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영훈 Mar 22. 2024

아니, 왜 지금 플립턴과 들뢰즈야?

수영장에서 건진 철학 56

지금 플립턴이 중요한가?

사람마다 유독 힘든 영법이 있다. 내 경우는 배영이다. 분명 얼굴을 계속 수면 밖으로 내밀고 있는데도 힘들다. 자유형의 리버스 버전인데, 자유형과 달리 발을 좀 차 줘야 속도가 나는 데다가 스트로크도 자유형만큼 완성도가 높지 않아서 일 것이다. 이번 주는 메인 테마가 배영이어서 유독 힘들었는데, 체력 향상이 목적이라 운동량이 다른 날보다 많은 목요일, 이 배영이 강습의 몸통을 차지하고 있어, 더 힘들었다.    

  

그렇게 힘든 시간을 끝내고 엔드라인 쪽에서 말 그대로 쿨링을 하고 있는데 중급반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 달에 처음 나타난 여자 강사에게 접영 시범을 부탁하고 그걸 눈으로 보고 있었다. 흠... 그게 눈으로 본다고 될 게 아니잖아, 하는 생각을 했지만 말로 꺼내진 않았다. 그렇게 한바탕 강사의 시범이 끝난 뒤 몇 사람이 엔드 라인 쪽으로 와서 플립턴 연습을 했다. 대회에서 선수들이 하는, 몸을 한 바퀴 휙돌린 후 터치판을 발로 찍고 탕 하고 차고 나가는 턴 말이다.      


다들 왜 이 턴에 열심인지 모르겠다. 아, 한 사람의 이유는 안다. 젊은 아가씨인지, 유부녀인지는 모르겠는데, 어찌 됐든 몇 주 전 귀여운 누님 옆에서 이 턴을 연습하기에 잠깐 요령을 가르쳐 준 적이 있다. 그때, 강습 시간엔 정신없어서 이 턴을 쓸 일도 별로 없는데 왜 그렇게 열심이시냐고 물었었다. 대답하길... “호텔 수영장에 가는 데, 이렇게 턴하면 좀 멋있어 보이잖아요. 나 수영 배운 여자야. 티도 나고요.”하고 답했다. 흠...     


중급 A반에서 몇 명, B반에서 몇 명이 턴을 연습하고 있는데, 그중 B반의 한 아주머니가 눈에 띄었다. 연습 풀에서 스트로크를 연습할 때, 그 아주머니가 초급반 시절, 연습풀에서 이런저런 영법을 연습하는 동안 내게 몇 가지 질문을 하고 나도 그 질문에 성실히 답해줬고, 그 인연으로 오며 가며 눈인사 정도는 하고 있는 아주머니다. 뭐, 처음 본 사이도 아니고, 코로 물을 먹어가며 고생하시는데 턴이 마음대로 되지는 않아 보여서 팁을 몇 개 알려줬다. 그리고 풀을 나와 샤워장으로 향했다. 샤워를 하는 데, 불쑥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지금 풀립턴을 연습할 때야?’     


중급반도 둘로 나눠져 있다. A반은 그나마 젊고 영법에 틀이 잡힌 사람들, B반은 나이가 많거나 이제 막 초급반에서 올라와서 영법의 틀, 자기만의 노하우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이다. 솔직히 A반이든 B반이든 영법의 틀과 자기만의 노하우가 정착이 안 된 건 매한가지만 그나마 A반이 약간 나은 수준인 것이다. 이런 반 사람들이 우리 반도 딱히 신경 쓰지 않는 플립턴 연습에 매진하는 것도 이해가 안 가지만 그중에서 아직 자기만의 스트로크와 킥의 노하우와 리듬도 만들지 못한 아주머니 같은 사람이 플립턴을 연습하는 것은 더 이해가 안 갔다. 아니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거야?


아닌 밤 중에 들뢰즈?     

밤 열 시쯤, 수원에 사는 제자이자 후배인 민우에게 카톡이 왔다. “선배님. <식인의 형이상학 : 탈구조적 인류학의 흐름들>이란 도서를 아시나요? 질 들뢰즈와 관점주의, 다자연주의를 이야기하는 샤머니즘 계통의 철학도서인데...”  짧게 답했다. “처음 들어봄 ㅎㅎ”     


그러자 00이 따라 해당 철학 모임을 1회 듣고선 인류학자를 올려치기 위한 글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신다면 편하게 제 궁금함과 불만을 토로할 생각이었는데 아쉽게 되었네요.”  거기에 짧게, 그러나 약간 길게 답을 했다. “그런 거 말고 뭔가 베이식한 것도 많은데 굳이...”     


잠시 책을 검색해 봤다. 목차를 보니 들뢰즈의 이론, 특히 후기의 <천의 고원>과 <안티오이디푸스> 등에 등장한 여러 개념들을 바탕으로 구조주의 인류학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대안을 제안하는 책 같았다. 결국,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우리가 잘 아는 레비 스트로스를 중심으로 하는 구조주의 인류학과 구조주의, 들뢰즈, 특히 후기의 이론, 여기에 생명 철학까지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그게 전제되어야 그나마 이해가 될 것 같은 책이었다. 그런 판단이 선 후 카톡을 보냈다.      


“거기에 나오는 용어들 자체가 들뢰즈를 알아야 이해가 되는 건데 다들 대단...”     

답이 왔다. “그래서 저 들뢰즈 모른다고 엄청 까였어요. 질문하라기에 했더니 책을 제대로 안 읽은 것 같다, 들뢰즈의 개념을 잡고 가야 한다. 이러면서 ㅋㅋㅋ. 그래서 아, 네 저 무식합니다. 이러고 ㅋㅋㅋㅋㅋ.”     


위로 삼아 답을 보냈다. “ㅎㅎ. 걔들도 정확히 모를 거야. 그리고 들뢰즈 이론은, 최소한 내가 이해한 바로는 알고 모르고의 차원이 아니라 수용과 비수용의 문제인 듯. 그걸 안다고 하는 사람은... 글쎄... 수상? ㅎㅎ. 그리고 솔직히 몰라도 돼.”,


그 후, 후배가 알려준 호스트의 이름을 검색해 봤다. 지역의 어느 방송국 PD이자 지역 대학의 겸임 교수였다. 신문방송학 전공자로 들뢰즈의 후기 이론을 미디어 이론에 적용하여 연구한 사람이었다. <천의 고원>, <안티오이디푸스>, <시네마 1, 2>로 이어지는. 이어 답을 했다. “00 대학 겸임교수고 들뢰즈를 공부한 것 같긴 한데... 흠.. 약간 후기 쪽에 치우친 듯도 하고... 난 현재 전기 쪽을 겨우 읽어나가는 중이라.” , 그 후 몇 마디 더 나눈 뒤 톡이 끝났다.     


굳이 그걸 왜? 지금?

플립턴과 <식인의 형이상학 : 탈구조적 인류학의 흐름들>이라는 이상한 제목의 책과 들뢰즈, 4만 원이나 내고 줌으로 하는 철학 모임... 난 어제 이 일련의 연쇄적인 사건을 접한 뒤, 뭐랄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지금 그걸 할 때가 아니잖아?’, ‘아니 굳이 그걸 왜 지금 해야 하는 건데?’     


애를 키워본 사람은 알겠지만 거쳐야 할 단계는 거쳐야 한다. 젖을 먹은 뒤 바로 삼겹살을 쌈 싸 먹는 애는 없다. 이유식을 먹고 간이 거의 없는 국과 반찬으로 밥을 먹은 뒤 조금씩 당도와 염도, 음식의 종류와 범위를 넓혀가며 먹는다. 뭔가 배우는 것도 마찬가지다. 배밀이를 하다가 기고, 기다가 서고, 선 뒤 걸으며 걷다가 뛴다. 옹알이를 하다가 파편적인 단어를 뱉고 그 단어를 이어 붙여 문장을 만들고 한글을 배운 뒤 자기 이름을 쓰고 사물의 이름을 읽은 뒤 그럴듯한 문장을 쓴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다.     


아이에게 농구를 가를 칠 때도, 롱 보드를 가르칠 때도 기초부터 가르쳤다. 아니, 그건 당연하거다. 롱 보드 위에 서 있지도 못하는 사람이 멋진 활강을 보여줄 수는 없으니까. 이런 믿음 때문에 아이에게 영어를 가르친 것도 내가 아니라 학교였다. 3학년 때인가, 정규 수업 시간에 배울 때까지 영어 학원도, 책도 읽히지 않았다. 모국어를 잘하는 사람이, 그러니까 애초에 외국어도 언어이기에 자기 나라 말도 잘하는 사람이 남에 나라 말도 잘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뭐든 자기가 정말 배우고 싶을 때 배워야 더 간절한 마음으로 열심을 기울일 것 같아서였다. 딸이 영어 학원에 간 것 5학년 가을 학기, 그러니까 영어 학원에 다닌 지 불과 6개월 남짓 된 것이다.     


건너뛰고 싶은 충동

앞서 몇 번 말했지만 다들 정보가 넘쳐나서인지 종종 배움의 단계를 훌쩍 뛰어넘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 들뢰즈만 해도 니체나 칸트에 대해서 대충이라도 알아야 하고 여기에 라이프니츠나 베르그송까지 알면 금상첨화다. 후기로 넘어가면 당연히 프로이트와 라캉에 대해서 좀 알아야 하고 마르크시즘에 대해서도 약간의 지식이 있어야 한다.


나 또한 들뢰즈의 저작을 읽기 전에 들뢰즈에 “관한” 책을 몇 권 읽었고 지금도 읽고 있다. 니체와 칸트의 저작을 독파는 못했지만 - 불행히도 철학과는 아니어서 - 그래도 관련된 책 몇 권은 넘겨 봐서 들뢰즈가 왜 니체의 이름으로 칸트를 극복하려 하는지, 그 도전의 포인트가 뭔지, 감을 잡은 채 들뢰즈의 책으로 넘어갔다. 지금도 아직까지, 전기, 그러니까 <차이와 반복> 이전 시기의 작품들을 느릿하게 읽어 나가는 중이다. 그렇게 느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툭툭 걸리는 부분이 있어서 서동욱이나 우노 구이니치의 들뢰즈 이론에 관한 책을 주석 삼아 함께 보고 있다.      


어제 후배한테 톡을 할 때도 그런 말을 했지만 전공자가 아니거나 철학에 관심 없거나 사는 게 바쁜 사람은 굳이 들뢰즈를 알 필요도, 읽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거 알아서 어따 쓰겠나? 나 같이 한가한 중년의 사내나, 그러니까 밤만 되면, 유튜브 180초에 나오는 그 아내처럼 뜬금없이 “오빠 나 먼저 씻는다.”며 므흣한 사인을 보내는 아내 - 아내는 씻기 위해 씻는다 - 도 없고 같이 한잔 하자고 불러내는 친구도 없으며 평일엔 거의 TV를 보지 않는 중년의 사내나, 무려 “취미”로 들뢰즈를 읽는 거지, 할 거 많고 배울 거 많으며 만날 사람도 많은 데다가 목적이 분명한 “씻는다.”는 사인을 보내는 애인이나 파트너가 있을 젊은 사람들이... 굳이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취미”로라도 읽거나 배우려 한다면 최소한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그러니까 철학에 대해 흥미가 있다면, 뭐 대충 개론서라도 하나 읽거나, 철학 에세이, 예를 들어 이진우 교수의 <의심의 철학> 같은 가벼운 책이라도 하나 읽은 뒤 거기서 맘에 드는 철학자를 하나 골라 중심에 딱 세워 놓고 그 앞뒤, 주변을 구성하는 관련 인물들을 소환하여 읽어나가야 한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요즘 SNS나 인터넷을 하다 보면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철학/인문학 강좌에 다짜고짜 발터 벤야민이 등장하거나 라캉이나 들뢰즈가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더 놀라운 건 그런 강좌, 그것도 후배가 신청한 줌으로 하는 강좌에 몇 만 원씩 내고 참가하는 사람도 의외로 많다는 것. 후배도 그런 사람 중 하나고,   


이유와 방향과 단계

모르겠다. 꼰대여서 그런가? 배움에는 이유와 방향과 단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가 나처럼 그저 취미와 즐거움이어도 상관없다. 누군가 이유를 물어보면 여하간 뭔가 답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 방향까지 있으면 더 좋다. 난, 나중에 다른 글에 쓰겠지만 근거율 없는 나라는 존재를 사유하기 위해, 대략 삼십 대 중반부터 인문학을 읽어 왔다. 거의 이십 년 가까이 그렇게 훌쩍 뛰어넘지 않고 차근차근 쉬운 거부터, 대학원 시절, 그나마 이름이라도 눈에 익은 사람부터 읽어 왔다.      


너무 서둘지 말았으면 좋겠다. 아는 게 많으면 좋지만 몰라도 상관없는 것도 많다. 다들 책을 읽으라고 난리지만 솔직히 그 시간에 섹스를 하거나 운동을 하는 것이 더 좋다면,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걸 하는 것도 독서만큼 생산적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어쩌면 독서보다 더.     


그러니 지금 해야 될 걸 하고, 깨우쳐야 할걸 깨우치고, 터득해야 할걸 터득하는 것이 어떨까? 플립턴은 자유형 스트로크를 완성한 뒤에 익혀도 늦지 않다. 들뢰즈? 들뢰즈는 말할 것도 없고. 아니 굳이 읽을 필요 없다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발목을 잡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