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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Nov 29. 2023

모멸감

꼰대와 베테랑 그 사이 46

감독이 겪은 두 가지 일

지난주는 모멸감 속에 보낸 한 주였다. 내가 당한 일 때문이 아니라 감독이 당한 일로 인하여 내가 느낀 감정이다. 삼 년만 지나면  함께 일한 지 이십 년이 되니 그의 일로 내가 모멸감을 느끼는 것이 이상하지는 않다. 또 그의 일이 곧 내 일이기도 하니.


감독이 겪은 일은 이렇다. 예술 관련 단체에 장으로 있는 감독의 선배로부터 전화 한 통이 왔다. 이러이러한 사람이 촬영할만한 사람을 소개해달라고 해서 감독을 추천했다는 것이었다. 일의 크기를 떠나 후배를 떠올려준 선배가 고마워 바쁜 와중에도 그 사람을 찾아갔다. 무슨 전래 놀이 문화 사업을 하는 사람이었다고...


그런데 앉은자리에서 촬영을 의뢰하며 넌지시 하는 말이 "뭐, 재능 기부해 주면 더 좋고..." 했다고... 촬영비 자체도 재능기부 수준일 텐데 저런 말을 했다. 감독은 선배 얼굴을 봐서 꾹 참고 웃어넘겼다고 한다.


두 번째 일은 앞선 글에서 말한 관광 관련 공공 기관의 팀장의 부탁. 연말에 각종 이익 단체와 직능 단체에선 <00의 밤> 따위를 하는 데, 그날 상 받는 사람의 수상 소감을 촬영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시에서 하라고 하는 데 예산은 없다며 말이다. 이 사람은 내 카피의 70퍼센트를 날리고 감독에겐 "이 정도 촬영은 서비스로 해주실 수 있죠, 부탁할게요" 하며 자신 있게 말한 것이다. 영상 촬영이 무슨 중국집 군만두도 아니고.


이 두 가지 사건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이십 년 넘게 카메라를 잡고 살아온 감독이 느꼈을 감정을 생각했다. 전문가가 쓴 카피를 별 고민 없이 훅 날려버린 사람의 한 없는 가벼움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번 주 월요일, 화요일에 있을 최종 미팅을 위해 통화를 하면서 감독에게 이 얘기를 했다. 감독은 오래 생각하지 말자고 했다. 그냥 해달라는 데로 해주고 치웁시다. 화내지 마시고... 그렇게 말했다. 그날 밤, 아주 오래전 일을 떠올리며 모멸감에서 겨우 벗어났다.


인생과 종합격투기

좀 이상한 이야기다. 대학 시절, 기숙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감리교 재단인 학교이다 보니 기숙사의 관장님부터 사무실 운영진들이 다 목사, 전도사, 강도사였다. 관장님은 왕년에 주먹으로 논산을 들었다 놨다 하셨던 분이라 의외로 화통하셔서 우리랑 코드가 통했는데 사무실의 기독교인들하곤 안 맞았다. 특히 조교 하곤.


지금 생각해 보면 조교라고 해봤자 나랑 두세 살 차이였는데, 있는 폼 없는 폼 다잡았고 무게는 관장님보다 더 잡았다. 총 다섯 개의 동 중 일반 대학생들이 주 구성원인 네 개 동의 동장들은 만나기만 하면 조교에 대한 불만을 터뜨렸다. 그렇다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을 리가....


그러던 어느 날, 새 학기가 시작됨과 동시에 기숙사 축구 대회도 시작됐다. 다섯 개의 동이 풀리그를 펼쳐 우승팀을 가리는 것. 그런데 이 조교가 신학생 동의 선수로 출전했다. 그것에 대해 항의하는 동장도 있었지만 난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다. 운동장에선 누구나 공평하니까. 그 동과의 시합, 난 그를 몸싸움으로 괴롭혔고 결국엔 깊은 태클로 그라운드 밖으로 내쫓았다. 그는 몇 달 동안 반깁스를 해야 했다.


인생은 종합격투기랑 비슷하다. 뭐든지 잘하는 선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특화되어 있다. 복싱, 가라데, 무예타이, 킥복싱, 레슬링, 주짓수, 심지어 막싸움까지. UFC 수준까지 가기 위해선 이 모든 걸 조금씩이라도 배워야 한다. 안 그랬다간 그야말로 다른 종목에 특성화된 선수를 만나 저 세상을 갔다 올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입식 타격, 그러니까 킥복싱이나 무예타이만 잘하는 선수가 주짓수와 레슬링이 주종목인 선수와 붙었다가 바닥으로 끌려 들어가면 그야말로 숨 한 번 못 쉬고 탭을 쳐야 한다.


예전에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는데, 우리는 지금 누리고 있는 위치와 상황이 영원할 것이라 생각한다. 분명 여러 상황과 역할을 다양하게 겪으며 살고 있는데 어떠한 하나의 영역과 역할에 도취되어 다른 영역과 역할을 망각할 때가 있다.


또 살다 보면 다른 영역, 다른 역할로 나아갈 때도 있다. 이때, 이미 그 영역에서 나름의 역할을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자신이 있던 영역에선 그 사람이 약자였을 수 있지만 새로운 영역에선 입장이 바뀔 수 있다. 킥복싱에서 1인자였던 사람이 왕년에 킥복싱으로 꺾어 봤던, 먼저 UFC에 들어온 킥복싱 2인자를 케이지에서 오랜만에 만나면 살아 나오기 힘들 만큼 수준차를 느낄 수 있다는 말이다. 결국 어떤 사람을 어디서, 어떻게 만날지 모른다. 사람에 대해 늘 예의를 갖춰야 하는 이유다.


모멸감을 선사한 사람들을 언젠간 다른 그라운드에서 다른 위치로 만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네 취향과 좋은 광고의 조건

최종미팅, 시에서 나온 주무관과 팀장, 관광 기관에서 나온 팀장과 대리, 나와 감독이 앉았다. 우리 둘만 남자. 팀장에게 물었다. "카피를 다 날리셨던데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으십니까?", 팀장이 답했다. "우리 과장님 하고 제 취향이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걸 좋아해서요."


내가 다시 물었다. "좋은 광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답이 없다. 내가 답했다. "아마 업계 사람마다 대답이 다 다를 겁니다. 저는 역추적할 수 있는 광고가 좋은 광고라고 생각합니다. TV나 유튜브에서 광고를 보고 나면 이 광고를 위해 시장조사를 어떻게 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타깃을 누구로 설정했고, 역시 이를 바탕으로 어떤 기획을 하고 기획서를 썼으며, 그 기획서를 바탕으로 어떤 카피 플랫폼을 설정해서 카피를 썼을지... 그것이 그려지는 광고가 좋은 광고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쓴 그 카피는 견주와 개들이 트래킹 하는 걸 촬영하는 동안, 감독님이 000 훈련사님하고 대충 두어 시간 넘게 대화를 했던 내용을 제가 듣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쓴 카피입니다. 견주가 반려견과 시간을 많이 보내려 하는 건 서로에게 주어진 시간의 양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라는 말이 핵심이었죠. 그 안타까움을 담은 카피입니다."


계장이 답했다. "그래도 뭔가 가슴 밑에서 확 치고 올라오는 게 없어서...", 내가 답했다. "그건 개를 안 키우셔서 그렇습니다. 여기 앉아 있는 사람 중에서 개를 키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옆에 앉아 계신 최팀장님은 개를 안 키우시는데 제 카피를 읽고 울컥하셨다던데요.", 계장이 돌아보며 물었다. "아, 그래?"


옆에 있던 대리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아, 우리 사무실에 00 씨가 개를 키우거든요. 한번 보여주고 물어볼까요?", "오, 그러자."....


견주가 왔다. 카피를 읽었다. "앞에 두 단락이 너무 공감되는데요. 진짜 뭉클하네요."... 게임 끝. 그래도 자존심은 상했는지 가운데 한토막은 사족이어서 뺐으면 좋겠다는 "최후의 곤조"를 부린다. 뭐, 그것마저 꺾어버리면 일의 진행이 여의치 않을 것 같아서 받아줬다.


취향대로 할 수 있는 사람

시, 군, 구, 재단, 00청의 영상을 만들 때 자기 취향을 반영할 수 있는 사람은 두 사람뿐이다. 그 기관의 장과 감독. 시의 영상은 시장님의 취향이 반영되고, 군은 군수, 구는 구청장, 재단과 청은 단장과 기관장의 취향이 반영된다. 그 중간 간부들의 취향은 위에서 훅 불어버리면 날아가는, 한 없이 가벼운 무게를 가지고 있다.


영상은, 당연하게도 감독의 취향이 반영된다. 현재 최소한 울산에선 감독하고 다른 취향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순 있지만 감독보다 영상을 잘 아는 사람은 없다. 덧붙여 말하면, 자신의 취향을 말할 만한 수준과 경력을 갖고 있는 전문가는 거의 없고, 있다 하더라도 감독하고 비교할만한 수준은 아니다.


솔직하고 냉정하게  말해, 최소한 울산 지역 안에선 영상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할 사람이 없다. 더 솔직히 말하면 부산, 울산, 경남 지역으로 넓혀도 마찬가지다. 영화나 다큐멘터리라면 또 몰라도 광고와 홍보 영상에 국한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광고 카피는 말할 것도 없다. 울산엔 종합대학도 한 개 밖에 없지만 그 대학 안에도 광고홍보학과는 물론이고 신문방송학과도 없다.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광고와 홍보의 이론에 대해, 그 이론이 적용된 커뮤니케이션 콘텐츠인 광고/홍보 영상에 대해 토를 달만한 사람은 없다. 학자도 프로페셔널도 없다는 것.


이러다 보니, 역설적으로, 개념 없이 나서는 사람이 있다. 카메라 좀 만지고, 몇 개월 홍보실에서 근무하고, 영화 동호회에서 영화 좀 봤다고 겁 없이 말을 꺼내는 사람이 있다. 자기 돈이 아니라 시민의 세금으로 일을 하고, 관련 전문가를 불러 절차에 맞게 일을 진행하고 계약을 했으면 자기 위치에 맞게 위에 계신 분의 의중이나 잘 전달하면 되는데 "내가 해봤는데..."로 시작하는 멘트를 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의외로 이런 멘트, 요즘엔 꼰대들이 아니라 소위 MZ들이 많이 친다. 이 얘기를 아내한테 했더니 직원이 삼천 명 정도 되는 직장에 다니는 아내가 이 답 없는 MZ들의 뇌구조를 이렇게 설명했다. "지들이 다 알아. 지들이 아는 게 답의 전부라고 생각해. 지들한테 정답이 있대. 틀렸다고 그러면 또 꼰대래. 지 이름이 빛나는 일은 나서서 하려고 해. 그런데 팀으로 하는 거, 도와주는 역할은 또 싫어해. 그런 애들이야. 그러니까 그러려니 해 당신이."


열 개의 사과

미팅을 끝내고 감독의 친구 사무실로 향했다. 감독의 한 친구의 처가가 포항에서 사과 농사를 하는 데 이번에 수확한 사과 두 박스를 다른 친구 편으로 보냈다. 그중 한 박스를 가져가라고 전화를 했기 때문이다. 중구에서 외솔교를 건너자마자 감독 친구의 사무실이 있다. 감독이  인사를 권했다.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같이 일하는 최영훈입니다.", "빈이 친구 000입니다."


커피를 한 잔 대접받고 잠시 대화를 하는데..."둘이 아신지 얼마나 됐습니까?", 반건달 같은 감독의 친구가 내게 묻는다. "좀 있으면 이십 년 됩니다.", "야, 오래 하셨네..."


사과 한 박스를 실었다. 대충 서른 개는 들었을 큰 박스. 감독은 "농갈라 묵읍시다."말하고 차를 이마트로 향했다. 모양 빠지게 아무 비닐봉지에 담아 줄 수는 없다며 제대로 된 봉투를 사기 위해서 말이다. 결국 계산대에서 파는 해달인지, 수달인지가 그려진 오백 원짜리 봉투를 사서 주차장에서 열 개를 담아줬다. 예전 같았으면 안 받아갔을 텐데 받았다. 집에 있는 두 여자 때문이기도 하지만 감독의 마음을 넙죽 받아도 될 만한 사람이어서...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세월이 있어서...


갑질 / 회갑 촬영

친구 사무실에 가는 도중, 인터뷰 영상과 관련한 문자가 왔다. 음악은 이렇게 넣어주시고 자막은 이렇게..... 내가 한마디 했다. "미친, 공짜로 받아먹는 주제에... 개념 없네."


감독이 옛날 얘기를 꺼냈다. 울산에 위치한 대기업의 사회공헌분야의 홍보영상 찍을 때의 얘기다. 십오 년도 넘은 이야기. 그 담당 과장이 이런저런 갑질을 해서 감독이 고생을 많이 했다. 지가 술을 마신 후 감독에게 결제를 시킨 것도 여러 차례.


그런데 참지 못했던 것은 "어머니 회갑 잔치에 와서 촬영 좀 해주세요."라는 부탁을 들었을 때라고... 감독은 "제가 그런 걸 할 짬밥은 아닙니다. 적당한 사람 소개해 드릴까요?"하고 거절했다고 한다. 결국 그 뒤로 그 기업과의 일은 끊겼다. 그래도 굶어 죽지 않고 지금까지 버텼다. 이래저래 감독에게 큰 힘이 되어주지 못해서 힘든 일주일이었다.


사족

가방을 바꿔 들고 갔다. 대학 강사 시절 매일 들고 다니던 가방이었다. 들고 가니 감독이 좋아한다. "감독님 이런 취향이셨네.", 가만 보니 감독이 미팅 때마다 들고 다니는 가방은 내가 들고 간 것보다 더 클래식한 것이다. "감독님 취향이 클래식하셨구나.", "마, 사람이 클래식하지 못하니까 취향이 이런 다 아입니까.", 감독의 너스레다. 이 가방, 자주 들고 갈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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