쌓인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주체의 해석이지만 동시에 그 해석이 오늘의 주체를 다 말할 수 없고, 결국엔 그 해석이 미처 예측하지 못한 미래로 나아가는 것은 그 모든 불가능한 해석의 시간과 공간을 향해 나아가는 주체라는 거 아닐까?


결국 저자가 <주체란 무엇인가>에서 말했듯, 무엇으로 규정되지 않은, 술어로써 설명되지 않는, 위상학적인 위치를 고집하지 않는 주체로 살아가기 위해선 과학이 밝혀낸 저 현상들이 우리 인생에도 있음을 알고 스스로를 사건과 진리 앞에 노출시키며 살아가야 하는 거 아닐까? 난 최소한 이정우 교수의 책 몇 권에서 그런 메시지를 가려 읽었다.


사족 - 친절한 이론가 VS 친절하지 않은 번역가

이정우 교수의 책, 특히 <개념-뿌리들> 같은 책은 그가 자신이 공부한 것을 얼마나 잘 풀어내는지 실감할 수 있다. 다른 강의록도 마찬가지인데 회중과 학생들이 던지는 질문에 대해 아주 다양한 맥락과 많은 가능성을 열어 놓은 상태에서 답을 한다. 대학의 강의실에선 좀처럼 만나기 힘든 상황이다.


그러나 의외로 번역가로서의 이정우는 논란이 있다. 특히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에 관한 논쟁은 어느 온라인 서점 사이트를 가든 아주 치열하다. 솔직히 이 책을 출판한 곳이 왜 하필 그곳이었나 하는 생각도 들고....


의미심장한 건 이정우가 번역한 들뢰즈의 저서는 내가 아는 한 <의미의 논리> 밖에 없다. 대체로 서동욱이 전기의 들뢰즈를, <안티오이디푸스>를 공부방을 운영해 가며 무려 십 년을 공들여 번역한 김재인이 후기의 가타리와 함께한 들뢰즈를, 그 외 영화에 관련된 몇몇 저작들은 다른 이들이 번역했다. 그러니까 유독 <의미의 논리>만 섬처럼 동동 떠다니는 느낌인 것이다.


사실 번역가 이정우의 논란은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에서부터다. 어려운 특수 용어에 대한 설명 없음은 논외로 치더라도 일단은 한자어를 그대로 사용했던 것이 논란이 됐다. 한자어를 한글로 바꾸지 않고 한자 그대로 썼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나도 이 책을 석사 시절에 읽었다는 건데.... 꺼내보니 한자를 찾아가며 열심히 읽었더라... 그때는 제법 인내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자, 결론적으로, 그럼 번역가 이정우는 왜 친절하지 않은가? 또는 심지어 무성의하다고 비판을 받는가? 그건 그가 너무 많이 알아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대중에게 다가가려 하지 않기 때문이고... 그가 서강대 교수 자리를 박차고 나와 철학 본연의 철학을 공부하고 사유하기 위해 철학 아카데미를 차린 걸 기억해야 한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자기 힘으로 서양철학사를 다시 써낸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런 그에게 대중친화적인, 그래서 시장에서 잘 팔리는, 또는 잘 팔리길 바라는 마음을 기대해선 안 된다. 그는 자기 나름의 철학을 더 깊이, 더 멀리 가져가고 싶을 뿐이고, 그 여정을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막지는 않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그 여정에 데려가고 싶은 마음은 없는 것이다. 올래면 오고.. 싫으면 말고....


그는 철학을 설명하기 위해 철학 밖의 텍스트를 가져와 쓰는 것도 마뜩잖아한다. 그의 책 속에 문학 작품이나 다른 대중문화 텍스트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에겐 다른 들뢰즈의 번역자인 서동욱의 친절함이 없다. 이진경이나 박찬국, 백상현, 고병권의 대중성도 없다. 날 읽고 싶다면 "철학"하는 자세로 읽으라는 것. 그게 이정우의 태도이지 않을까? 난 철학을 가르쳐 줄 테니 그걸로 인생의 비밀을 알아내든, 인간의 비밀을 깨우치든, 우주의 진리를 파악하든... 여하간 그런 건 너의 몫이라는.... 뭐 그런 태도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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