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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Mar 15. 2024

자신에 대해 알아챌 수 있을 때

수영장에서 건진 철학 52

오버 페이스의 후유증

지난 수요일, 핀 수영을 한 날, 샤워장에서 회원 하나가 쓰러졌다. 내가 샤워를 하는 동안 어디선가 쿵 소리가 났다. 작지도, 그렇다고 요란하지도 않은 소리에 잠시 멈칫했다가 계속 샤워를 했다. 샤워를 끝내고 막 물기를 닦아내려는데 화장실 쪽에서 중년의 사내가 비틀대며 걸어 나왔다. 기력이 없었다. 타일벽에 기대어 서 있던 그는 천천히 무너져 내리며 앉았다. “괜찮으세요? 선생님. 괜찮으세요?”, 나는 다급하게 물었다. 그는 흐릿한 목소리로 “당이 떨어졌나...”하고 겨우 말했다. “고맙습니다. 괜찮습니다.”하고 이어 말한 그는 서서히 일어서 다시 샤워실로 들어갔다. 어깨에 약간 비누 거품이 남아 있었다. 난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는 다시, 샤워기 아래에서 천천히 무너져 내려앉았다.      


난 급하게 라커룸으로 뛰어 들어갔다. 라커룸 입구에는 늘 남자 직원이 앉아 있었기에 그에게 사무실에 구조를 요청하고 119에 신고해 달라고 청할 생각이었다. 하필 아무도 없었다. 내가 나오는 걸 본 청년 몇 명이 샤워장으로 뛰어들어갔다. 난 수건으로 주요 부위만 가리고 남녀 할 것 없이, 심지어 다른 운동을 하는 회원들도 이용하는, 사무실로 가는 복도로 고개를 내밀고 도움을 요청했다. 나에 그런 모습을 보고 마침 바지를 다 입고 티를 입고 있던 우리 반 젊은 친구 한 명이 복도로 뛰어 나갔다. 난 그의 모습을 보고 다시 샤워장으로 들어갔다. 그 중년의 사내는 구토를 한 뒤 진정을 하고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아침을 늦은 시간에 먹고 무리를 한 탓에 급체를 했던 모양이다. 다음 날, 사무실 직원에게 그 남자의 안부를 물으니 멀쩡하게 갔다고 한다.    


고수의 알아챔

앞서 썼듯이 이 날은 다른 날보다 대략 2,30퍼센트 더 운동을 시킨다. 다리만 슬쩍 차도 앞으로 가기 때문에 도저히 팔을 들 힘이 없어도, 한 바퀴 더 돌 여력이 없어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종 핀을 끼고 수영을 하면 오버 페이스를 하는 사람이 있다. 결국 이런 사람은 하루 종일 피곤에 절어 있거나 그 중년 사내처럼 기진맥진하여 탈진 상태에 이르기도 한다.      


고급반쯤 되면 웜업 자유형만 돌아도 오늘의 몸 상태를 안다. 나 같은 경우는 수영장까지 십오 분 정도 걸어가다 보니 그 과정에서 이미 몸 상태가 파악된다. 수영장에 도착해서 십 분 정도 스트레칭을 한다. 그 시간에, 걷는 동안 더 뻣뻣하다고 느껴진 부위를 더 신경 써서 스트레칭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회원들은 차를 타고 와서 도착 후, 샤워하고 바로 풀로 들어간다. 강사가 하는 공식적인 체조 시간 전까지 물속에서 시간을 보낸다. 결국 자신의 몸이 하는 이야기를 들은 여유가 없다.     


수영을 어느 정도 하게 되면, 그러니까 세월의 맥락에서든 실력의 맥락에서든 어느 수준을 넘어서게 되면 자기 자신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오늘 유독 안 되는 영법이 있다거나 물이 무겁게 느껴진다거나 팔이나 다리가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스트로크를 끝까지 안 하고 코어가 흔들리고 물을 적게 대충 잡는다는 것도 알게 된다. 지쳤다고 팔을 중간에 빼고 발을 적당히 찬다는 것도, 숨을 빨리 쉬기 위해 스트로크 간의 간격도 줄어들고 잠영 시간이 짧아졌다는 것도 알게 된다.      


어느 수준 이상의 사람이라면 이런 알아차림이 찾아오면 즉각 수정할 수 있다. 정신 차리자. 이왕 하는 거 대충 하지 말자. 스트로크를 대충 하니까 글라이드가 너무 짧잖아. 야, 안 죽는다. 안 죽어. 집중하자. 이런 말을 스스로에게 하며 자체 교정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자신의 체력이 다했다는 것도 알아챈다. 다음 바퀴에서 정말 쉬어야 하는 상태인지, 아니면 안 쉬어도 되는데 나와 타협을 하려는 건지 스스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연속으로 몇 바퀴를 도는 와중에 어떤 임계점이 느껴지면 스타트 라인에 다다랐을 때, 조용히 옆으로 빠져 한 바퀴 쉰다. 세트로 끊어 가면 다음 세트의 첫 바퀴는 쉰다. 그렇게 쉬는 것에 대해서 겸연쩍어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누구에게나 유독 힘든 날이 있으니까.      


자신에게 냉정할 수 있는 수준

결국 자신의 잘 못을 알아채어 교정하는 것도, 힘들어도 계속 가기로 결정하는 것도, 한계에 다다랐다고 판단해서 지금 멈추기로 결정하는 것도 결국 고수의 능력이다. 수영도 그렇지만 글쓰기에서도 마찬가지다.  

    

대학원 동기가 운영하는 경제 뉴스 사이트에 칼럼을 연재한 지 벌써 몇 년 됐고 브런치를 한 지도 그만큼 되면서 싫든 좋든, 원하든 원치 않던 글솜씨가 늘었다. 그렇다고 뭐 엄청 잘 쓰게 됐다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내가 쓴 글을 보고 어디가 이상한지 정도는 알게 됐다는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그런 알아챔의 속도가 빨라졌고 그런 알아챔의 문장들이 더 많아졌다. 결국 글을 쓰면 쓸수록 쓰는 시간보다 고치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브런치는 그나마 적정선에서 그만하자고 나 자신을 타이르고 물러날 수 있는데 칼럼은 그야말로 볼 때마다 눈에 띄는 부분이 있고 업로드된 뒤에도 눈에 거슬리는 곳이 있다.      


또, 써지고, 그래서 쓸 수 있으면서 게을러서 쓰지 않는 것과 도저히 써지지 않아서 쓰지 않는 것의 차이도 알아채고 있다. 덕분에 써질 때는 스스로를 달래서 의자에 붙잡아 앉혀서 꾸역꾸역 쓰게 하고 써지지 않을 때는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고 꾸짖으며 책을 읽거나 본업인 카피라이팅과 기획 일을 한다.     


과대평가의 후유증

어쩌면 인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앞선 글에도 썼듯이 초보일 때는 자신의 페이스를 만들기도, 유지하기도 쉽지 않다. 더불어 자신의 능력을 정확히 보기도 어렵다. 때문에 지금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판단하는 것도 어렵다. 이런 어려움이 겹치다 보니 어느 순간엔 오버 페이스를 하고 잘못된 폼으로, 그야말로 우격다짐 식으로 생을 밀고 나갈 때도 있다. 그러다 보면 결국 퍼지게 된다. 몸도, 마음도 번아웃이 되는 것이다. 갈 만큼 갔고 올만큼 온 것 같은 데 가야 할 길이 멀다고 느껴지거나 심지어 잘못된 길로 왔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 업계에 오래 있다 보니 젊은 친구들과 말 그대로 세대차이를 느끼곤 한다. 요즘 친구들은 할 줄 아는 것과 잘하는 것, 잘하는 것과 능숙한 것의 차이를 잘 모른다. 학교나 학원에서 포토샵이나 편집 프로그램을 배우고 카메라 좀 만지작 거려서 영상을 만들어내면 영상으로 밥을 먹고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스타그램에 글도 좀 올리고, 여기저기 짧은 글 올려서 반응이 좋으면 글쟁이로, 카피라이터로 먹고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젊은 친구들이 프리랜서 사이트를 통해 만나 일을 따고 진행하다 서로의 한계를 발견하고 일을 내팽개치고 잠수를 타곤 한다. 얼마 전에 만났던 경주시의 홍보 담당자도, 울산의 관계자도, 기업의 홍보 담당자도 그런 비슷한 사례들을 이야기해 줬다. 어쩌면 그들이 우리 같은 이십 년 이상 묵은 오래된 베테랑들에게 전화를 하는 건 그런 젊은 친구들에게 몇 번 데어서일 것이다.      


배워야 한다면 배워야 한다.

가르칠 기회도 없지만 가르쳐달라는 사람도 없다. 요즘 수영장에서도 대체로 입을 다물고 있다. 자기 폼을 봐달라는 사람이 아니면 이렇다 저렇다 말해주지 않는다. 초급반과 중급반은 자신의 폼이 잘 못 된 줄 모르고, 설령 안다고 하더라도 아직 자유자재로 교정을 할 수는 없다. 조금 더 시간을 들여야 한다. 반면 고급반은 그 폼이 잘 못 돼도 이미 그렇게 굳어졌기에 고칠 수 없다. 결국 고칠 의지가 있는 사람만 고칠 수 있고 자신의 잘못을, 그릇 된 폼을 알아채는 사람만이 교정할 수 있다.      


감독이나 나나, 또 동종 업계에 있는 내 또래의 사람들 대부분이 가르치는 데 애를 먹고 있다. 가르칠 기회도 없고 가르칠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AI가 등장하고 카메라 기술이 아무리 좋아져도 사람이 해야 될 부분이 있고 그 부분은 사람에게 배워야 한다. 수영처럼, 글쓰기처럼 말이다. 알아채는 그 시기가 올 때까지 배우는데, 자신의 잘못을 찾아가는데 부끄러워하지도 망설이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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