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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절하듯 잠들게 하는 것, 혹은 낮거리의 본질

진지하게 야한 농담들 40

by 최영훈

침대에서 나올 수 없었다.

환절기면 코가 막히곤 하는 딸은 알레르기 약을 먹고 아홉 시 반에 잠들었다. 잠시 후 아내도 졸리다며 아홉 시 오십 분에 침실로 들어갔다. 따라 들어가 섹스를 했다. 깊은 잠을 선사하는 알레르기 약의 효과를 믿었기에 마음껏 격렬했다. 끝났지만 잠들 시간은 아니었다. 최소한 나에겐 이른 시간이었다. 그래도 열한 시는 넘어 자야지, 하는 것이 평소의 내 규칙이라면 규칙이다.


아내 옆에 누웠다. 아내가 잠들면 거실로 나가 잠시 책을 읽다가 자야지, 생각했다. 섹스 후의 나른함이 전신에 퍼졌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아내의 고르고 낮은 숨소리를 기다렸다. 기다렸다. 기다렸다. 들렸나? 다시 눈을 떴을 땐 새벽 세 시였다. 나도 모르게 기절하듯이 잠들었다.


요즘엔 이렇다. 아내와 밤에 섹스를 하고 나면 기절하듯이 잠든다. 자려고 애쓰지 않는다. 당연히 뒤척이는 시간도 없다. 꿈도 꾸지 않는다. 그냥 어느 순간 “뚝”하고 잠들어 버린다. 맨 정신으로 섹스를 한 날에도 어김없이 이렇게 잠들기에 맥주 탓으로 돌리기도 힘들다. 심지어 아내가 나보다 더 오래 깨어 있을 때도 있다. 다음 날 아침, “당신 코까지 골면서 잘 자던데.”하면서 놀린다. 난 평소엔 코를 안 곤다.


새벽에 불쑥 잠에서 깨면 놀란다. 마치 잠든 채 납치당한 후, 낯선 곳에서 깨어나는 기분이다. 한 대 얻어맞고 잠시 기절했다 깨어나거나. 어쩌면 잠시 죽었다가 살아나는 느낌일지도. 이런 잠이 죽음과 닮아 있다면, 그렇다, 행복한, 일시적 죽음이다. 낮에도 그럴까? 낮에는 아니다. 한낮의 섹스가 드문 요즘이지만 그래도 낮에는 깨어 있다. 생각해 보면 이때도 한숨 자야 되는 건 아닐까?


두려움 없이 잠들 수 있는 이유

잠자리에서의 섹스는 하루의 종료이자 일상의 마감이며 사회적 주체의 죽음, 일시적 죽음이다. 사르트르인지, 누구의 말인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주체의 자기 동일성은 이 일시적 죽음 뒤에 깨어난 후 죽기 전, 그러니까 잠들기 전의 나를 되찾는데서 획득된다. 이것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잠들 수 없다. 어쩌면 섹스도 마찬가지일 지도. 오르가슴은 온몸의 신경과 근육을 무너뜨린다. 엄밀히 말하면 섹스는 주체의 죽음을 요구한다.


섹스가 끝난 뒤 내 육체와 주체를 원래대로 수습하고 회복할 수 있다는 확신 없이는 타인의 몸에 날 맡길 수 없다. 파도처럼 날 휩쓸고 가는 그 쾌락에 무한정 몸을 맡길 수 없다. 역설적으로, 많은 이들이 섹스리스로 사는 건 자신의 형성에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이는 시대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한 번의 섹스로 내가 애써 만들어 놓은 “나”가 물거품처럼 사라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러나 그런 이유 때문이라면 걱정 말길, 그런 섹스를 할 수 있고, 그것의 두려움을 아는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 두려움에 뛰어드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니 말이다.


잠들기 전의 섹스는, 한 밤의 섹스는 잠이라는 죽음 이후,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죽음이 오기 전에 맞는 또 하나의 죽음이다. 여덟 시간이라는 긴 죽음 앞에 놓인 전주곡이다. 이 죽음은 하나의 탈피로 시작한다. 침대 밖에서 입고 있던 거추장스러운 옷 - 은유적이든, 실제 옷이든 -을 다 벗고 오직 하나의 사랑하고 사랑받는 존재, 탐욕의 이빨을 드러내고 연약한 뱃살을 보이며 기꺼이 물어뜯고 뜯기길 원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섹스를 하는 동안, 우연히 유리 같이 매끈한 붙박이장 문에 비친 나를 봤다. 아니, 거기에 내가 아는 “나”는 없었다. 오직 탈피를 끝낸 남자가 있었다. 우린 함께 죽음이라는 절정을 향해 갔다. 늘 마주칠 수밖에 없었던 죽음이지만, 맞을 때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쾌감과 단절을 안기는 죽음을 향해, 절정이라는, 오르가슴이라는 죽음을 향해. 그 죽음 뒤, 밤에는, 긴 잠이 찾아온다.


낮거리

다시 말하지만 낮엔 아니다. 돌이켜봐도 모텔이든 여자의 방이든, 내 방이든, 낮에 섹스를 한 후 잠든 적이 없다. 잠시 졸은 적도 없다. 마치 사냥한 초식동물을 꽉 물어 나무 위로 가져 올리는 데 성공한 표범이 느긋하게 그 초식동물의 사체를 응시하듯이 너부러진 연인에게 그런 시선을 던졌었다. 그 무방비 상태의 연인, 나와 함께 죽었지만, 다시 죽어도 좋을, 그러나 이 남자가 육체적 죽음이나 폭력이나 고통을 안기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동반된, 대신 이 남자가 언제나 반복해서 죽어도 좋을 오르가슴이라는 일시적 죽음을 안기리라는 기대를 잔뜩 몸에 품은 채 늘어져 있는 연인.


낮의 섹스는, 결국 이어진다. 한 번, 두 번, 세 번. 나무에 걸어놓은 초식동물을 천천히, 몇 끼에 걸쳐 먹는 표범처럼 그렇게 천천히, 몇 번이고 음미한다. 나 또한 기꺼이 연약하고 무기력하고 무방비한 초식동물이 되어 그녀의 이빨에 육체를 내어준다. 손톱에 피부를 내어준다. 어디선가 피가 나도 좋은 한낮의 죽음, 죽음들.

소위 낮거리라 불리는, 한낮의 섹스가 갖고 있는 쾌감의 본질이 여기에 있다. 몇 번이고 죽을 수 있는 여유로운 시간, 불을 켜거나 끌 필요도 없는 한낮의 태양 아래서, 모두가 살아 움직이는 시간에 몇 번이고 죽었다 살아나는 모험. 이 모험이 끝난 후엔 죽음과 부활의 성흔을 온몸에 간직한 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왔는지 모르는 일상의 사람들을 속이는 전율. 이런 것들이 낮거리에 들어 있다.


모텔에서 저지르는 불륜의 쾌감도 어쩌면 여기에 있는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모든 불륜, 배우자나 연인 외의 사람과의 섹스가 주는 쾌감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잠드는 공간, 집이라는, 가정이라는 공간 밖에서, 잠들 수 없는 공간에서, 잠들어서는 안 되는 시간에 갖는 섹스는 일상으로의 복귀를 강요한다. 죽음을 음미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최대한 빨리, 많이 하고 다시 환한 산 자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 그 스릴이 이 일탈의 본질 중 하나일지도.


나를 버리고, 죽음을 각오하고 침대에 올라야 한다. 내가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지, 지난밤의 섹스를 떠올리면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그렇게 자신을 문 밖에 두고, 침대에선 두려움 없이 죽어야 한다. 그 뒤 우리를 기다리는 잠이라는 한 밤의 죽음, 죽음 같은 휴식이 기다리고 있기에 우리는 이 일상의 공간에서 자신을 죽이고, 죽이고 죽여야 한다. 두려움 없이. 다른 글에도 썼듯이, 우리에겐 조만간 좀비의 시간이 다가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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