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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Jan 01. 2024

디바의 메시지

꼰대와 베테랑 그 사이 47

아내의 성공한 유혹

지난달 초, 아내가 공연 정보를 보여줬다. 카톡으로 보니 영화의 전당에서 하는 재즈 콘서트. 3일 연속으로 하는데 라인업이 다 달랐다. 연말에 어디 움직이는 걸 - 물론 언제라도 움직이는 건 별로지만 - 싫어하는 사람이라 떨떠름하게 라인업을 보는데... 31일 공연 라인업에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이정식.


아내한테 그랬다. 이 이정식이 내가 아는 그 이정식이면 이 라인업이 최고라고... 싱어가 윤복희, 소프라노 색소폰에 이정식... 더 이상 말해 뭐 하겠는가? 그러다 잠깐 생각이 스쳤다. 보자.. 두 양반 나이가...

대가 VS 대가

밴드의 오프닝에 이어, 윤복희 선생님은 흰색 미니스커트에 흰색 블라우스셔츠를 입고 등장했다. 첫곡이 끝나자마자 아내에게 속삭였다. "저 양반, 팔순이 넘지 않으셨나?"


몇 곡을 듣는 동안 몇몇의 가수가 생각났다. 다이앤 슈어, 디온 워윅,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등등.... 선생님은 말도 별로 하지 않으셨다. 오프닝이 끝난 후, 30일 날 미리 내려오는데 여덟 시간 걸렸다는 얘기, 자기는 뮤지컬 가수라 히트곡이 별로 없어서 몇 곡 안 되는 곡을 그냥 이어서 불러드리겠다는 망언 아닌 망언, 뮤지컬을 짧게 보여드리려 하는데 제가 뮤지컬을 몇 편(피터팬, 캣츠 등)을 오래 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오래 한 지저스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잠시 보여드리겠다


흑인 가스펠 몇 곡을 부르기 전, 지금부터 태양이 작열하는 미국 남부의 목화밭에서 목화를 따는 흑인 노예를 상상하시라는 부탁에 이어 그 유명한 <Swing Low, Sweet Chariot>을 부르셨고... 독감 주사 맞으셨냐, 후배 남경주가 요즘 독감에 걸려서 아주 고생을 하고 있다. 그러니 여러분도 꼭 예방 주사 맞으시라는, 관객의 연령대에 딱 맞는 당부도 하셨다.


그러니까 90분 가까이 되는 공연 중, 중간에 옷을 갈아입었던 시간과 저 짧은 멘트들을 제외하곤 계속 무대에서 노래 중이셨다는 말이다. 심지어 한오백년을 재즈로 편곡한 연주에선 각 주자들의 솔로마다 그 연주자들 앞으로 이동해서 스캣으로 추임새를 놓고 몸짓으로 박자를 함께 타기도 했으며, 마지막 곡으로 <여러분>을 부를 때는 객석 중앙까지 내려오시기까지 했다. 보는 내가 조마조마했다.


46년생, 61년생

아내는 이정식을 몰랐다. 같이 간 처남도 당연히. 내 앞에 서 있는 이정식은 내가 아는 그 이정식이었다. 우리가 케니 지에 취해 있을 때 케니 지보다 더 소울 풀하고 더 현란한 연주를 보여줬던 한국의 연주자. 내 기억이 맞다면 당시 유명 가수들의 앨범, 둘 중 하나에는 그의 세션 연주가 담겨 있었다. 그야말로 이봉조 이후 가장 유명하고 대중적인 재즈 색소폰 연주자이자, 게다가 당시에는 생소했던 소프라노 색소폰을 대중에게 알렸던 연주자였다. 그리고 현재도.


윤복희 선생님이 옷을 갈아입기 위해 무대 뒤로 퇴장하기 전, 밴드를 소개하며 연주를 부탁했다. 대니 보이의 선율로 시작하여 <You raise me up>으로 이어진 연주였다. 노래 자체가 대니 보이의 선율을 모티브로 한 것이니까. 여하간 연주는 정말...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양반도 환갑이 넘었을 텐데...


그리고 갓 쉰

요즘 종종 나이를 먹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곤 했다. 당연하게도 쉰이 넘도록 살아보는 건 처음이니까. 좋아하는 운동을 못하게 되면 어쩌지... 카피를 더 이상 안 쓰거나 못 쓰게 되면, 책을 읽을 총명함도, 글을 쓸 수 있는 집중력도 떨어지면 어쩌지. 이런 생각들을 종종 하곤 했다.


어제, 두 대가는 이런 내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다. 갈고닦으면, 자기가 갈 수 있고, 운명처럼 주어진 가야만 하는 길을 묵묵히 가다 보면 그 세월의 힘과 두께로 더 오래 그 길을 갈 수 있다고 말해줬다. 꼿꼿하게 서서 어마어마한 에너지로 올드팝에서 가스펠, 뮤지컬 넘버까지 쉴 새 없이 부른, 그야말로 내일모레 팔순의 디바도... 환갑이 넘은 나이에 열두 마디가 넘는 솔로와 두세 마디를 쉼표 없이 미끄러지는 프레이즈를 보여준 이 정식씩도 내게 같은 말을 했다.


객석의 관객 중, 우리 부부와 처남은 젊은 축에 속했다. 대부분 60대 이상으로 보였다. 다들 이 연말에 지하철을 가든 메운 젊은 이들의 기세에 주눅 들지 않고 씩씩하고 화려하게 영화의 전당을 찾았다. 전날의 아이비와 다른 밴드의 공연 대신, 이정식과 윤복희의 공연을 택한 사람들이었다.


새해의 계획

어제, 알고 지내는 메이크업 아티스트에게 카톡이 왔다. 감사한 분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있다. 올 해도 잘 부탁한다... 뭐,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그 친구는 뷰티션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단어야 어찌 됐건, 여하간 그 분야에 들어선 지 5년 만에 제법 안정적인 위치에 올라섰다. 그녀의 전 직업은 사회복지사였다. 그 일을 할 때 우연히 한 모임에서 만났었는데 그때 내가 농담으로 그 일을 하기엔 미모가 아깝다는 말을 했었다. 어쩐지 다른 일을 할 것 같다고도 했다. 물론 못 생긴 메이크업 아티스트도 있을 테고, 예쁜 사회복지사도 있겠지만 외모와 분위기는 얼굴로만 형성되는 건 아니니까. 여하간 그때 그 사람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그 사람을 몇 년 후 촬영 현장에서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만났으니...


인생 이모작이니, 두 번째 챕터니. 뭐 그런 말들이 있는데, 그게 또 준비한다고 되는 것 같지는 않다. 일단은 1막이 좋은 연극이 2막에서도 좋은 것이 당연하고, 첫 장에서 재미있는 책이 두 번째 챕터에서도 흥미진진한 것 아니겠나? 당장에 주어진 한 챕터를 멋지게 살아볼 일이다.


일이야 닥쳐야 하는 직업이니 계획을 세울 수 없어서... 그저 올 해도 일이 주어질 때마다 최선을 다하리라, 더 꼼꼼히, 더 촘촘히 자료를 들춰보고 조사를 해서 고객을 위한 최선의 기획을 하고 카피와 시나리오를 쓰리라. 뭐 그 정도 생각이다.


취미야... 뭐, 올 해도 어김없이 수영을 위해 술을 좀 줄여야겠다는 돼도 안 되는 다짐을 다시 한다. 독서는 지난 몇 년 간 일정한 궤적을 그리며 읽어 왔던 몇몇 학자와 이론을 올 해는 좀 정리하며 읽어나가고... 이다음 해에는 읽었던 것을 한번 더 읽어보자... 뭐 그런 거창한 계획을 세웠다. 언제나 올해는 백 권을 읽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그리고 언제나 그 반 정도 읽고... 뭐 그게 인생이지. 그나마 백 권을 목표로 해서 반이라도 읽지 않았겠나? 어째 좀 무책임하게 들리겠지만 내 생각은 이렇다.


그 외에 여기에 밝힐 수 없는 몇 가지 바람과 기대들이 있으나 이 또한 내 의지만으로 안 되는 것이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기다릴 테고... 취미와 특기와 직업의 경계를 오가는 글쓰기로 말할 것 같으면... 뭐 이거 아니면 딱히 시간을 보낼 방법도 없지 않나 싶어서... 올 해도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 그러나 어쩐지 읽으면 묘한 재미가 있는 그런 글들을 써 나가 보리라. 마음을 먹고 있다. 이 또한 어째 무책임하게 들리지만 어쩔 수 없다.


결론적으로... 뭐.. 올해도 팔팔한 현역으로 날아다니시라. 윤복희 선생님이 어제 내게 보낸 무언의 메시지를 올해의 인사와 덕담 대신 보내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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