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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Mar 17. 2024

어제의 나로는 더 이상 안 될 때

수영장에서 건진 철학 53

서로를 가늠한 시간

오키나와 스타일의 아가씨를 비롯한 새로 들어온 멤버들과 수영을 한지 보름이 넘었다. 주말을 제외하면 대충 열 번 정도 함께 수영을 해 본 것이다. 그 사이 서로의 체력을 가늠하고 실력도 어림잡을 수 있었다. 소위 실력과 체력이 좀 돼서 5,6번 안쪽에서 수영을 할 수 있는지 아니면 그 뒤에서 수영을 하는 것이 나은지 상호 간에 감을 잡게 된 것이다.      


새로 들어온 젊은 남자 회원 두 명은 체력이 좋다. 나보다 대략 열 살에서 열다섯 살 정도 어리지 않을까? 그러니까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쯤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여자도 마찬가지지만 남자도 옷을 입혀봐야 대강의 직업과 나이의 견적이 나오지 수영복만 입고서는 잘 감이 안 온다. 게다가 우린 다 수모를 쓰고 있지 않나? 흰머리도 안 보이니 그야말로 액면가로만 판단하는 건데 다들 뭐 몸매도 괜찮고, 배도 안 나오고 주름도 없다 보니 이렇게 나이의 가늠의 폭이 넓을 수밖에 없다. 그나마 나처럼 흰 눈썹을 갖고 있는 이라면 ‘아하, 이 양반 나이를 좀 자셨구먼.’ 할 수 있지만.     


아가씨의 비밀

이야기가 좀 샜다. 여하간, 앞선 글에서 썼듯이, 이 중 오키나와 스타일의 아가씨는 나름 체력과 속도에서 자신이 있었는지 내 앞에 서 왔다. 심지어 날렵한 3번 아줌마 앞에 설 때도 있었다. 그런데 250미터 자유형 웜 업을 할 때마다 세 바퀴쯤 되면 쉬었다. 처음엔 장거리에 취약한 것이라 여기고 넘어갔다. 그런데 이 아가씨, 핀 수영을 할 때는 속도도, 체력도 좋다.


물론 우리 반 대부분이 작년, 안전상의 이유를 들어 강사가 부탁해서 숏핀으로 바꾼 반면 아가씨는 아직 롱핀을 사용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아가씨가 유독 핀 수영의 속도가 빠른 건 발차기의 속도가 빠르고, 롱 핀 덕분에 발차기의 피로가 현격히 줄어들기 때문이다. 때문에 아가씨의 수영 속도는 발차기가 좌우하있다는 감이 왔다.


이 사실을 더 분명히 안 건, 저번 주였다. 이 날 중급반과 고급반 강사가 몸이 안 좋아서 초급반 강사가 전체 반을 컨트롤했다. 이 강사는 올 2월까지 우리 반의 강사였는데, 앞서 다른 글에서 썼듯이 선수 출신으로 영법의 기초와 정교함을 제대로 잡아주는 걸로 유명한 사람이다.      


이 강사가 우리에게 자유형 세트를 시킨 후 세트가 끝나자 다른 세트를 시키기 위해 우리 레인 쪽, 스타트 라인 위에 섰다. 강사는 오키나와 스타일의 아가씨에게 말을 걸었다. “왼 손이 너무 빠져나가요. 한 번 고쳐서 해보세요.”하고 폼을 지적했다. 이후 다시 세트가 진행 됐고 세트가 끝난 후 강사가 다시 왔다. 그는 우리의 세트 중 몇 개의 랩을 지켜본 듯했다. 다시 오키나와 스타일의 아가씨에게 다가왔다. “팔을 전혀 안 쓰시네요. 그냥 폼으로 돌리시는 것 같은데... 이 분들 체력이 장난 아닌데, 어떻게 따라가세요?”, 걱정하는 강사의 말에 오키나와 스타일의 아가씨는 웃기만 했다. 그녀는 스트로크를 잘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발로만 가는 자유형의 한계

전문가마다 조금씩 그 비율을 다르게 얘기하지만, 대체로 자유형의 경우 추진력의 비율을 스트로크 70, 킥 30 정도로 본다. 즉 팔로 물을 뒤로 얼마만큼 많이 밀어내고, 그 밀어냄의 반작용으로 몸으로 앞으로 보낼 수 있느냐가 효율적인 자유형의 필수 조건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전 강사는 우리에게 그렇게 필사적으로 스트로크 교정을 시도한 것이고 덕분에 작년에 그 강사의 지도를 받았던 우리 반 회원들 대부분은 제법 정교한 스트로크를 구사할 수 있게 됐다. 나 또한 그중 한 명이고.      


아가씨 뒤를 따라가다 보면 엄청난 와류와 후류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쉽게 말해 그녀의 발차기가 일으킨 물의 파동이 제법 세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피치를 떨어뜨려 조금 거리를 두고 따라가다 거리가 좀 벌어졌다 싶어서 원 킥을 추가해서 따라가다 보면 금세 거리가 좁혀진다. 수영의 거리가 길면 길수록, 세트가 반복되면 될수록, 강습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녀의 체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녀와 나의 거리는 점점 더 빨리 좁혀진다.


그녀는 결단을 해야 할 것이다. 계속 체력이 많이 소진되는 킥에서 추진력을 얻을 것인지, 아니면 스트로크를 교정해서 팔을 통해 추진력을 많이 얻을 것인지를. 킥으로 추진력을  얻는 것은 단순히 체력 문제만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무리한 킥은 물의 저항을 높이기 때문에 부드러운 글라이딩을 방해한다. 게다가 잘 못 된 스트로크는 어깨 부상을 일으킬 수도 있다. 결국 그녀가 우리 반에서, 그리고 앞으로도 꾸준히 수영을 즐기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스트로크를 익혀야 한다. 영상으로든, 그 강사에게 부탁을 해서든, 아니면 우리 반의 누군가에게 하소연을 해서든.  


도전과 변화를 마주칠 때

사람이 살다 보면 한계를 만날 때가 있다. 난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과정을 끝내고 정말 대학에 대한 아무런 지식과 상식 없이, 당연하게도 선배의 조언도 없이 대전의 한 대학, 광고홍보학과에 들어갔다. 1기였지만 좋은 교수와 강사들 덕분에 공부가 어렵지는 않았다. 졸업할 때쯤 IMF가 터져서 우리 대학, 우리 과뿐만 아니라 다른 대학, 다른 과의 졸업생들도 앞다퉈 대학원으로 피신했다. 그때 난 서울의 제법 유명한 대학의 신문방송학과 대학원에 들어갔는데, 거기서도 뭐 그럭저럭 공부가 할만했다. 영어 원서를 읽는 것도 한 학기 정도 지나니 익숙해졌다.       


졸업 후 카피라이터 생활을 하고 지역의 대학에서 강사도 하다가 불현듯 공부가 더 하고 싶어서 광고학계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의 박사 과정에 들어갔다. 여기서, 난 어떤 벽을 느꼈다. 과거, 평소에 하던 데로 그렇게 설렁설렁 공부를 했다가는 그야말로 죽도 밥도 안 되겠구나, 하는 걸 느꼈다. 당연히 전력을 다했다. 공부 방법도 바꿨다. 덕분에, 목표했던 걸 이루지는 못했지만, 한 가지 교훈은 얻었다. 내가 해 왔던 방식이 안 통하는 레벨이 있다. 내가 살아왔던 방식이 통하지 않는 삶이 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카피라이터 일을 하면서 별의별 카피를 다 써봤다. 신문, TV, 잡지, 라디오, 전단, 브로슈어, 팸플릿.. 여하간 글이 나오는 광고/홍보 수단이라면 닥치는 대로 했고 할 수 있었으며,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분량이 길고 전문성이 요구되는 백서와 기업 역사, 정치인의 자서전 따위의 유령작가로 활동할 때는 다른 차원의 정보 수집 능력과 분류 능력, 글쓰기 능력이 요구 됐다. 당연히 그걸 익히기 위해 애를 썼다.    

  

이후 대학원 동기의 권유로 칼럼을 쓰기 시작한 이후에는 그에 맞는 글쓰기 스킬이 필요하다고 느껴서 관련 서적을 들춰보며 나만의 칼럼 스타일을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 이건 아직도 진행 중이다. 브런치에 꾸준히 글을 쓰는 것도 이 훈련의 일환으로 선택한 하나의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이 훈련은 아직 진행 중이다.      


도전과 변화를 거부할 때

직원이 대략 3천 명 정도 되는 종합 병원의 중간 간부인 아내는 어제 나와 맥주를 마시며 이런 말을 했다. 평사원에게 요구되는 능력과 주임이나 대리에게 요구되는 능력, 그리고 팀장이 됐을 때 요구되는 능력, 그리고 부서장이 됐을 때 요구되는 능력이 다르다고. 만약 그 단계별로 요구되는 능력이 없거나, 그 없음의 자각에도 불구하고 그 능력을 얻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부서 이동을 시키거나 한직(閑職)으로 발령을 낸다고.   

   

그러나 그전에 사인을 준다고 한다. 사실 부서 내에서 먼저 수군거림이 발생한다고 한다. 중요 업무를 부하 직원에게 떠넘기는 걸로 그 한계를 보이는 것이 시작될 테니 말이다. 이런 소문이 임원들에게 들어가고 부서장 회의에서 몇 마디 오가다 보면 그 한계가 여실히 드러난다고 한다. 이후, 승진에 누락되고, 그 누락이 반복되고 그러다 후임이 자신을 앞서게 되고 결국엔 부서 이동과 한직 발령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선택의 기로

내 직업과는 달리 변화를 별로 안 좋아한다. 도전이라는 말도 달가워하지 않는다. 수영장을 향해 집을 나서는 시간도 거의 똑같으며, 두 번의 횡단보도를 건너는 시간도 거의 같다. 그러니 당연히 수영장에 도착하는 시간의 오차도 2분 내외다. 이렇게 사는 나도, 살다 보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변화와 도전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다. 변하지 않으면 앞으로 가지 않고 새로운 일을 할 수 없으며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기회가 다른 사람에게 간다는 걸 알게 되면, 결국, 그야말로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변화와 도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살아왔던 방식이, 해 왔던 방식이, 했고 해 왔던 공부가 통하지 않는 영역과 수준이 있다. 안타깝지만 그런 순간이 찾아온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다. 과거의 내가 통하는 영역과 수준에서 계속 해 왔던 데로 하던가, 아니면 새로운 영역과 수준에 맞게 나를 바꾸던가.      


오키나와 스타일의 아가씨는 요즘 생각이 많을 것이다. 고급 A 반 회원이 자유형 다섯 바퀴를 쉬지 않고 돌지 못한다는 건 신경 쓰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운동량과 질이 하드코어 하기로 유명한 두 반 - 한 반은 저녁 여섯 시 고급 A 반이라고 한다. - 중 하나에 자신 있게 들어올 만큼 자신의 수영 실력과 체력에 확신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확신이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다시 반을 바꿀 것이냐, 아니면 나를 바꿔 이 반에서 계속 수영하여 다른 차원의 수영을 할 것이냐. 오키나와 스타일의 아가씨는 이 기로에 서 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까?  


수영, 그까짓 거 취미로 하는 건데 설렁설렁하면 되지, 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이왕 하는 거 이 사람들하고 제대로 해 보자 하고 마음을 다 잡을 수도 있다. 그도 아니면 자신의 강점인 킥의 파워를 높이고 그 파워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체력을 키울 수도 있다. 어떤 선택이든, 그녀는 지금 그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그녀는 어떤 선택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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