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영훈 Oct 04. 2023

감정연구 - 권택영

동해선에 읽은 책 66

"삽화적 기억은 나의 마음에 새겨지기에 같은 일을 겪은 나의 기억과 너의 기억은 다르다. 풍성한 기억은 마음의 재산이기에 사랑이라는 감정을 아끼는 것은 손해다. 너를 사랑하는 마음은 넘치기 마련이어서 괴롭지만 그런 날들이 지나면 두고두고 꺼내 보는 풍성한 일기장이 된다. 울고 웃고 사랑했지만 지나고 나면 달콤하게 느껴진다는 <마이웨이>의 노랫말처럼, 이것이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든 회상이자 상상력이다.", P79


쓸데없이 긴 추석 연휴

아내는 추석 다음 날 미국에 갔다. 텍사스에 사는 처제도 볼 겸 겸사겸사. 여행이라면 여행이라 부를 수 있는 이 여정은 지난봄, 처제가 선물한 비행기 티켓에서 시작했다.


아내가 없는 연휴는 쓸데없이 길다. 라떼와 꿀짱구를 사다 달라는 사람도 없다. 하얀 피부를 커튼의 그늘에 감춘 채 오후의 낮잠에 빠져드는 사람도 없다. 아내가 없는 남편은 딸의 아빠 역할에 충실하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토요일과 일요일을 보내고 나서 맞이한 밤. 연휴 내내 맥주나 처마시며 보내는 건 아무래도 아니다 싶었고, 애도 수요일이면 학교와 학원을 가야 하니 숙제도, 공부도 미리 시켜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나 또한 다시 머리를 부팅시켜야 하고...


결국 내가 책을 읽는 동안  공부를 하라고 말하기 위해 이틀 동안 다 읽을 수 있는 책을 골라 잡았다. 이 책이다. 월요일과 화요일, 베란다에 마련한 책 읽는 자리에서 읽었다.

좋은 스승, 선배 또는 어른

대학에서 강사를 할 때, 난 내 나름의 좋은 스승과 선배의 정의를 세웠었다. "제자와 후배는 내가 했던 실수를 하지 않게 하는 사람", 이것이 내가 생각한 좋은 스승, 좋은 선배의 정의였다. 그러나 권택영의 이 책을 읽으면서 좋은 교수와 선배, 더 나아가 좋은 어른의 정의를 다시 생각했다. "인생은 실수를 통해 배우니 실수도, 막연한 내일도, 빌어먹을 사랑도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해주는 사람. 이 책을 읽는 내내 이런 마음이 담긴 연민과 안타까움을 느꼈다.


교수님은 47년생이다. 내 어머니는 물론이고 장인, 장모님보다 나이가 많다. 조만간 팔순을 바라본다. 그 나이가 되어서야 깨달은 인생의 지혜가 있다. 그런데 그 지혜를 대놓고 말하지 않는다. 백 살을 살아보니 인생이 이렇더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사람의 감정에 대해 뇌과학으로, 인문학으로 깊이 들어가 알아낸 비밀을 차근히 설명한다.


그 담담함 속에 간절함이 있다. "인생은 원래 그런 거야. 상처 입고 실수하고 환상에 속고 사랑에 속으면서 그렇게 성숙해지는 거야. 그러면서 어른이 되는 거야."라고 말하고 있다. <생각의 속임수>에서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이성적인 존재이자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지만 그 진화의 기원엔 짐승의, 야수의 뭔가가 있었음을, 그 흔적이 우리의 뇌 속에 남아 우리의 사유와 이미지와 행동과 사랑과 소비와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그 동물적인 뇌와 이성적인 뇌를 동시에 인정하고 스스로를 잘 달래면서 살라고, 이 노교수는 부드러우면서도 안타깝게 말한다.


안타까움

권택영 교수는 하나의 중요한 화두를 챕터마다 반복해서 말한다. 그 화두가 3백50페이지가량 되는 책을 관통하는 메시지다. 책의 내용을 다 잊어도 이 화두만은 잊으면 안 된다. 그래서 혹시라도 잊을까 싶어 절이 바뀌고 장이 바뀔 때마다 다른 형태, 다른 표현으로 그 화두를 반복해서 말한다.


과거, <무한도전-오호츠크해 편>에서 노홍철은 그런 말을 했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한 겁니다라고... 이 책엔 이 문장과 함께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 울어서 슬픈 것이라는 문장도 나온다. 노홍철이 했던 말은 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가 원조다.


믿기 어렵겠지만, 알아서 믿는 게 아니라 믿기에 아는 것이고 사랑해서 몸이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반응을 사랑이라 해석하는 것이다. 우리는 눈과 몸으로 전해지는 사태와 그로인해 촉발된 감정의 동요를 그대로 표현할 방법이 없다. 내 마음에서 솟구치는 욕망을 그대로 실현시킬 방법도, 그 욕망과 욕구에 딱 맞는 이미지와 단어를 붙일 수도 없다.


라캉, 아타루, 그리고 오늘의 권택영 교수가 말하듯이 법이 지배하는 세상, 단어와 기호의 세상에 사는 우리는 주어진 것들 속에서 가장 적합한 대안을 찾을 뿐이다. 내 몸의 울림, 내 감정의 울림은 완전하게 내 몸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다. 마치 약음기를 낀 크리스 보티의 트럼펫 소리처럼... 삼켜지고 잔여 된 뭔가가 남는다.


결국 우린 반복한다. 소비를 반복하고 사랑을 반복하고.... 상징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미치고, 완벽한 상징을 추구하는 사람은 강박적이 된다. 심지어 중독자가 되기도 한다.


반복의 이유

권택영 교수가 이 책에서 하나의 화두를 계속 반복한 건 이 때문이었다. 어느 순간, 무엇을 통해 완전한 뭔가를 이룰 수 있으리라 믿으며 사는 제자, 독자, 후배들에게 그것이 불가능함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건 주체는 자신의 결핍을 스스로, 온전하게 채울 수 없는 존재이기에 이런 또 다른 주체인 타자에게 공감하며 서로에 의지해 살수 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더 나아가, 그렇게 서로에게 의지하되 그 타자를 통해 내 삶의 의미가 완전히 채워질 수 없다는 것을, 그 공허한 공백을 담담히 바라보며 사는 것이 인생임을 말하기 위해서다. 욕망이 담긴 시선인 응시를 거두고 그저 나를 둘러싼 세상과 자연과 사람을 담담히 바라볼 수 있는 연민과 측은함이 담긴 시선을 가질 수 있는 그날이 올 때까지 우리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말하기 위해서다.


사족 1

장인은 생전 처음 내게 추석 용돈을 주셨다. 멀리 떠나는 딸에게 용돈을 주는 김에 장손인 아들과 예쁜 손녀는 물론이고 데면데면한 사위까지 챙겨주기로 하셨던 모양이다.


액수는 수영복을 하나 사면 딱 좋은, 책을 서너 권 사면 적당한 액수였다. 주말에 딸과 중고서점에 갔을 때 딸이 소설 한 권을 골라온 김에 나도 들뢰즈와 가타리에 관한 책 한 권을 골랐다. 오는 길에 맥주를 샀고. 그렇게 내 몫의 용돈은 탕진했다. 딸이 골라 온 소설은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을 연상시켰다. 원작인가? 검색해 보니 아니다.

사족 2

딸은 영어 숙제를 하면서 내게 단어를 물었다. 영어 책과 문제집을 풀면서 말이다. 심지어 새미콜론엔 무슨 의미가 담겨 있냐고 물었다. 딸이 건넨 단어장을 봤다. 검색도 해봤다.


새미 콜론은 딸의 단어장에서 느슨한 울타리 역할을 했다. 하나의 단어가 손에 잡히는 의미로 쓰일 때와 추상적인 의미로 쓸 일 때, 더 나아가 좀 더 은유적으로 쓰일 때를 가르는 담장이었다. 예를 들어 Hold는 동사로는 쥐다, 잡다, 지키다의 뜻이 있지만, 좀 다른 맥락에서 행사를 개최하다, 열다의 뜻도 있다. 또 전쟁 영화를 보면 일제 사격의 개시를 알리기 위해, 사격 충동을 버티게 하는 단어로도 쓰인다. 그렇게 딸은 한 단어가 여러 맥락에서 쓰이는 콘텍스트의 세계로 접어들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주체란 무엇인가;무위인無位人에 관하여-이정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