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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Dec 19. 2023

철학 연습 - 서동욱

동해선에서 읽은 책 71

"삶은 거칠고 의혹투성이다. 인간은 온 힘으로 이 바위를 밀고 나간다. 힘겨운 전진을 하는 이에겐 두 가지 힘밖에 없는데, 바로 생각하는 힘과 그것을 실천하는 힘이다. 갈대에 걸린 바람이 울 듯 인간은 세상의 기운과 대기가 이동하는 길목에 서서 생각을 하고 소리를 낸다. 기술과 노동과 언어로, 그러니까 망치와 근육과 말하기로 생각한 것이 울려 퍼지게 만든다.", 서동욱, 철학연습., P7.


현대철학이라는 도시

낯선 도시에서 한 달 살았다. 어느 골목이 맘에 들어 좀 오래 머물렀고 해변에 맞닿아 있는 동네가 맘에 들어 그곳에서도 일주일 정도 머물렀다. 그러다 건너편에 보이는 숲이 궁금하여 들어가 열흘 정도 캠핑을 하며 숲을 헤매었다. 


그러다 불쑥 "내가 이 도시를 다 가봤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더 나아가 내 오감으로 체감한 이 도시, 이 도시의 부피와 질감이 이 도시의 모든 것인지, 온전한 것인지 의심이 든다. 그렇게 내가 체득하고 있는 이 도시에 대한 인식이 맞는지 궁금하다. 


내가 이 인식에 다다른 과정, 그러니까 이 도시를 알기 위해 행한 모든 경험과 탐험이 올바른 것인지 궁금하다. 더 궁금한 건 내가 아직 보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한 도시의 다른 곳이 어디이고, 그 중요성이 얼마나 크고 중요한지, 그곳은 내가 아는 곳과 어떻게 연결되며 내가 아는 곳으로부터 어떻게 다다를 수 있는지도 궁금하다. 


지금의 위치를 아는 법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뭘까? 관광 가이드북을 보거나 드론이 있다면 드론을 띄워 구석구석 조망해 보는 것이다. 그런데 관광 가이드북은 알다시피 러프하다. 그러니까 대략적인 윤곽만 있을 뿐이다. 게다가 드론은... 없지. 있어도 생각보다 구석구석 보는 것이 쉽지 않다.


마침 그 도시를 가 본 사람이 있다. 내가 가고 싶었고, 그래서 가 봤지만 미처 다 보지 못한 불안이 있어 더 깊고 먼 탐험을 떠나기 전 내 탐험의 결과를 검증받고 싶을 때, 그때 이 도시를 나보다 먼저 와서 살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구석구석 샅샅이 살펴본 그 사람이 한 장의 지도를 건넨다. 그 지도에 위치와 간략한 설명이 들어 있다. 길과 꼭 가야 할 곳이 설명되어 있다. 


그 지도를 봤다. 어떤 곳은 제대로 갔고 정확히 이해했다. 어떤 곳은 좀 돌아갔으며 약간 다르게 이해했다. <철학연습>은 내게 이런 책이었다. 


서동욱이 건넨 지도

현대 철학을 사유하기 전, 그 철학에 영감을 줬던 근대의 철학자들을 먼저 살핀다. 스피노자, 니체, 키르케고르, 프로이트... 이어서 이들 철학자들에게 영감과 영향을 받은 현상학과 구조주의 철학자들의 화두와 이론이 줄을 잇는다.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레비나스, 레비스트로스, 라캉, 들뢰즈, 데리다... 이들의 탐험을 끝낸 저자는 이들을 열 개의 주제로 이들을 관통하는 철학의 사유를 펼쳐 보인다.


논문을 제외한 - 엄밀히 말하면 논문조차도 - 서동욱의 글이 대개 그러하듯, 그의 글 속에서 철학은 일상과 문학, 대중문화를 동반하여 다가온다. 어려운 걸 설명하기 위해 다른 어려운 단어들을 덧대어 설명하지도 않는다. 단순화와 오해의 우려를 무릅쓰고 가장 쉬운 단어와 예를 가져와 설명한다. 


인생도 이랬으면... 혹은 철학의 이유

불쑥 인생도 이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나쳐 온 길에서 무엇을 못 봤고, 뭘 놓쳤으며 그때 뭐가 부족했고 지금 뭘 해야 하며 앞으로 뭘 해나가야 하는지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놓치고 온 것을 다시 보기 위해  길을 다시 돌아가는 것처럼, 인생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 부족한 것을 보충하고 현재로 다시 돌아올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앞으로의 여정에 뭐가 필요하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아 오늘의 삶에서 낭비하는 시간 없이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철학의 본질은 이렇게 나 자신과 삶 전체를 더듬어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치 넷플릭스에서 영화를 보듯 앞으로도, 뒤로도 오가며 참다운 삶, 본연의 나를 탐색해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과거로 돌아가 수정할 수는 없다. 다만 성찰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내가 했던 실수를 내 뒤에 오는 이는 하지 않도록 일종의 단서를 남겨 놓을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이 후배든, 자식이든 나그네든, 유목민이든...


사족 

이 책을 읽기 전,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 아즈마 히로키의 < 존재론적, 우편적>을 읽고 있었다. 저번 주, 예술회관 카페에서 미팅이 일찍 끝나 감독에게 좀 걷겠다고 하고 피곤해하는 감독을 먼저 보냈다. 난 좀 걸어서 알라딘 울산점에 도착, 사려고 했던 세 권의 책을 들춰보고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서동욱의 책만 샀다. 나머지 한 권은 독일 제국에서의 히틀러의 탄생을 다룬 책 <히틀러를 선택한 나라>, 다른 하나는 울브라이트의 <파시즘>이었다. 


이 책을 다 읽고 다시 들뢰즈와 히로키의 책으로 가진 않을 듯하다.  처남이 회사에서 지원받는 도서 지원금으로 사 준 지바 마사야의 <현대사상 입문>을 올 해의 마지막 책으로 정하여 읽는 것으로 지난 몇 년 헤매었던 "현대철학 도시"의 전체 윤곽을 잡고, 내년부터는 사놓았지만 아직 못 읽은 들뢰즈를 비롯한 좋아하고 궁금한 학자들의 책, 그리고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니체, 하이데거의 책을 구해 읽고 그 윤곽을 파악하려 한다. 그렇게 한 해를 보내고 나면... 그다음은? 글쎄... 이것들, 그러니까 지난 15,6년간 열심히 읽었던 책들을 한번 더 읽는 것으로... 주체, 타자, 본래적이고 선험적인 존재에 대한 사유를 되새김질하고.... 그다음은? 모르겠다. 그건 그다음에 생각하자...

#서동욱 #철학연습 #동해선에서_읽은_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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