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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Nov 14. 2023

모든 삶은 흐른다.- 로랑스 드빌레르

동해선에서 읽은 책 70

항해

"인생은 항해와 같다."는 말은 진부하다. 그런데 이 책에도 나온다. 항해가 인생처럼 어려운 것은 배 때문이 아니라 바다 때문이다. 물론 배 또한 완벽한 배는 없다. 지중해에 떠 있는 항공모함조차 완벽한 배는 아니다. 익숙한 바다는 있어도 온전히 이해된 바다는 없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인생도 비슷하다. 그렇게 많은 현자가 그렇게 완벽에 가까운 삶을 살았고 그 삶을 기록한 무수한 책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불안한 삶을 반복한다. 얼핏, 세상이 바다를 닮을 듯 하지만 사람이 바다를 닮았는지도...


결국, 인생은 내 몸뚱이로 이 세상을 헤쳐나가는 것임과 동시에 나 자신이라는 변화무쌍한 바다를 매일 헤쳐나가는 것인지도... 그래서 이 상투적인 말이 그럴듯한지도... 나를 정복하는 것이 세상을 정복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


등대, 방파제, 닻, 그런데 돛은?

바다 하면 떠오르는 소재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바다와 파도와 태풍... 선원과 배, 등대와 방파제, 간결한 해상 용어, 섬, 심지어 닻까지... 그것들은 주체의 독립성, 삶의 지표와 내면의 견고함, 정확하고 솔직한 표현과 내면의 철학, 나다움, 영원히 사라지는 것도 계속되는 것도 없는 인생을 각각 상징한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돛은 어떤 것도 상징하지 않는다. 돛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돛은 바다에 대한 저항 하면서, 동시에 바다의 난폭함에 무기력한 인간의 양면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태풍이 불면 돛을 내려 바다 한가운데서 버텨야 했고, 삼각돛이 등장하기 전까지 뒷바람을 맞지 않으면 앞으로 가지 못했다. 삼각돛으로 역풍을 이용하기 시작한 후 배는 바람으로부터 약간 자유로워졌다. 아주 약간.... 삼각돛을 이용한 항해는 직선이 아니라 지그재그였으니까...


돛으로 뭔가를 말하긴 아주 복잡하거나 난해했는지도 모르겠다. 바람이 없을 때 배가 기다리듯 때론 인생도 잠시 머물러 때를 기다리라고 말해야 하는지, 아니면 역풍을 맞아도 삼각돛 같은 지혜를 발휘하여 인생의 난관을 헤쳐나가라고 격려해야 하는지, 어쩌면 저자도 확신이 안 섰을지도.


오티움

가장 맘에 들었던 부분이다. 바닷가에 관한 부분. 오티움은 휴식이다. 무엇도 하지 않는. 반면 네고티움은 일상이다. 스케줄이 있고 성과가 있는 삶, 그 자체다. 바닷가가 도구적으로, 그러니까 휴양이나 수상레저나 관광을 위해 본격적으로 사용된 건 얼마 안 됐다. 잘해야 3백 년 정도. 이 짧은 시간 동안 각 나라는 해변 휴양 도시를 만들어냈고 특히 영국이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해변 놀이를 만든 원조국이라고 한다. 의외다. 저자의 말처럼 지중해의 나라들이 아니고 영국 해협을 사이에 두고 영국과 프랑스가 제일 적극적이었다고... 그 덕분인지, 때문인지... 여하간 그 이후로 사람들은 바닷가에서도 바쁘다.


사실상 부산에서 울산까지 있는 해변과 바닷가 중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건물도 없는 해변이나 바닷가는 없다. 해변, 즉 백사장이 없으면 자투리 땅에 카페라도 만들어 놓는다. 하다못해 허름한 횟집이라도... 덕분인지, 때문인지 사람들은 이유 없이 바다를 찾지 않는다.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린 바다를 보면서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다. 바다가 보이는 숙소를 얻고 그 숙소에서 또 고기를 구워 먹고 술을 마시고.... 그래서 일본의 JR 철도 카피가 새삼 와닿는다. "가장 아름다운 바다는 사람이 없는 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

내 휴대폰 배경화면은 딸과 함께 찍힌 사진이다. 송정이다. 2016년 5월. 딸이 겨우 네 살 때.... 바다에 발을 담그는 것도 두려워했던 딸이지만 이상하게 바다를 좋아했다. 아빠와 함께 해변을 가로질러 바다를 향해 걸어 다가가는 걸 좋아했다. 그때마다 난 바람을 막아주기 위해 재킷이나 가져간 담요를 덮어줘야 했다. 감기 걸릴까 걱정이 되어 빨리 차로 데려갔으면 싶었지만... 딸은 한참 바다를 보며 놀았다. 바다를 보기만 해도 좋아라 하는 건 아이와 연인뿐인지도.

요즘 딸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점점 줄고 있다. 난 일요일 아침엔 베란다에 앉아 밖을 본다. 당연히 아무것도 없다. 맨날 보던 광경이고... 그런데 그렇게 몇 분이라도 아무 생각 없이 있는다. 아내도 매일 아침 일어나면 요가 매트에 누워 가만히 있다. 본인은 허리를 푸느라 그런다는데 내가 보기엔 일종의 명상 같기도 하다.


사족...

책 표지에 부제가 있다. "삶의 지표가 필요한 당신에게 바다가 건네는 말.".. 그러니 삶의 지표가 있는 어른은 안 읽어도 된다. 아내에게 한 농담처럼 말이다. "이 책을 감동하며 읽기엔 너무 나이 들어버렸네.", 앞의 책도 마찬가지다.


한 작가는 이 책의 추천사에서 "어느새 마지막 장.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밑줄 박박 그으며 또 읽고 싶은 책"이라고 했는데... 뭐, 그 정도는 아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책에 밑줄을 긋는 건 별로다.


광고계의 격언 중에 이런 말이 있다. "가장 훌륭한 광고가 가장 나쁜 제품을 가장 빨리 시장에서 사라지게 한다."... 아, 이 책이 나쁜 책이라는 건 아니다. 단지 일 년 내내 봤던 광고만큼 대단한 책은 아니라는 것. 이런 책을 보느니 윌리엄 터너의 그림을 차분히, 오랫동안 보는 것이 더 위로가 되고 힐링이 되고... 인생의 큰 비밀을 깨닫게 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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