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좋아야 나도 좋다는 말의 이치, 혹은 스노우볼

진지하게 야한 농담들 49

by 최영훈

널 만지는데 왜 내가 좋은 거야?

또 야한 이야기다. 옷을 입은 채로, 그러니까 이렇다 할 불순한(?) 의도 없이 거실에서 걸어가는, 또는 주방에서 뭔가를 하고 있는 아내를 꼭 안을 때가 있다. 당연히 살이 닿는 부분도 없고 어딜 더듬거나(?) 하지 않는다. 물론 가끔 그럴 때도 있지만. 여하간 그렇게 그저 아내의 온기를 느끼고 싶어서 잠시라도 안고 있으면 의도치 않게 반응하는 부분이 있다.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움직이는 녀석이라 난감하다.


주말이나 연휴의 아침, 잠이 물러가고 있는데도 몸은 침대에 붙들려 있는 아내의 폭신한 몸을 만질 때가 있다. 이때는 당연히 나도 잠이 덜 깬 상태인데, 아내의 맨 살을 만지다 보면 내 말을 안 듣는 그 녀석이 나보다 먼저 깨어나 아내를 쿡쿡 찌른다. 이때마다 내가 하는 말이 있다. “아니 내가 당신을 만지는데 왜 내가 흥분하는 걸까?”, 그러면 아내는 늘 같은 말을 한다. “만지고 싶은 여자 만지는데 반응이 없으면 그게 더 문제지.”, 이렇게 담담하게 말을 한 후 내 손이 맘껏 돌아다니도록 놔둔다. 그렇게 아내의 온기를 손끝으로 만끽한 뒤 먼저 침대를 빠져나온다. “커피 내려줄 게.”


궁금하다. 언제나 그렇다. 내가 아내를 만지는데 정작 먼저 흥분하는 사람은 나다. 샤워를 하고 앞만 가리고 총총 거리며 지나가는 사람은 아내인데 흥분은 내가 먼저 한다. 애무를 받는 사람은 아내인데 흥분하는 사람은 나다. 희한하지 않나? 반응이 없어도 그 행위를 하는 동시에 반응한다. 소리로든 육체적으로든 반응이 있으면 당연히 더 크게 반응한다. 이건 마치 누군가에게 밥을 떠 먹여 주는데 내가 배부른 거랑 같지 않나? 아닌가?


상호작용, 또는 선순환

그런데 나만 그런 건 아니다. 생각해 보면 진하게 키스를 하거나 관계 도중 파트너가 내게 짙은 애무를 하면 내 쪽에서 반응한다. 당연하게도 그게 커지고 흥분이 되고 사라져 가던 기운이 돌아온다. 허리에도 없던 근력이 생기고 허벅지에서 사라져 가던 지구력도 솟아난다. 당연히 나를 품고 있던 여자는 자기 안에서 점점 팽창하는 나를 느끼며 나를 더 격렬히 애무한다. 나를 기분 좋게 해 주기 위해서 애무를 한 상대는 흥분한 내 신체로 인해 더 큰 기쁨을 느낀다. 그러니까 일종의 투자 같은 건가?


상대방이 무던히, 기꺼이 내 손길을 받아들일 때 난 흥분한다. 당연하게도 나 또한 상대의 입술과 이빨과 혀를 반갑게 맞이할 때 흥분한다. 심지어 이빨과 손톱의 고통을 자발적으로 원할 때도 있다. 쾌락과 고통이 상대로부터 와서 내가 흥분하면 그 흥분으로 인해 달라진 내 신체로 인해 상대는 더 큰 쾌락을 체험한다. 일종의 선순환이다. 아닌가?


바로 이 지점이, 내가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이해 못 하는 지점이다. 더 나아가 성매매도. 당연하게도 난 성을 구매한 적도 없고 강제로 누군가를 추행하거나 범한 적도 없다. 보기보다(?) 민감한 사람이라 오래 사귄 연인이나 배우자라 하더라도 상대가 소극적이거나 불편해하면 금방 풀이 죽는(?) 편이다. 당연히 흥도 안 나고. 그렇지 않나 다들? 그런데 싫다는 사람과 강제로 하고 돈만 주면 어느 누구와도 하는 사람과 하는 게 좋을 리 있겠나? 아 물론, 애초에 그럴 돈도 없었고, 지금도 없지만...


타자의 행복이 곧 나에 행복

매거진의 기조와 독자의 바람을 살짝 배신하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틀어, 그러니까 철학적이고 고상한 방향으로 생각을 전개해 보자. 결론적으로 상대가 좋아야 나도 좋은 것이 섹스다. 어쩌면 우리 삶 전체가 그런지도. 그러니까 일종의 호혜성이라고나 할까? 먹는 거만 봐도 배 부른다는 거짓말이 진실이 되는 경우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이 말의 본뜻이 심리적인 것이라면 섹스에 한 해서는 그야말로 신체적이라는 점이다. 나에 쾌락을 위해 상대에게 먼저 쾌락을 줘라. 그러면 그 쾌락이 복리 이자처럼 배가 되어서 돌아올 것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섹스의 황금률이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안았던 여자들은 솔직하고 정직했다. 신체도, 그 표현도. 그래서 내가 자신 안에서 움직이는 동안 자신이 내게 키스를 퍼붓거나 목덜미를 물고 늘어질 때 자신 안에서 내 것이 크게 부푸는 것이 느껴지면 “아~ 커진다.” 같은 멘트를 가는 한숨에 섞어 내뱉곤 했다. 그 후 더 크게 느끼고 싶어서 자신의 입을 다른 용도로 열심히 사용했다. 자신이 기분 좋기 위해서. 나 또한 그 의도를 알기에 기꺼이 내 신체를 내어주고 근육을 불태운다. 그렇게 잠시나마 타자의 행복이 곧 나에 행복이라는 이상이 실현된다.


사실, 뭐 연애든 결혼생활이든 비슷한 논리다. 오래 연애하려면 나에 행복만큼 상대방의 행복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아니 상대가 행복해야 내가 행복하고, 솔직히 편하다. 응, 그러니까 집안이 조용하고 내가 저녁에 조용히 맥주를 마시기 위해선 아내가 영육 간에 편안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심오한 진리를 동서양의 거의 대부분의 유부남들은 터득하고 있다. 그리고 이 진리를 침대 위에서도 실천하고 있는 것이고.


자기중심의 행복, 자기 행복 중심의 삶

뉴스에서도 그렇고, 서점가의 책들도 그렇고 다들 자기 얘기만 한다. 자기를 계발/개발하고 자존감과 자존심을 얘기하고 자기 건강, 미래, 복지, 심지어 견해와 이데올로기까지. 육체적인 쾌락의 맥락에서도 마찬가지다. 리얼돌도, 딜도를 비롯한 각종 자위기구도 오직 자기만의 쾌락을 위해서다. 그 도구적이고 기구적인 섹스 안엔, 오고 가는 쾌락 속에 그것이 증폭되는 경험이 없다. 오직 “나”만 있을 뿐이다.


그렇다. 내가 생각하는 섹스는 기브 앤 테이크가 아니다. 기브 앤 테이크의 반복, 그 반복 속에서 점점 커지는 무엇이다. 그러니까... 흠... 일종의 스노우볼 효과라고 해야 할까? 하면 할수록 점점 커지는 것이다. 나만을 위해서도 아니고 타자만을 위해서도 아니다. 둘 모두 감당할 수 없을 수준의 큰 쾌락, 쾌락의 눈사태로 발전하는 것이 섹스다.


다시 이야기를 좀 고상하게 전개해 보자면, 엄밀히 말하면 가족의 행복도 같은 맥락이다. 가족의 행복은 구성원의 행복의 합이 아니다. 그 이상이다. 일 인분의 행복이 합쳐진 것이 가족의 행복이 아니라 그 이상의 행복이, 혼자서는 절대로 만들 수 없는 행복이 가족의 행복이라는 것이다.


젊은 후배들의 이야기를 건너 들어보면 다들 연애도, 결혼도, 당연하게도 출산도 두려워한다. 이성적인 판단이라고 우기고 싶겠지만 그건 두려움이다. 계산기를 두드려 본 두려움. 어떤 행복은 계산기나 통계로 잡히지 않는다. 섹스의 행복과 쾌락이 삽입과 피스톤 운동의 시간, 그리고 사정 순간과 오르가슴에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뇌 과학자들이 아무리 뇌 사진을 찍어본다 한들 그 모든 과정에서 오고 가는 감정의 격류와 호르몬의 변화와 심리적 충족감, 그것으로 형성되는 행복은 숫자로 환원될 수 없다. 단순한 대차대조표로 한 사람의 인생을 평가할 수 없듯이 우리의 행복 또한 그렇고 어젯밤의 섹스 또한 그렇다.


이전에도 얘기했듯이, 돌아보면 다들 전력으로 사랑했다. 내 젊은 날의 사람들은 그랬다. 그때 우리의 청춘은 타자의 품에서 부서졌다. 산산이, 남김없이. 그렇게 아낌없이 청춘을 불사르고 맞이한 지금, 이렇게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인 야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쓰고 있다. 다 읽었으면, 뭐 하나? 오늘은 미세 먼지도 없는 일요일이고 춥지도 않으니, 어디 가까운데... 나갈 생각 말고 오늘도 그냥 실내에 있어라. 뭐 하냐고? 뭘 뭐 해. 뻔하지. 다들 연인을, 배우자를 위해 자기 한 몸 불살라라. 파이팅!!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야하게 생각하면 야할 수도 있는 이야기 파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