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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Sep 27. 2023

주체란 무엇인가;무위인無位人에 관하여-이정우

동해선에서 읽은 책 65

글 잘 쓰는 학자들

내가 읽어 팬이 된 사람을 꼽자면 라캉의 전문가인 백상현과 영문학자이면서 역시 라캉에 대해 해박한 권택영 교수가 먼저 떠오른다. 또, 하이데거에 정통한 박찬국 교수의 글도 좋아한다. 발터 벤야민과 아도르노를 공부한 김진영 교수의 책도 몇 권 있다. 이 중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이정우 교수다. 이 분의 글은 단순히 나라 밖 이론을 공부하여 정리하거나 적용한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걸 소화하여 자기만의 철학을 정립하여 써 내려간 글이다. 그래서 우리의 현실을 이해하는데 더 용이하고 그 생각의 칼끝이 더 깊이 박힌다. 이 책에서도 그만의 독특한 주체에 대한 생각이 일목요연하게 전개된다. 


주체, 그리고 타자, 파국 그다음엔?

"해체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타자와의 마주침에 충실할 때 주체는 반드시 해체되어 갈 수밖에 없으며 열려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주체성은 그런 해체의 과정과의 투쟁을 통해 새로운 동일성을 만들어가는 능력이며, 그래서 늘 차이생성과 동일성의 교차로/전장戰場에서 성립하는 존재이다.", <주체란 무엇인가ㅡ무위인에 관하여>, 이정우, P13


"산다는 것은 곧 겪는다는 것이고 겪는다는 것은 시간의 지평 위에서 끝없이 생성하는 차이들을 겪는 것이다.", P37.

"제가 나름 공부하고 취미 삼아 읽는 책들의 주제는 크게 보면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주체이고 다른 하나는 타자, 마지막으로 우리입니다. 요즘엔 타자에 대해 읽기 시작했습니다.", 울산의 유명한 디자인/브랜딩/커뮤니케이션 기업의 한 00 대표와의 대화 중에 내가 한 말이다. 이정우 교수의 주체론은 내가 읽어 온 라캉의 주체 이론과는 좀 다르다. 라캉이 욕망과 정신, 심리를 중심으로 주체를 설명한다면 이정우 교수의 주체론은 사회학적이고 윤리학적이며 문화학적이고 정치학적이다. 그래서 과거에 관련 학문을 전공한 사람에게는 쉽게 다가올 것이다. 난 저 위의 문장을 읽으면서 요즘 내가 쓰고 있는 영화 <연인>과 <색계>에 대한 글을 떠올렸다. 사랑은 결국 주체의 파국이다라고 색계의 글 한 단락에 써놨는데 그 파국 뒤에 주체와 타자는 어떻게 되는지 이어갈 수 없었다. 저기서 약간의 답을 얻었다.


술어적인 주체-나를 말하기 위해 말이 길어진다.

"인생이란 이런 술어들을 둘러싼 투쟁의 양상을 띠게 된다. 그리고 이런 인정 투쟁이 경쟁의식, 질시, 험담, 모함,.... 을 낳게 된다. 경쟁의식은 질시를 낳고, 질시는 우월감/열등의식- 사실상 동전의 양면이다.-을 낳게 되고, 증오심은 고통을 낳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술어들 - 각종 형태의 "출신", 전공, 직업/분야, 재산, 신체적 특징들,... 등-에 집착하는 자아의식(흔히 말하듯이, "자아의식 강한" 의식)은 불행한 의식이다. 술어적 주체로 구성되는 사회/세상이라는 곳을 살아가는 우리 인간은 누구도 이런 고통을 피해 갈 수 없다.", 이정우, 23.


남자들은 나이들 수록 술이 취하면 과거를 이야기한다. 나를 설명하지 않고서는 나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 고유명사인 주체는 서술어를 통해 이 사회에 고유의 흔적을 그려나간다. 돌아보면 흐릿해지고, 때론 지워졌을 그 흔적을 반추하기 위해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한다. 그 기억으로 견고하게 붙들고 있는 나라는 존재의 흔적이 오늘의 나를 규정하고 지탱한다. 그리고 다시 그 토대를 발판으로 새로운 나를 향해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를 이야기하면서.. 할 수밖에 없으면서..


그물을 찢을 수 있을까?

"이것은 술어들의 그물로 되어 있는 거대 그물 속에서 자기의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이며, 자기의 이름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그 그물이 고착되어 있을수록 '자기'의 구성은 상투적일 수밖에 없다. 이때 주체는 그물 속에 갇힌 새처럼 펄럭이면서 그저 좀 나은 이름-자리를 잡으려고 몸부림치게 된다.", P33.


세상이 돌고 도는 것처럼 보이고 다들 다르게 살려고 노력하지만 결국엔 사람 사는 거 거기서 거기인 이유일 것이다. 탈-그물화는 그렇게 만만치 않은 것이다. 그물로부터의 탈주는, 그야말로 속세를 떠나지 않고서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일지도. 덕분에 나 같은 이들이 먹고사는 것일 테고.


타자의 자리를 점하지 않았을까?

"동물적 삶이란 이렇게 주체화와 객체화를 둘러싼 피로 얼룩진 투쟁의 장이다. 역사 속에서 확인되는, 인간이 겪어 가는 삶의 과정이 그토록 힘겹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근본적으로 이런 동물적 삶의 구조 위에서 성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P77.


레비나스는 내가 주체로 존재하기 위해 타자의 자리를 점유하지는 않았는지 끊임없이 돌아보고 타자의 자리를 고민하는 것이 타자의 윤리라고 했다. 이정우 교수도 같은 말을 했다. 주체의 시선이 있으면 그 시선에 포착되는 객체가 있다. 주체의 빛이 있으면 타자의 그늘이 있다. 누군가의 주체의 위치를 점하면 누군가는 타자의 소외된 곳으로 물러나야만 한다. 그것이 냉혹한 이 세상의 이치고, 자본주의의 논리다. 그러나 여기서 더 나아간 타자의 윤리는, 이정우 교수가 말하는 무위인인 주체의 윤리는 어느 자리도 점유하지 않으며 주체의 성장을 끊임없이 도모하며 성장하는 주체다. 그것이 가능할까?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의식은 있어야 할 것이다. 내가 일을 맡았을 때, 누군가는 그 일을 못했음을... 내가 여기서 편히 잠들 때, 누군가는 저 밖에서 떨고 있음을... 그것이 이제 막 읽기 저자의 본서로 접어들어 읽기 시작한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의 윤리다. 타자의 거기 있음을 마주 보는 것.


참고로 이 시리즈는 내가 아는 한 여섯 권 나왔다. 어떻게 사다 보니 다섯 권이 있는데... 어느 것도 날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린비의 책만듦새는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다. 2022.0511


어쩌면 이 얇고 작은 책이 이정우 교수가 많은 강의의 말미에 결론으로 학생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앞서 언급한 다른 책들은 보물 지도와 보물이 묻힌 장소에 관한 설명이었다. 그런데 정작 학생들은 그 보물이 뭔지 모른 채 강의실을 나갔을 것 같다. 그 보물 중 하나가 어쩌면 이 책인지도... 술어로 설명되지 않는 주체로 사는... 2023.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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