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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Nov 03. 2023

차이와 타자 - 서동욱

동해선에서 읽은 책 67

논문집

이 책을 읽는데 대략 3주 정도 걸렸다. 4백 페이지가 안 되는 분량을 감안하면 제법 오래 걸린 것인데, 내가 게으른 탓도 있지만 책의 내용이 아주 진지해서이기도 하다. 그렇다. 어렵기보다 진지하다. 논문집이니까. 문제는 난 그런 책인지 모르고 저자의 이름과 목차에 혹하여 사들였고 읽기 시작했다는 것. 첫 번째 장, 하단에 원문 게재 출처와 일시를 보고서야 이 책이 저자의 논문 모음집인 줄 알았다. 속았다는 기분보다, 흠, 각오를 새롭게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논문, 또는 논문 형태의 글이다. 그 글들을 저자가 다듬고 넣고 빼고  한 뒤, 새로운 구조 안에 배열했다. 대체로 1996년에서 99년 사이에 다양한 학술지, 문학비평지 등에 실린 글들이다. 그러나 파편적이지 않고 어수선하지 않다. 들뢰즈와 레비나스의 철학을 중심으로 철학의 과제, 주체와 타자의 문제, 법의 문제를 다룬다. 


특히, 개인적으로 이 책의 미덕은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학자들을 주로 다루면서 그들이 주로 다뤘던 문제, 그래서 내가 당연히 그들에게 관심을 가졌던 이유인 주체와 타자에 대해 아주 체계적이면서도 친절하게 짚어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칼이 없어진다.

노년의 후설이 레비나스에게 해준 이야기다. 어린 시절, 후설은 작은 주머니 칼 하나를 선물 받았다. 그 칼의 날을 벼리기 위해 갈고 또 갈았다. 갈다 보니 칼은 점점 작아졌고 결국엔 없어졌다. 1장의 핵심이다. 


철학의 주요 과제 중 하나인 진리 판명의 선험적 근거를 따져 묻는 걸로 시작한다. 그 근거를 따져 묻고, 그 근거로써의 임의성을 만드는 이성, 진리의 틀, 공통/공동선에 대해 먼저 묻고, 그 진리를 탐구하는 주체의 조건, 주체의 의미를 묻는 장으로 넘어간다. 


진리를 만나는 순간, 기호의 의미를 향해 이성의 고개를 쳐드는 순간에 대해선 이미 <프루스트와 기호들>의 서평에서 말을 해서 길게 말을 하지 않겠다. 다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건 어떤 것의 그러함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그 받아들임을 강요하고, 그 받아들임의 틀이 되는 내 안의 무엇에 대해 의심하고 반성적 시선을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앞서의 예화처럼 무한을 향한 칼 벼리기와 같겠지만 우리는 언제나 다시 칼날을 만들어낼 수 있다. 


주체, 나를 만드는 것

내가 가장 공들여 읽은 챕터는 주체에 관한 장이다. 저자는 사르트르와 레비나스, 라캉을 거쳐 주체의 구성, 주체의 주체됨을 묻는다. 라캉과 프로이트의 주체는 과거에서 출발하여 미래로 향한다. 엄밀히 말하면 나에 정신의 문제, 욕망과 욕구의 문제, 그 근본적 해결의 불가능함, 그 불가능함을 응시하며 삶을 살아내는 법에 대해 말한다.


사르트르는 "자아의 삶이 자리 잡는 곳은 반성된 층위이고, 비인격적 삶이 자리 잡는 곳은 반성되는 않은 층위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인격적 자아이고, 내재적이다. 그러나 주체의 밖에도 나를 만드는 것이 있다. 


사르트르의 주체는 수치의 시선을 통해 형성되는 주체다. 그 시선은 실제로 존재할 수도,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의식은 된다. 나를 대상화하는 시선, 스스로 반성하기 전에 이미 인식되는 타자의 존재가 나를 구성한다. 


알다시피, 이것은, 레비나스의 "얼굴"과 유사하다. 다른 글에서도 말했지만 레비나스는 유대인이고, 유대교 랍비이기도 하며 홀로코스트를 겪었다. 이들에게 무한자, 즉 신의 현현, 즉 신의 임재함과 드러남은 중요하다. 인간이, 주체가 이 유한한 삶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한으로 갈 수 있는, 또는 무한을 만나는 방법은 신을 보는 길 외에는 없다. 그러나 구약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신은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불타는 떨기나무 뒤에서, 구름 속에서, 기적과 음성을 통해 "나타난다."


레비나스는, 거칠게 말하면, 타자의 얼굴에서 신을 본다. 굶주리고, 상처받고, 고통받는 타자의 얼굴과의 대면, 나에게 한 존재의 책임을 묻는 그 얼굴을 통해 무한자는 나타난다. 앞서 미카엘 드 생 쉐롱의 <레비나스와의 대담> 서평에서 썼듯이 이것은 신에게 지은 죄를 속죄받는 제사와 예배는 있어도 사람에게 지은 죄를 사함 받는 그것은 없는, 유대교와 유대인의 전통과 닿아 있다. 사람에게 지은 죄는 사람에게 가서 용서를 구해야 한다. 


사르트르와 레비나스의 주체는 유아론(唯我論)을 극복한다. 또 어찌 보면 자기 심리, 자기 상처, 자기 과거, 욕망, 욕구, 더 나아가 들뢰즈가 지적하듯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동인이 되는 주체의 형성과정과 그 탐구의 저 너머를 가리킨다. 그래서 윤리적으로 다가온다.


나의 나 됨을 부정한 뒤...

이어, 들뢰즈의 주체, 기계론적 주체가 등장한다. 이 부분은 일종의 자기 윤리적이다. 자기 윤리란 무엇일까? 우리는 나의 나 됨을 당연시한다. 내가 가진 유기체적 성질과 그것의 유지를 가능케 해주는 내 기관들의 쓰임을 당연시한다. 이것은 대상이나 현상을 대한 뒤, 그것을 해석하고 수용하는 일종의 틀이 된다. 이것의 반복을 통해 주체는 자기 동일성을 확인하고 지켜나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낯선 것"은 없다. 새로운 것도 없다. 봐야 될 건 눈을 사용하고 먹어야 될 건 입을 사용하며 만져야 할 건 손을 사용한다. 대상이 의미를 던지기 전에 이미 우리는 해석하고 수용한다. 이런 귀납적인 자기를 해체하고, 세상과 대상을 내 신체의 모든 것을 사용하여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될까?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면 분열증적 자아다. 더 나아가면 매 순간 새로 태어나는 자아이기도 하고. 물론 불가능한 과제다. 그러나.... 혹은 그래서.. 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족

베란다에 마련한 "심심하면 책 읽는 공간"엔 아주 두꺼운 책 두 권이 놓여 있다. 하나는 존 맥피의 <이전 세계의 연대기>, 다른 하나는 조던 피터슨의 <의미의 지도>다. 이제 이 책도 그 자리에 놓을 것이다. 

이 책은 2000년 8월 28일에 출간됐다. 그 뒤 올 7월 6일까지 11쇄를 했다. 초판을 그대로 찍기만 했으니 그 중간에 저자가 수정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쇄가 몇 권이라는 정식은 없다. 500부일 수도 있고 500만 부일 수도 있다. 보통은 천부 정도다. 결국 이 책의 1쇄를 천부라고 가정할 때, 이 책은 지난 20여 년간 절판되지 않고 꾸준히 열 번 이상의 인쇄를 하면서 만 부 이상 팔린 것이다. 심지어 어느 것도 수정하지 않고 말이다. 


이런 종류의 책이 이 정도로 팔렸다는 것에 안도해야 하는지, 아니면 20년 넘게 팔리면서 고작 11쇄만 할 정도로 팔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참고로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는 5만 세트였다. 5만 부가 아니라, 5만 세트.


이런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세월을 뛰어넘는다는 것이다. 고칠 필요가 없었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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