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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Dec 28. 2023

철학의 태도 - 아즈마 히로키/안천

동해선에서 읽은 책 72

한 해의 마지막 책

애초의 계획은 고병권의 책(북클럽 자본 3권 - 화폐라는 짐승)을 읽은 후 지바 마사야의 책으로 한 해를 마무리할 생각이었으나 분량으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그것이 쉽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던 차에 이 책이 레이더망에 포착됐고 분량도 얄팍하여 사들여 읽었다. 공식적으로 이 책은 올 해의 마지막 완독서가 되겠다.


네트워크의 아이러니

지난 몇 년 간 SNS를 하면서 느낀 건 사람들은 온라인에서건 오프라인에서건 끼리끼리 모인다는 것이다. 사실 그 기원을 생각해 보면 DC인사이드 같은 게시판이 아닐까? 같은 취향, 취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같은 내용을 다르게 얘기하는 형태의 기원을.


텍스트와 사진 중에서 의외로 텍스트의 비중이 높은 페이스북의 특성상 어떤 흐름이랄까, 비슷한 사람들의 엮이는 형태와 사태가 감지될 때가 있다. 이쪽은 이쪽끼리, 저쪽은 저쪽끼리, 이런 사람은 이런 사람끼리, 저런 사람은 저런 사람끼리.... 그래서 뭐랄까.... 아니 이렇게 끼리끼리 네트워크를 할 거면 네트워크의 의미가 없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냥 동문회나 계모임 하고 딱히 다를 바 없지 않나....


오배(誤配), 또는 약한 연결

히로키의 개념 중에서 좋아하는 개념이자 지금 현재 가장 필요한 개념이 오배라고 생각한다. 오배는 여러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지식의 습득 차원이 있다. 어떤 책에서 우치다 타츠루 선생이 말했듯이 서점에서 운명처럼 만나는 책이 있다. 그 책이 인생까지는 몰라도 종종 생각이나 공부의 방향을 제시해 줄 때가 있다. 내가 아이를 서점에 데리고 가서 끌리는 책 세 권을 찾아오는 미션을 시켰던 이유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확실성이 제거된 상태에서 책을 구입한다. 다른 정보 습득도 마찬가지다. 마치 탄도 미사일처럼 알고자 하는 것만 정확하게 타깃 하여 습득한다. 가장 빠른 경로를 안내하는 내비게이션처럼.... 전희 없이 허겁지겁 달려드는 어설픈 청년처럼...


앞서 말했듯 온라인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자기와 다른 사람은 없다.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인다.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오타쿠라고 나 할까? 이런 현상 덕분에 21세기에도 각종 이즘이 그 힘을 유지하고 있다. PC, 즉 정치적 올바름도,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도 이러한 폐쇄적 네트워크, 오타쿠적 이데올로기 종족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즈마 히로키는 낯선 접맥을 희망한다. 낯선 지식, 낯선 사람, 낯선 철학과 접하여 의도하지 않았던 네트워크의 실뿌리가 생성되길 희망한다. 어느 편이냐 묻는 세상의 윽박지름에서 능글맞게 물러나 방관자가 되어 여기저기 기웃대는 사람이 많아지길 희망한다.


옭아맨 넥타이처럼 생각과 사고와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이분법적, 편 가르기의 소모적 논쟁 밖에서 새로운 연대, 미래를 향한 생각, 다른 삶의 가능성, 그리고 이 모든 생각의 토대가 될 수 있는 "철학"을 할 수 있길 희망한다. 정부의 지원을 희망하며 대학 안에서만 새로운 세상, 구조의 분열, 해체의 논리를 얘기하는 죽어 있는 포스트 모더니즘이 아니라 그것의 실천, 삶에서의 실현, 그것이 가능한 공간을 꿈꾼다.


완고함, 또는 촌스러움

아즈마 히로키의 소망, 그 실현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사람들은 대체로 나와 닮은 사람들의 인정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수립하고 보강해 나가니까....


최근, 인근 도시의 홍보 영상을 제작했다. 담당 팀장은 뭔가 트렌디한 영상을 원했다. 우리가 만든 영상을 보고 직접 연락해 온 이유다. 그 요구에 걸맞게,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만들어줬다.


그 영상의 시사회가 얼마 전에 있었다. 일단 시장은 물론이고 모든 국장들이 참석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영상을 보고 그들의 코멘트를 들으면서 두 번째 놀랐다. 그들은 감독과 내가 30대 후반, 그 시기의 스타일의 영상을 최고의 영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촌스럽다는 것은 상대적이다. 절대적이지 않다. 세련된 걸 보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촌스러움을 모른다. 또 다들 같은 촌스러운 생각을 하면 그 생각은 시대의 생각, 사고방식이 된다. 한 도시가 하나의 정치 세력에 표를 몰아줄 때, 그런 도시가 도시의 경쟁력을 잃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역민들이 같은 생각을 갖고 있고, 그 생각에 맞는 정치인이 반복해서 당선될 때 그 지역의 정치도, 삶도, 문화도 멈춘다. 이번 경험을 통해서 재삼 확인했다.


노잼 도시

얼마 전 청주에서 눈썰매장 통로 사고가 있었다. 시와 시장은 노잼 도시를 탈피한, 꿀잼도시로의 도약을 위해 이 시설을 만들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히로키가 이 책에서 한탄하는 부분이 바로 이런 부분이다.


재미있는 것이 재미를 만드는 시대는 지났다. 재미를 유발하는 메커니즘을 이해해야 한다. 히로키의 주장이다. 틱톡에 중독되는 건 그 내용과 함께 그 메커니즘 때문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과거 나이트클럽의 재미가 그 공간에 있지 않고 그 공간에서의 낯선 만남, 그 만남을 가능케 하는 웨이터와 부킹이라는 메커니즘에 있는 것과 같다.


인근의 많은 도시에서 이것을 혼동하고 있다. 얼마 전 유인촌 장관이 내려와 남해안의 관광산업을 활성화한다고 했는데, 그 내용의 대부분은 권역화와 관광 콘텐츠에 집중되어 있다. 관광의 세대별, 성격별, 유형별 메커니즘을 이해 못 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얼마 전 우리 부부는 처남과 함께 광안리 인근의 <청산 1954>라는 식당에 갔다 왔다. 낙지볶음과 수육이 메인인 곳인데 공간은 창고를 개조한 카페를 닮았다. 딱히 음식이 탁월하진 않았다. 다만 멀리 광안대교가 살짝 보이고 통창으로 보이는 풍경이 괜찮다. 때문인지 가족단위의 고객이 많았고, 나보다 나이 든 사람들이 제법 있었으며, 당연하게도 좋은 차들이 주차장을 가득 메웠다.


음식을 먹고 나오는데 젊은 커플이 주차장 입구에 들어섰다. 남자가 중간 크기의 캐리어를 밀고 왔다. 이 식당, 위치가 애매하다. 하지만 금련산 지하철역에 내려서 조금만 걸으면 충분히 올 수 있다. 금련산 올라가는 초입에 있는 식당이지만 자동차가 없는 젊은 관광객도 찾아올 수 있는 이유다.


개인적으로 울산에 트램이 생기면 관광의 메커니즘이 바뀔 것이라고 본다. 이미 콘텐츠는 있다. 관건은 메커니즘이다. 다행인 것은 최근 만난 몇몇 젊은 정치인은 이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있었다. 상권의 부흥, 청년 인구 유출 문제의 메커니즘을 말이다.


개인적으로 히로키는 이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 무엇이 우리의 삶을 재미없게 만드는가? 무엇이 우리의 사고와 커뮤니케이션의 장벽으로 작용하는가? 인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작가인가? 독자인가?... 히로키는 이 짧은 대담집에서 이 문제의 가능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


사족...

이 책은 번역가이자 학자인 안천과 아즈마 히로키의 대담집이다. 초기의 저작인 <존재론적, 우편적>에서 시작하여 <동물화 하는 포스트 모던>, <관광객의 철학>, <약한 연결>, <느슨하게 철학하기>를 관통하는 그의 사고, 생각, 철학관과 철학하기, 그 사유의 방향과 실천을 총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다. 참고로 안천은 사사키 아타루의 <야전과 영원>, <이 치열한 무력을>과 아즈마 히로키의 <관광객의 철학>, <약한 연결>, <느슨하게 철학하기>를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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