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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Mar 23. 2024

고수는 말이 없다.

수영장에서 건진 철학 57

누가 누굴 가르쳐?

우리 반에서, 내 뒤에 서는 회원들 중 젊은 엄마가 한 명 있다. 나름 체력도 있고 군살도 없어서 딱 봐도 수영을 잘하고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게 티가 난다. 조만간 수영 대회를 나가는지 며칠 전엔 강사와 이런저런 논의도 하고 그 대회가 치러지는 곳에서 스타트 연습도 하고 왔다고 내게 말했었다.      


며칠 전, 이 사람이 주인공인 재미있는 장면을 봤다. 이 젊은 엄마에게 고급 B 반 1번 아저씨가 자유형 스트로크에서의 엔트리와 글라이딩에 대해 훈수를 하는 장면이었다. 그 아저씨는 “당기는 수영보다 미는 수영을 잘해야 해.”하고 말하면서 어깨를 앞으로 미는 시범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젊음 엄마의 표정을 보아하니 ‘누가 몰라서 안 하냐.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고, 하고 있다.’는 말을 금방이라도 하고 싶은 것 같았다. 그러나 꾹 참고 듣고 있었다. 젊은 사람이 속이 깊다.


솔직히 고급 B반 1번 아저씨의 속도는 젊은 엄마의 속도에 70퍼센트 정도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반도 못 미칠지 모른다. 물론 그 양반이 나보다 나이가 많고 수영도 오래 한 건 분명하지만 현재의 상태만 냉정하게 놓고 보면 고급 A반의 젊은 여성 회원에게 이래라저래라 조언을 해줄 만한 처지는 아니다.


어딜 가나 훈수질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중급 A반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 통통한 아줌마 회원인데 젊은 여자 회원들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는 장면을 몇 번 목격했다. 플립턴은 이렇게 해라, 터치 패드를 차고 나올 때 스트림 라인(물의 저항을 최소화하는 유선형 자세)은 이렇게 해라, 접영 물 잡기는 이렇게 해라.... 멀리서 봐도 오디오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만큼 동작도 크고 훈수에 "열심"이라는 얘기다. 그걸 또 젊은 아가씨들이 열심히 들어주니까 더 신이 나겠지. 심지어 초급반에도 이런 사람은 있다. 놀랍게도 말이다.      


반면 우리 반엔 이런 사람이 없다. 우리 수영장 통 털어서 수영을 제일 잘하고 체력도 가장 좋은 사람임이 분명한 1번조차 그런 조언을 하지 않는다. 새로운 회원이 올라와도 그저 눈인사만 할 뿐 가타부타,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다. 자신이 오늘 좀 빠른지 가까운 순번의 사람에게 가끔 물을 뿐이다. 앞서 썼듯이, 그럴 때마다 내가 늘 말해준다. “아, 오늘 딱 좋아요.”     


1번만 그런 게 아니다. 2번도, 3번도, 다른 회원들도 다른 회원의 수영에 대해 토를 달지 않는다. 물어보지 않는 이상. 이유는 간단하다. 이 반까지 올 정도면 나름 수영을 오래 했고 체력에도 자신 있다는 얘기다. 게다가 이 정도 오래 수영을 했다면 자신의 장단점 정도는 스스로 파악할 수 있다는 말이다. 게다가 아무리 수영을 잘하는 사람도 영법마다 기복이 있다. 누구는 접영을 잘하지만 누구는 배영을 잘하는 식이다. 그러니, 다시 말하지만 묻지 않는 이상 나서서 훈수를 두지 않는다.      


"왕년"에 사로잡힌 사람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주제 파악을 못하는 사람이 있다. “내가 왕년에”로 시작하는 멘트와 “내가 해 봤는데”로 시작하는 멘트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 있다. 또는 “아니~ 내가 걱정돼서, 다 너 생각해서 해주는 말인 데”가 아무 때나 입에서 튀어나오는 사람도 있다. 이들의 말이 허언인지 참인지, 그 실력을 바로 입증할 수 없는 술자리라면 몰라도, 실력 차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수영장에서 이러면 여러모로 곤란하다. 솔직히 술자리에서도, 직장에서도 수영장에서처럼 이런 사람의 진가를 금방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간 말했듯이, 그 바닥에서 몇 년을 굴렀는지가 그 사람의 실력을 보증해주지 않는다. 물론 그 버틴 세월은 존중받아 마땅하지만 그 경과된 시간이 실력, 그 자체를 보증해주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그 세월 동안 같은 걸 반복했고, 그래서 수십 년 전의 내 실력과 현재의 내 실력에 큰 차이가 없다면 그야말로 동어반복을 한 것에 불과하다. 물론 같은 걸 같은 형태로 반복하면 숙련은 될 수 있다. 그러나 진보는 이뤄지지 않는다.      


최소한, 내가 아는, 업계의 베테랑들은 과거의 자신에 매몰되어 있지 않다. 업계 특성상 새로운 장비와 관련 소프트웨어가 하루가 멀다 하고 나오는지라 그걸 배우지 않으면 그야말로 굶어 죽기 딱 좋기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만날 때마다, 새로운 고객을 만날 때마다 긴장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다. 생각해 봐라. 최첨단 LNG 운반선을 설계하는 기업의 홍보 영상을 아무 생각 없이 과거에 써 왔던 대로 쓴다는 게 말이 되겠나?  그게 가능 키나 할까?


훈수꾼 가려내기

내 옆에서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는 사람들의 진정성 여부를 가릴 필요가 있다. 누구를 만나든, 언제 어디서든 그렇게 나서서 훈장질을 해야 성에 차고 이를 통해 자기만족을 느끼는 사람이어서 나한테도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나의 부족과 미숙함이 안타까워서 그러는 것인지를 말이다.      


특히, 청하지 않았는데도 자기 마음대로 훈수에 나서는 사람에 대해선 더 생각해봐야 한다. 대학 다닐 때를 생각해 봐라. 교수와 면담을 하려면 특정한 기간 안에 날짜와 시간을 잡아야 하지 않았던가. 그게 업인 사람도, 그러니까 학생을 가르치고 진로를 함께 고민해 주는 사람과의 면담도 그렇게 서로 상호 간의 조율과 허락이 필요하다. 그런데 하물며 오다가다 만난 사이끼리 섣부르게 훈수를 두는 건 주제넘은 짓이다.     


나이를 앞세워 낄 때 빠질 때 모르고 나서서 훈수질 하는 사람도 경계해야 한다. 나이를 먹은 사람 또한 스스로 그러지 않은지 돌아볼 필요도 있다. 사실 나이를 먹을수록 나이가 무슨 벼슬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나이를 휘두르는 사람이 점점 더 혐오스러워진다. 불편하다. 살면 살수록 삶에 대해 겸허해지는 것이 당연하고 인생의 매 순간이 처음이어서 매번 아이와 학생과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또한 당연한데, 마치 두 번째 인생을 사는 것처럼 남에 인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어른이 점점 꼴 보기 싫다. 삶에 대한 반성과 자기 성찰이 있는 어른이라면 이러지 않으니, 혹시라도 주변에 이런 어른이 있다면 피하는 것이 낫다.     


부족함을 스스로 깨달아 바른 선생을 찾아가는 것도 능력이다. 그렇게 스스로 선생을 찾기 전에 찾아오는 선생은, 다시 말하지만 경계해라. 도를 아십니까, 하고 찾아오는 이들을 경계하듯 말이다. 진짜 도를 아는 사람이 시내 한복판에서 도를 구걸하면서 돌아다닐 리가 없지 않겠나? 바른 선생, 진정한 고수 또한 마찬가지다.

 

고수는 말이 없다. 말을 아낀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자기가 가진 것의 가치를 알기에 어지간한 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그 가진 것을 풀어놓지 않는 것이 첫째 이유다. 깨끗한 그릇에 묻은 티끌이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처럼 어느 수준 이상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아직 자신이 바라는 경지까지 다다르지 못했음을, 자신의 그 부족함을 절실히 알기에 자신이 가진 것, 아는 것을 아무에게나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 둘째 이유다.  


결국, 아쉬운 사람이 고수를 찾아가야 한다. 고수가 찾으러 오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 제자를 구하러 다니는 사람은 고수가 아니고 말이다. 고수를 찾아가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가르칠 준비가 된 사람, 배움을 풀어내어 마땅한 사람, 그 앎과 지혜가 넘쳐흐르는 사람은 대체로 평소엔 조용하다. 물어보기 전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물어보면 말을 한다. 그러니... 스스로 찾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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