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같았던 나날들

영화의 위로 2 - 26 - 해가 서쪽에서 뜬 다면(1998)

by 최영훈

영화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흔히들 세상의 주인공은 나라고, 인생의 주인공은 나라는 생각을 갖고 살라고 한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당당하게 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맘을 먹기도 쉽지 않고, 설령 그런 마음을 먹은들 그렇게 살기도 쉽지 않다. 알프레드 히치콕이 그랬던가? 영화란 지루한 부분이 편집된 인생이라고. 설령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내 인생의 지루한 부분을 열심히 잘라내어 편집한다고 해도 극적인 영화로 만드는 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지루한 장면을 삭제하고, 재미있는 장면을 찾기 위해 그 수많은 인생의 나날들을 얼마나 오랫동안 뒤적거려야 하겠나. <아바타>처럼 세 시간이 넘는 영화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90분짜리 장편 영화 하나 겨우 만들면 다행이다.


이런 평범하고, 솔직히 심지어 지루하기까지 한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묵묵히 살아가는 건 영화 예고편과 같은 멋있는 장면이 연이어지는 시절과 사고처럼 마주치는 순간이 오기 때문이다. 꽃이 필 수나 있을까 싶던 내 인생에도 화양연화 같은 시절이 오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한 순간, 예상치 못한 상황, 예상치 못한 사람에 의해 생각지도 못했던 인생의 극적인 순간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오늘 얘기할 영화가 그런 영화다.


영화의 내용은 간단하다. 의경인 남자와 대학생 여자가 만나 좋은 감정을 갖는다. 관계의 발전을 코앞에 두고 여자는 유학을 가고 남자는 편지를 보낸다. 그러다 남자는 평소에 소망하던 야구 심판이 되고 여자는 연예 관계자의 눈에 띄어 배우가 된다. 배우가 된 여자는 그야말로 벼락 스타가 되고 남자는 심판으로 산다. 프로야구장에서 스치며 만난 둘은 서로의 달라진 처지로 인해 마음만 간직한 채 서로를 본다. 물론 영화의 끝은 해피엔딩이다. 이 해피엔딩 영화, 더 재미있게, 또는 약간 다르게 보는 방법이 있다. 이를 위해 두 가지를 먼저 짚어보자. 먼저 프로야구의 특성이다. 야구라는 종목, 특히 프로야구리그의 특성을 생각해 보자.


두 프로리그의 차이점

프로야구와 프로축구 리그의 가장 큰 차이점은 뭘까? 그 리그의 시원(始原)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영국이 고향인 프로축구는 노동자와 지역 공동체의 취미 활동과 단합 도모를 목적으로 시작됐다. 이후, 점차 참여하는 팀이 많아져서 수준에 따라 리그를 나눴고 성적에 따라 승격과 강등이 되는 시스템을 갖췄다. 이런 시스템은 유럽을 중심으로 프로축구리그를 운영하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볼 수 있다.


미국이 고향인 프로야구는 좀 다르다. 리그 초창기에는 영화 <꿈의 구장>에서도 볼 수 있듯이 취미와 직업으로서의 야구 선수의 경계가 모호한 적도 있었지만 리그가 정착한 이후엔 철저히 대기업과 상업 자본의 동력으로 리그가 운영되어 왔다. 또, 하부리그는 메이저 리그의 선수 수급을 위한 소위 농장(Farm) 역할을 한다. 즉 마이너 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팀이 상위 리그로 진출하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새로운 팀이 메이저나 하부리그에 창단될 수는 있어도 하부리그의 팀이 위로 올라오는 경우는 없다.


미국과 일본, 대만처럼 우리나라의 프로야구도 대기업 중심이다. 미국은 대기업이 직접 운영하지 않지만 팀의 재정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대만과 일본은 우리와 비슷하다. 이런 이유로 프로 야구팀을 창단하고 리그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다. KBO와 같은 공식 협회에 일정 금액도 내야 한다. 결국 리그 참가는 마음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다. 무명의 선수를 불러 모아 묵묵히 훈련을 시킨 후 실력을 검증받게 되면 리그에 참가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 아니다. 리그에 참가하기 위해선 자본으로만 취득할 수 있는 “자격”이 필요하다. 그 자격 조건이 싫으면 소위 독립리그라는, 자본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리그에서 역시 같은 처지의 팀과 경기를 해야 한다.


이런 태생적 차이로 인해 각국의 프로축구리그에선 소위 신데렐라 스토리가 자주 나온다. 8부 리그에서부터 선수 생활을 하기 시작해서 레스터 시티-안타깝게도 올 시즌엔 강등 됐다-와 함께 꽃을 피운 제이미 바디의 이야기와 5부 리그에서 출발해 9년에 걸쳐 한 단계씩 올라와 결국 새롭게 프리미어 리그에 승격한 루턴 타운 FC의 이야기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런 이야기들은 그야말로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것만큼 허무맹랑한 꿈이 현실이 된 이야기다. 거짓말 같은 실화, 꿈같은 이야기 그 자체다.


반면 프로 야구에선 신데렐라 스토리가 거의 없다. 무명의 선수를 불러 모아 묵묵히 훈련을 시킨 후 그 실력을 검증받는다 해도 프로리그에 참가할 수 없다. 당연하게도, 독립리그에서 우승한다고 해도 프로야구 리그로 갈 수는 없다. 물론 가끔 독립리그에서 눈에 띄는 선수가 프로 구단에 스카우트되는 경우가 있지만 흔한 일은 아니다. 신인 드래프트에서 선택되지 못하면 프로야구 선수가 되는 길은 험난하다. 장종훈 씨의 연습생 신화가 지금도 회자되는 이유다.


심판의 3 자성

두 번째 생각해 봐야 할 건 남자 주인공의 직업이다. 그는 프로야구 리그의 심판이다. 야구 심판은 축구와 농구의 심판과 묘하게 다르다. 예를 들어 축구의 심판은 선수들과 함께 뛴다. 주심은 물론이고 선심도 경기의 템포에 맞춰 라인을 오르내린다. 농구도 마찬가지다. 반면 야구의 심판은 그렇지 않다. 배구와 테니스 심판과 유사하다. 그러나 배구와 테니스 심판과는 또 묘하게 다르다. 배구와 테니스 심판은 플레이 공간 밖에 있다. 반면 야구 심판은 플레이하는 공간 안에 있다. 그들은 공과 루와 선을 보기 좋은 곳에 서 있다. 주심은 투구의 스트라이크와 볼을 판정하기 위해 늘 같은 자리에서 날아오는 공을 노려본다.


그래서 축구와 농구의 심판이 경기의 리듬과 속도에 따라 함께 움직이는 경기의 일부인 존재라면 야구의 심판은 경기가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돕는 경기장과 시설, 야구 장비와 비슷한 존재다. 이런 이유로 스포츠 관계자들이 농담처럼 말하는 것처럼 경기가 끝나고 심판이 스포츠 뉴스에 나오지 않는 경기가 가장 완벽한 게임이다.


아주 심플하게 말하면 야구장엔 세 구성원이 있다. 선수, 관중, 그리고 심판이다. 다시 말하지만 심판은 경기장의 주인공이 아니다. 경기의 시작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제3자로 남아야 하는 존재다. 팀은 상대팀과 승패의 관계, 더 나아가 증오의 관계를 맺는다. 팬과 선수/팀, 상대선수/팀은 응원과 저주의 관계를 맺는다. 그들은 서로를 구별하는 유니폼을 입고 등번호를 달고 이름을 새겨 넣는다. 그렇게 서로의 위치와 다름으로 인해 서로의 의미가 확보되고 확장된다.


반면 심판은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는다. 제3자다. 이 제 3자성의 확보를 위해 심판은 검은색 옷을 입는다. 등에는 이름도, 등번호도 없다. 그는 누구와도 소통해서는 안 된다. 당연히 경기 전에 소통하는 것도 불법이다. 그가 경기 중 선수나 관중과 소통한다면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이다. 심판이 관계의 현장에 불려 나올 땐 오직 항의를 받거나 그 항의에 대해 설명할 때뿐이다.


당신이 의미를 얻는 순간

거짓말 같고 동화 같은 사랑 이야기를 다룬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은 왜 하필 야구라는 소재를 선택하고 이렇듯 경기장에선 가장 무명의 존재인 심판을 주인공으로 설정했을까? 그 답이 사랑 안에 있다. 낯선 누군가와 사랑을 한다는 것, 관계없던 타인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된다.


나와 관계가 없는 타인은 제3자다. 무명(無名)씨다. 지하철과 버스에서 매일 옷깃을 스치는 수 백 명의 사람들은 내게 무명의 존재들이다. 무명 씨가 내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은 무명 씨에게 달려 있지 않다. 무명의 A 씨가 자기 나름의 단계를 거치고 절차를 거친다고 해서 나에게 유명의 존재가 될 수는 없다. 냉정하게 얘기하면 내가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3자는 계속 3자로 남는다.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 보면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가 <프루스트와 기호들>에 남긴 사랑에 대한 말은 더 깊이 다가온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그 사람이 지니고 있거나 방출하는 기호들을 통해서 개별화시키는 것이다.”, 이 문장만으로는 다 설명이 안 되는 느낌이다. 뒤의 문장까지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우정은 관조와 대화를 양분 삼아 자라날 수 있는 반면 사랑은 무언(無言)의 해석에서 태어나고 또 그것으로 양육된다. 사랑받는 존재는 하나의 기호, 하나의 영혼으로서 나타난다.”


내 일상이 영화가 될 때

그렇다. 사랑은 나타난다. 나에 해석을 통해 의미가 부여됨과 동시에 나타난다. 나타는 것이 먼저인지 의미부여가 먼저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동시적인 사건이다. 첫 번째 문단으로 돌아가서 히치콕의 말을 다시 생각해 보자. 영화란 지루한 부분이 편집된 인생이라는 말을. 우리 인생에서 가장 영화 같은 부분이 언제일까? 어쩌면 사랑은 지루할 새 없는 블록버스터 아닐까? 인생이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으로 살 수 있는 흔치 않은, 어쩌면 유일한 순간 아닐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 두 주인공은 모든 관중들이 지켜보는 그라운드 위에 서서 키스를 한다. 경기는 잠시 멈춘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착각되는 순간이다. 제3자인 야구 심판도 그 세계의 주인공이 되는 순간이다. 이 영화 같은 순간이 우리가 사랑에 빠진 순간이다. <해가 서쪽에서 뜬 다면>에 담긴 메시지는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물론 그 영화가 끝나면 다시...... 이 이야기는 나중에 또 하자. 오늘은 일단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희망만 품고 자는 걸로.


사족....

아내가 없는 휴일, 딸과 함께 국밥을 먹으러 갔다. 우리 동네의 유명 맛집인 쌍둥이 국밥집-관광책자에도 나오고 SNS 인증 사진도 많다.-엔 본점은 물론이고 2,3백 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분점에도 긴 줄이 섰다. 마침 딸이 순대국밥을 먹자고 해서 길 건너편의 라이벌 가게인 장수 국밥집-순대국밥은 이 집이 더 맛있다.-에 갔다. 국밥이 나오고 양념 부추와 양념장, 그리고 새우젓을 풀어 간을 한 뒤 막 몇 숟갈 뜨는데 커플이 들어왔다.


공기가 냉랭하다. 하필 딸의 뒷좌석에 앉았다. 남자는 내장국밥을, 여자는 돼지국밥을 시켰다. '아, 나도 다음에 오면 내장 국밥을 시켜야겠다.'하고 생각하는 순간, 연인의 날 선 대화가 터져 나왔다. 잠시 후, 여자가 가게 밖으로 나가 통화를 하고 들어오면서 다른 테이블의 의자를 약간 거칠 게 치우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앉자마자 남자에게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화가 난 부산 여자의 사투리만큼 분노를 잘 전달할 수 있는 언어는 없다.


들어보니-들으려고 들은 것이 아니라 들려서 들었을 뿐이다.-내용은 이렇다. 여자가 아프다는 소식에 여자의 지인이나 가족이 여자를 보러 왔는데 남자가 데면데면하게 대하고, 밥을 같이 먹으러 가자는 말도 안 하고 그냥 보내버렸던 모양이다. 여자는 그게 서운했던 것. 결국 참고 참던 여자가 지인인지 가족인지 하는 사람과 통화를 하고 돌아온 후, 눈물을 흘리며 남자에게 쏘아붙였던 것이다.


우리는 그렇다 치고... 옆 테이블에 혼자 앉아있던 할아버지는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몰랐을 듯.... 소주 한 병을 곁들이고 계셨으니 견딜만 하셨으려나? 딸은 이 리얼한 연인 간의 싸움이 재미있는지 짓궂은 미소를 띤 채 국밥을 다 먹었다. 국물 한 방울까지...


계산을 하는데, 서빙하시는 아주머니가 미안해하셨다. 혹시라도 우리가 불편했을까 봐 말이다. 그래서 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속삭였다. "뭐, 저것도 한 때죠. 힘 있을 때나 싸우지. 힘 빠지면, 뭐 그러려니 하잖아요.", 아줌마 역시 작게 속삭였다. "하이고 맞습니다. 싸우는 것도, 마 힘 있을 때 하는 기지."


딸과 걸으며 그 연인들이 어떻게 됐을지, 왜 싸우는 건지 얘기했다. 딸은 여자 편이었다. 여자의 서운함을 계속 들어주고 공감해 주고 미안하다고 해주지 않으면 오늘 오후는 날아갈 것 같다고 했다. 흠.... 이래서 사랑이 어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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