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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Mar 18. 2024

느리게 찾아오는 쾌감

수영장에서 건질 철학 54

심심한 사람

다들 뭔가에 빠지면 그걸 하지 않고는 못 버틴다던데 난 또 그런 에너지는 없다. 예전, 십여 년 전에 처음 수영을 할 땐 하루라도 빠지면 큰일 나는 줄 알았다. 이십여 년 전 마라톤을 할 때는 거의 매일 십 킬로미터 이상을 뛰었으며 20대 시절 축구와 농구에 빠져 있을 때도 틈만 나면 공하고 시간을 지냈다. 같이 할 사람이 없으면 혼자서라도 했다.


그런데 요즘은 영 그런 에너지가 없다. 이런 시들시들 해지는 에너지를 몇 년 전에 눈치챈 아내가 몇 해 전에 부랴부랴 수영을 다시 시킨 덕분에 수영만 그나마 꾸준히 하고 있다. 그나마 컨디션이 안 좋으면 하루쯤 건너뛰고, 달리기를 좀 해보겠다고 작년 가을에 산 조깅화를 신고 본격적으로 뛰기 시작한 건 올해 들어서다. 덕분에 아직 새것 같다.


다른 이들은 취미가 새로 생기면 관련한 쇼핑도 열심이라지만 난 그것도 좀 심드렁한 편이다. 수영복이 늘어나서 새로 사야 하는 데, 골라 놓고 거의 반년쯤 미루다 최근에서야 샀다. 가을, 겨울에 입을 새 조깅복은 골라 놓기만 하고 사지 못 했다. 다들 꼭 필요한 것이긴 한데, 또 생각해 보면 뭐 적당히 있는 걸로 어떻게 돌아가기에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책을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며칠씩 안 읽을 때도 있고 한 달에 한 권 이상 안 살 때도 있다. 얼마 전 얘기했지만 명색이 영화에 대한 칼럼을 쓴다는 사람이 영화관에 안 간지는 몇 해 됐고 넷플릭스는 아내의 드라마 시청 전용이 된 지 꽤 됐다. 글쓰기를 좋아한다고 매일 글을 쓰는 것도 아니다. 블로그엔 책 리뷰 말고는 거의 올리지 않고 브런치에도 며칠에 한 번 글을 올린다. 그나마 목요일에 연재를 하기로 약속을 해둔 터라 그걸 지키기 위해 애쓰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지 아니었다면 일주일을 거르는 것도 흔했을 것이다.  

   

그나마 중독 됐다고 오해받을 만큼 열심인 건 맥주 마시기인데, 그것도 요즘엔 좀 시들해져서 그저 무난한 라거를 골라 몇 잔 마실 뿐이다. 결국 심심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보면 좋고 함께 있으면 편한 오래된 연인을 대하는 마음을 닮은, 그런 마음으로 꾸준히 하는 것이 있을 뿐 뭐에 중독된 것처럼 정신없이, 열에 들떠하는 건 없다. 이렇게 써 놓고 보니, 정말 심심한 사람이지 싶다.      


도파민 중독 시대

다들 뭔가에 중독되어 있는지 요즘 도파민이 어떻고, 중독이 어떻고 하는 말들이 많이 들린다. 얼마 전엔 아내가 요즘 애들의 문해력을 걱정하며 기사를 보내주기도 했다. 도대체 도파민이 뭐기에 문해력도 망치나 싶어 찾아봤다. 사전적으로는 이렇다. 새로운 것의 탐색과 성취 과정에서 ‘기쁨’의 감각 및 감정을 지배하는 신경전달물질이 도파민이다. 그런데 이 과정과 행동의 범위가 제법 넓어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도, 게임이나 쇼핑을 할 때, 심지어 음란물을 볼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인체의 모든 자극엔 역치가 있는 것처럼 이 또한 동일 수준의 자극이 반복되면 도파민의 양이 적어진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이전과 동일한 쾌감을 얻기 위해선 더 자극적인 걸 찾을 수밖에 없게 되고, 그 결과, 당연하게도 중독이 된다고 한다.


얼마 전, <유퀴즈>에 출연한, 도박중독 전문의인 정신건강의학과 신영철 교수도 도박중독을 도파민과 연결시켰으며 사회자인 조세호가 과거 겪었다고 털어놓은 쇼핑 중독 또한 도파민과 관련 있다고 했다. 우리가 이 지점에서 잊지 말아야 할 건, 신영철 교수가 지적했듯이 그 보상을 위해 특정 행위를 하는 양의 절대적 증가가 중독이 아니라 그 증가로 인해 정상적인 일상 유지가 되지 않을 때, 그러니까 일상과 인생의 희생을 무릅쓰고서라도 그 자극을 추구할 때 중독이라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스마트폰과 문해력

요즘엔 스마트 폰이 이 중독의 대표적 주범으로 지적되고 있다. 앞서 말한, 아내가 보내 준 한겨레 신문의 기사에서는 아예 <도파민 인류>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썼고, 작년 가을엔 KBS의 <이슈 PICK 쌤과 함께>에 출연한 뇌과학자 장동선 박사 또한 같은 맥락에서 스마트 폰 중독과 문해력을 연결시켰다. 이 스마트 폰 중독의 주범으로는 소위 숏폼이라 통칭되는 짧고 자극적인 영상이 지목됐다. <유퀴즈>의 사회자인 유재석 씨도 고백한 것처럼 잠자리에 누워서 하나만 보고 자야지 마음먹고 스마트 폰 화면을 넘기다 보면 금세 대여섯 시간을 허비하게 만드는 숏폼의 위력의 근원엔 도파민을 발생시키는 즉각적인 보상에 있고, 그 보상의 반복과 증강을 위해 더 자극적인 영상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문해력의 맥락에서 도파민이 문제가 되는 걸까? 이런저런 곁가지를 쳐내고 핵심만 말하면 제대로 읽는다는 행위는 즉각적인 즐거움을 주는 엔터테인먼트도 아닐뿐더러 즉각적인 정보 취합의 방법도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책의 난이도가 높고 그 부피가 더할수록 이 탐구의 성과와 지식의 습득은 더디게 찾아오고 그로 인해 탐구와 지식의 습득으로 얻어지는 지적인 환희 또한 한참 뒤에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쯤에서 더 근본적인 질문이 남아 있다. 문해력이 정말 그렇게 큰 문제일까? 생각보다 이 문제를 문제 삼는 사람들이 주변에 제법 있다. 주변에 십 대 청소년을 키우는 이들도, 딸의 친구의 부모들도, 내 후배나 아내의 직장 후배들도,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에서도 이 문제를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실제로 딸의 반 남자아이들은 읽기와 이해가 필수적인 사회 과목을 어려워하고 있으며, 본격적으로 역사가 등장하는 5학년 때부터는 사회를 수학보다 어려워하는 친구들도 많다. 그러니 국어는 오죽하겠나? 게다가 문제 이해부터 난관인 요즘 수학 문제는 연산 실력이 우수한 학생도 난관에 봉착하게 만든다. 영어도 마찬가지다. 아이가 다니는 영어 학원 원장이 상담 시간에 말하길 영어 독해를 잘하는 애들은 단순히 영어 단어를 많이 알고 문법 실력이 좋은 것만이 아니라 책을 많이 읽는 애들이라고 했다.


그러니 문해력은 그야말로 공부를 잘하기 위한 첫 단추가 되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학교에서는 문해력 향상을 위해 독서 교육에 사활을 걸고 있다. 학부모들도 여기에 동조해서 자기를 위해서는 단 한 권의 책도 사지 않지만 자녀들을 위해서는 백 권이 훌쩍 넘는 전집을 망설임 없이 집에 들여놓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놓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지연된 보상”이다. 뒤늦게 오는, 미뤄진 쾌락을 기다리는 힘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지연된 보상

필자는 최근 이 힘의 있고 없고의 차이를 직접 목격했다. 방학을 이용하여 수영을 하러 오는 중 고등학생들이 있다. 이들은 주로 오전 시간에 수영을 하러 오는데 이번 겨울, 필자가 수영하는 시간에도 남자 중학생 세 명이 등록했다. 소년들은 처음엔 고급 B반에서 수영을 했다. 고급 B반은 평균 연령이 60세 이상으로 수영 경력은 오래됐지만 수영 능력과 실력을 키우기엔 너무 늦게 시작했거나 높은 연령으로 인해 체력이 약한 중장년 여성 회원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혈기왕성한 십 대 소년들이 이 반의 속도와 운동량이 양에 찰리가 없었을 터, 결국 강사는 우리 반, 고급 A반으로 보냈다. 고급 A반은 평균 연령 40대 중반 정도로 수영 경력이 많게는 20년에서 평균 10년 안팎의 회원들로 구성되어 있다. 고급 B반에 비해 속도는 대략 30퍼센트 정도, 운동양도 그 정도 많다.


반을 옮긴 첫 주, 소년들은 힘들어했다. 그래도 며칠 버티니 제법 따라올 정도가 됐지만 숨이 턱까지 차는 걸 숨기지는 못했다. 결국 이 중 두 명의 소년이 잘 안 나오기 시작했다. 한 명은 꾸준히 나왔다. 셋 중에서 가장 어리고 작고 마른 소년이었다. 그 소년은 그렇게 두 달가량 함께 수영했고, 2월 말에는 강사가 농담으로 학교 가지 말고 같이 수영이나 하자고 할 정도로 수영 실력과 체력이 향상됐다. 나를 포함한 우리 반의 어른들이 수영 시간이 끝날 때마다 수고했다, 실력이 늘었다고 칭찬해 줬다. 소년은 물에서 버틴 시간의 보상을 개학을 코앞에 두고 받게 된 것이다. 결국 이 소년은 개학 이후에도 수영을 계속하기로 마음먹고 저녁 여섯 시 반으로 반을 옮겼다.     


나 또한 이제 이 반 사람들과 수영을 할 만하다고 느낀다. 이 반으로 옮긴 지 거의 일 년이 넘어서 느낀 만족감이다. 물론 엄청난 쾌감은 아니다. 어디 가서 자랑할 수 있는 성취도 아니다. 그저 포기하지 않고 버텼다는 대견함, 한 바퀴도 거르지 않고 함께 수영을 할 수 있게 됐다는 기특함을 스스로에게 느끼고 있다. 이 느낌은, 뭐랄까, 어렵고 두꺼운 책을 끝끝내 포기하지 않고 다 읽어낸 후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다. 이런 지연된 보상, 느리게 오는 만족을 직접 가를 칠 수는 없다.


이런 만족은 결국 무던한 반복과 어른의 인정으로만 가능한 것이지 않을까? 수영장에서, 나보다 오래 하고 실력 좋은 앞 번 주자들이 은근히 나를 인정해 줄 때처럼 묵묵히 오랜 시간을 들여 성취해 낸 성과에 대해 축하해 주고 인정해 주는 데서 얻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 결과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 대해서도 함께 나누며 그 인내의 시간을 가치 있게 봐줘야 하지 않을까? 필자는 요즘 “묵묵히”와 “꾸역꾸역”이라는 단어를 즐겨 쓴다. 천재나 특별한 재능이 없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재능이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보디 프로필 용 몸은 몇 개월 만에 만들 수 있지만 평생 갈 몸매를 만들기 위해선 평소에, 평생 동안 꾸준히 운동해야만 한다. 도파민에 중독되지 않은 평생 지적인 인간으로 살 수 있는 문해력의 습득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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