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그렇겠지만 나 또한 매번 똑같다. 설과 추석, 날과 날씨만 다를 뿐, 함께 보내는 사람도, 하는 짓도 대체로 비슷하다. 딱히 내세울 게 없는 남자인 내가 그나마 다른 남자보다 남편감으로 가진 메리트가 있다면 시댁이 미국에 있다는 것. 덕분에 연애시절부터 현재까지, 21세기의 명절을 처가에서 보냈다.
명절 당일, 오전에 가서 차례를 지내고 점심을 먹은 뒤, 처가 근처에 있는 사상 시외버스터미널 근처로 걸어가서 그 안에 있는 쇼핑몰에서 쇼핑을 하거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거나 마트에 가서 가볍게 장을 본다. 그 뒤 저녁 준비를 해서 저녁을 먹고 오는 것이 다다. 집에서 차로 이십 분도 안 걸리는 곳이고 한 달에 몇 번은 장녀의 얼굴을 보시는 장인 장모님은 자고 가라고 잡으시지도 않는다.
이번 설에도 그랬다. 처남차를 얻어 타고 간 덕분에 아내가 나와 맥주를 한두 잔 마셔줬다는 것, 장인어른이 식구별로 오천 원어치를 한 로또를 나눠줘서 그 추첨까지 보고 왔다는 것이 좀 다를 뿐이었다. 아, 물론 다 꽝이었다.
캄캄한 방을 가득 채운 것
잠자리에 누웠다. 열한 시 반. 침실은 캄캄했다.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눈을 감았다 떴는데도 똑같네.”, “그러게.” 새삼스레... 원래 침실엔 작은 빛도 없다. 아내나 나나 깜깜한 상태에서 자는 걸 좋아한다. 심지어 침실에 있는 보일러 컨트롤러에서 새어 나오는 빛도 신경에 거슬려서 뭔가로 가려놨을 정도다. 그런데 새삼스레....
누워 있는데, 아내에게서 새 향수의 향기가 났다. 얼마 전, 랑콤 향수의 샘플을 써 본 아내가 나에게 어떠냐고 물었었다. 워낙에 향이 나는 뭔가를 쓰지 않는 사람이어서 그런지 오히려 전혀 어색하지가 않았다. 잘 어울렸고, 좋다고 했다. 아내도 좋았었는지 미국에 사는 동생과 대화하다 그 향수 이야기가 나왔고 처제는 미국에서 돌아오는 딸의 편에 그 향수 세트를 사서 보냈다. 우의 좋은 자매다.
컴컴한 침실에 아내의 향기가 가득 찼다. 아내의 배를, 이어 손을 만졌다. 부드럽다. 늘 하던 멘트를 했다. “아유. 부드러우시네.”, 아내도 늘 하던 멘트로 답했다. “네, 제가 험한 일을 안 해서요.” 늘 상 주고받는 대화의 레퍼토리인데 할 때마다 웃기다. 피식 웃었다. 잠시 후 아내가 말을 이었다. “어떻게. 새해 첫날부터 뜨겁게 보내볼까?”, 난 빵 터졌다. “야. 이렇게 웃겨놓고 무슨 분위기를 잡냐?”
말은 이렇게 했는데 스윽~하고 다가오는 아내에게 몸이 먼저 반응했다. 아내의 향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렇게 아내의 고운 피부에, 새로운 향수에 깊게 취해 시간을 보내고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아내의 작은 변화, 나에 큰 반응
그 사람에게 향수는, 생각해 보니 엄청난 변화다. 한결같은 사람이다. 직장도 보수적인 곳이다. 헤어스타일도 액세서리도 구두도 패션도 한결같다. 자기 말로는 마흔을 넘기면서 미모를 잃고 유머를 장착했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여전한 미모에 능글맞은 유머까지 장착됐다. 자기 회사의 고위직과 어울려 회사의 미래를 논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 나름 스트레스가 심할 텐데도 자기는 자기 회사를 사랑한다며 진지하게 얘기한다. 그러니까 수십 년간 지각 한 번 없이 다녔겠지.
그런 사람이 크고 작은 변화를 줄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집의 인테리어 공사 같은 큰 변화를 줄 수도 있다. 그리고 이렇게 살짝 향을 바꿔줄 때도 있다. 나만 볼 수 있는 뭔가(?)를 살짝 바꿔줄 때도 있고. 관건은 이 살짝 바꿔준 것을 눈치채는 것. 그리고 변화의 바람에 기꺼이 흔들려 주는 것.
다시 말하지만 아내에게 향수는 엄청난 변화다. 그 변화는, 앞서 말했듯 몇 가지 우연들이 겹쳐 만들어졌다. 아내가 한 백화점에서 우연히 향수 샘플을 받아 들었고 그걸 뿌려 본 뒤, 아내도 나도 맘에 들어했다. 아내는 딸이 미국에 가 있는 동안 처제와 딸에 대해 이야기하다 우연히 그 향수 이야기를 꺼냈고 그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맘에 담아 뒀던 처제가 그 향수 세트를 보냈다.
그 후, 아내가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하고 잠이 드는 침실의 향은 그 향수가, 그 향수를 자신의 향으로 정한 아내의 향이 차지했다. 있는 듯 없는 듯한 은은한 향, 아주 가까이 다가가야, 아내가 내 앞을 스쳐가야 전해졌던 은목서나 고광나무의 꽃향기를 닮았던 아내의 향 대신, 그보다 조금 더 화려한 향이 아내의 향이 됐다. 그리고 난 그 향에 이렇게 기꺼이 유혹되었고...
무심히 보내버린 꽃과 계절이 아쉬워서
사람도 같고 마음이 한결같아도 서로를 대하는 기분은 새로울 수 있다. 오래 사귄 연인이든, 우리 부부처럼 서른 이전에 만나, 남자는 쉰을 여자는 사십 대 중반을 넘긴 부부든 상관없다. 누군가 작은 변화를 줬다면 그 변화를 알아채주고, 그 변화에 기꺼이 흔들려주면 충분히 새로울 수 있다. 아내가 머리를 자르라면 자르고 수염을 깎으라면 깎으면 된다. 내 향에 포로가 되어 달라면 얼씨구나 좋다 하고 포박당하면 되고... 그뿐이다.
새로운 기분을 내보겠다고 도심의 멋진 호텔에서 호캉스를 하고 경치 좋은 곳의 풀빌라를 갈 필요도 없다. 몸을 만들어보겠다고 헬스클럽에 등록해서 삼일만 나간 뒤 그만둘 필요도 없다. 화려한 체위를 해보겠다고 유연성 향상을 위해 필라테스에 등록해서 입고 다닐 레깅스 쇼핑에 열을 올린 뒤 ‘아, 난 역시 뻣뻣한가 봐.’하는 생각 끝에 일주일 만에 그만둘 필요도 없다. 그저 무난하고 무탈하게, 건강하게 살아가면서 소소한 변화들을 크게 받아주면 된다.
나이가 들은 뒤에야 계절마다 바꿔 피는 꽃이 눈에 들어오는 건 그 변화가 나이가 들어야 보이기 때문이 아니다. 젊은 날에는 변화의 현상을 작위적으로 만들려 애쓰기 때문이다. 뭔가 엄청난 변화만이 변화라고 인식하고 그렇게 인식된 변화가 있어야 일상에, 삶에 긴장감과 신선함이 발생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들뢰즈가 그랬던가? 어떤 의미는 늦게 찾아오고, 어떤 기호는 뒤늦게 해석되곤 한다고. 그렇다. 그때, 그 풍경, 그 사람, 그 향기가 어떤 의미였는지 그때는 미처 모를 수 있다. 심지어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그저 매일 겪는 일상이었다고 여기고 살다가, 어른이 된 어느 날 불쑥 그날의 그 풍경을 떠올렸을 때, 그제야 의미를 획득하는 경우도 있다.
다시 말하지만, 나이가 들어서야, 마흔을 넘기고 쉰에 들어서야 계절의 변화와 꽃의 피고 짐에 눈이 가고 마음이 설레는 건, 그래서 꽃이 보이는 족족 사진에 담고 계절이 변할 때마다 어디라도 잠시, 하다못해 교외에 있는 아담한 사찰이라도 다녀오는 것은, 진즉에 그렇게 하지 못한 채 보낸 수많은 계절과 눈과 마음으로 담아내지 못한 채 보내버린 꽃들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이 크기 때문이다.
연인도, 부부도 마찬가지 아닐까? 젊었던 시절을 돌아보고 꽃다웠던 시절의 사진을 들춰보는 건 그 시절을 만끽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이다. 우리 생의 가장 젊은 순간은 바로 오늘이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많이 달라진 우리지만 지금 이 순간이 가장 눈부신 순간이다. 가장 부드럽고 가장 향기로우며 가장 설레게 하는 순간이다. 이상한 말로 빵 터지게 만든 뒤에도 몸을 달아오르게 만들 수 있는, 그런 날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