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해한 속옷, 또는 무람없어도 받아 마땅한 사랑
진지하게 야한 농담들 41
무해한 속옷
아내와 딸의 속옷은 닮았다. 사이즈만 다를 뿐 색, 모양, 소재까지 닮았다. 봉제선도, 와이어도 없다. 브래지어라기보다는 그야말로 속옷이다. 말 그대로 가려주는. 가슴을 받쳐주고 모아주고, 그래서 그 가슴을 더 돋보이게 하는 기능 따위는 없다. 참 무해한 브래지어다.
여성들 대부분이 이런 속옷을 입는 걸까? 앞서 다른 글에서 쓴, 일본 아가씨들의 소위 승부 속옷 같은 건 사라진 건가? 그렇진 않은 모양이다. 페이스북에 뜨는 쇼핑 사이트의 속옷 광고 - 왜 내 SNS에 야한 속옷 광고가 자주 뜨는지 잘 모르겠다. 뭐, 불만은 없다. -를 보면 여전히 어떻게 입는지 알 수 없는, 엉덩이와 가슴의 볼륨을 용케도 버텨내는 망사로 만든 속옷들이 팔리는 모양이다.
감독과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에 지나치게 되는 울산대학교 앞의 속옷 전문점 마네킹이 입고 있는 속옷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내가 자주 가는 서점이 있는 경성대학교 앞의 속옷 전문점의 마네킹이 입고 있는 속옷도 설명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매번 바뀐다. 봄에는 화려한 꽃으로, 여름에는 시원한 색으로, 이도저도 아니면 호피 무늬로. 레이스와 망사, 최소한의 면적.
보다 보면 묘한 안도감이 들 때가 있다. 다들 학점과 스펙 쌓기에 여념이 없고 취업전선에서 분투를 하고 있는 와중에도 저런 속옷을 입어야 하는 순간이 있다는 것 아니겠나? <88만 원 세대>에서도 나오지만 섹스를 하지 않는 청춘이 대다수인 나라는 이미 희망이 없는 나라다. 그러니 야한 속옷을 여전히 팔고 있는 속옷 회사와 그 속옷을 입고 있는 마네킹은 아직 이 나라가 죽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봐도 무방하다. 다들... 힘내라.
후크의 난해함
아, 이 얘길 하려던 건 아니고, 아내나 딸의 속옷을 보다 보니 후크가 없다. 그나마 아내의 것 중에선 그런 게 눈에 띄는데 딸의 것엔 아예 없다. 그렇다면 이런 속옷은 머리부터 입는 티셔츠처럼 그렇게 입는 거겠지? 흠.. 어쩐지.... 이 속옷, 일상적이다.
내가 젊었을 때 남자들끼리 하던 농담이 있었다. 아니, 어쩌면 아주 심각하게 논의했던 주제였는지도 모르겠다. 브래지어의 후크를 풀 줄 아는가, 안다면 "한 손"으로 할 줄 아는 가, 그 후크가 앞에 있든 뒤에 있든 당황하지 할 수 있는가, 뭐 이런 걸 대화의 화제에 올리곤 했다. 이런 질문에 당황하는 후배가 있으면 자칭 노련하다고 자부하는 선배가 나서 시범을 보여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코미디다.
솔직히 말하면 난 그 후크를 푸느라고 애를 써 본 적이 없다. 당연하게도, 벗기지 말라는 속옷을 벗기기 위해 낑낑 댄 적도 없다. 마지막으로 이 후크를 푸는 짜릿함을 느껴봤는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생각이 나질 않는다. 다들 그렇게 적극적이었던가? 내게 자신을 내 맡긴 여자들은 단단히 결심하고 왔는지도 모른다. 저 놈이라면 내 평생 꽁꽁 감춰왔던 봉인을 완전히 해제하고, 각 잡고, 날 잡고 미쳐보리라 결심하고 왔는지도 모른다. 나야 그 속을 알 수는 없지만, 여하간 결과적으로는 다들 그랬다. 이 자리를 통해 감사함을 전한다. 뭐, 이 글을 볼 리는 없겠지만.
그 짜릿한 순간
돌이켜보면 그 순간만큼 이성을 잃고, 설레고 짜릿했던 순간은 없었던 것 같다. 연인의 브래지어 후크를 푸는 순간, 팬티를 서서히 내리는 그 순간보다 더 강렬한 긴장감을 선사하는 순간이 또 있을까? 혹시 옆에 남편이나 남친이 있으면 물어봐라. 뭐, 많은 이들이 다른 그럴싸한 순간들을 이야기하겠지만 다 뻥이다. 이 글을 읽는 여자 독자들에게 장담하건대 남자들은 그 순간을 위해 사는 단순한 존재들이다. 어느 나이까지는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십 대가 지난 후, 이런 경험을 한 적은 없다. 다들 알아서 벗고 기다렸다. 나 또한 그랬다. 서른이 넘어가서도, 그걸 할 수밖에 없는 공간에 들어와서도 꼼지락거리고 구시렁거리는 건 피차 시간낭비다. 우리의 청춘을 서서히 갉아먹는 세월의 파괴력이 멀리서 어슬렁거리는 걸 직감하기 시작하면 긴 서론은 필요 없다. 이 긴 서론이 필요 없어지는 순간이 왔을 때, 우린 진짜 인생의 본론을 살기로 결심하는지 모른다. 결혼, 가정, 출산... 그리고 나이 듦과 같은.
무해한 속옷과 같은 중년
오늘 아침에도 아내와 딸의 속옷을 란제리 코스로 빨았다. 다시 말하지만 사이즈만 다를 뿐 똑 닮은 속옷이다. 한 사람은 저 소란스럽고 화려했던 젊은 시절을 지나왔다. 한 사람은 그 시절의 요란스러움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린 나이다. 그저 엄마가 입으라는 대로, 권해주는 대로 입는 소녀다. 그 소녀도 마네킹이 입고 있는 속옷을 입고 싶은 날들이 올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런 속옷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 하는 날들이 올 테고. 나의 연인들 또한 그렇게 소녀에서 청춘으로, 청춘에서 어른으로 변해갔을 것이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나와 알고 지냈던 모든 이들이 앞서 말한 무난하고 무해하고 평범하기 그지없는 속옷과 같은 중년의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 배도 나오고 가슴이 처졌더라도 그것을 어떤 옷이나 그 무엇으로도 가릴 생각 없이 그저 편안하게 배우자에게 보여주며 살 수 있길 바란다. 그래도, 그렇게 무람없이 쉬고 있어도 그 모습조차 예쁘고 멋있어 보여 “오늘 밤, 어때?”라는 은밀한 사인을 받을 수 있길 바란다. 그저 그 존재만으로 소중하고 아름답고 귀한 사람이길 바란다. 그렇게 한 없이 편안한 중년의 시간을 맞이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