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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Apr 02. 2024

같게, 또 매번 다르게

수영장에서 건진 철학 59

몸살

일주일 정도 가볍게 몸살감기를 앓았다. 수영은 죄가 없다. 물론 맥주도 죄가 없다. 아직도 자기가 청춘일 줄 알고 아무 때나 맥주를 벌컥벌컥 마셔대는 내가 죄인이다. 목이 좀 따갑고 몸이 무거운 거 말고는 다른 증세가 없었다. 종합 감기약과 집에 있는 진통소염제를 먹으며 일주일을, 주말을 넘겼다.      


그동안, 다른 글에도 썼듯이 수영을 안 갔다. 대신 수요일엔 딸의 초등학교 시절 마지막 참관 수업에 다녀왔다. 금요일까지 수영을 쉬면 안 될 것 같아서 억지로 갔다. 3월 29일은 수영 강습이 있는 3월의 마지막 날이다. 매달 마지막 날엔 평소보다 십오 분 정도 강습 시간이 짧다. 일종의 관례인데 일찍 끝난 김에 회원들끼리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서로의 폼도 봐준다. 스타트 연습을 하는 금요일에 마지막날까지 겹쳐서 운동양이 많지 않으리라 여기고 갔다. 짐작대로였다.    


수영을 갔다온 후, 금요일 휴가를 낸 아내와 학원을 쉬게 한 딸과 함께 코스트코에 가서 집에 필요한 물건 몇 개와 딸의 속옷을 샀다. 그 후 그 뒤편에 있는, 옛 고려제강 공장을 리모델링한 F1963에 있는 제법 그럴싸한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안 그래도 비싼 휴가였는데 더 비싸게 보냈다.      


그곳에서 오랜만(?)에 맥주를 마셨다. 사무엘 아담스. 무려 만원이나 주고. 이십 대 시절, 미군 부대 앞에 살 때 아는 미국 사람이 좋아하던 맥주여서 자주 마셨다. 그때는 이 맥주가 고급 레스토랑에서 만원이나 받고 팔릴 줄 몰랐다. 병맥주를 잔에 정성스레 따랐다. 호박(琥珀) 색이다. 한 모금 머금으니 저 멀리서 사과 향이 다가왔다. 창밖으로 보이는 센텀시티의 풍경을 보면서 천천히, 한 모금씩 마셨다.


음식이 나왔지만 많이 먹지 않았다. 아내와 점심으로 돼지국밥을 먹은 탓일까? 딸이 거의 대부분을 먹었다. 라자냐와 연어 그라브락스와 닭날개 튀김을. 딸은 디저트까지 주문했다. 덕분에 나도 다른 맥주를 한 잔 더 했다. 이번엔 드래프트 비어로.


4월의 첫 수영

4월 첫날, 1일, 월요일. 수영장에 갔다. 팔다리에 근력이 빠져나가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아직 몸살의 여파가 남아 있었다. 그래도 못 갈 정도는 아니다. 갔다. 우리 반엔 새로 온 사람이 두 명 있었다. 웜업 자유형을 해보니 컨디션이 정상이 아니었다. 그 두 사람이 제법 수영을 하는 것 같아 내 앞에 세웠다. 덕분에 그럭저럭 한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오키나와 스타일의 아가씨는 웜 업 자유형, 두 번째 바퀴를 한 후 또 쉬었다. 오늘은 3번 주자였지만 2번을 선 날렵한 아줌마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아니 따라가려 애쓰다가 지쳐버렸는지도. 웜 업 자유형을 할 때, 난 주로 원 킥을 찬다. 스트로크를 끝낸 오른손이 물속으로 들어가 글라이딩을 하려는 그 순간, 왼쪽 다리를 회초리 휘두르듯 찬다. 힘을 주되 유연하고 부드럽되 탄력 있게 차려고 신경 쓴다.


그렇게 원 킥을 차면서 오키나와 아가씨를 따라가다 보니 거리가 좁혀졌다. 아가씨의 킥이 만들어낸 후류가 손 끝에 느껴졌다. 고개를 살짝 들어 앞을 보니 아가씨의 발이 보였다.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킥을 멈추고 스트로크로만 따라갔다. 그렇게 가다 보니 두 번째 바퀴가 끝나고, 아가씨가 쉬려고 스타트 라인에서 옆으로 빠져버렸다.      


회초리, 대나무, 그리고 들뢰즈

언젠가 더 자세히 쓰겠지만, 요즘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과 가타오카 이치타케의 <라캉은 정신분석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를 번갈아 읽고 있다. 전자는 읽어온 지 꽤 됐고 후자는 며칠 됐다. 그러나 후자를 통해 전자, 들뢰즈를 이해하는 단서를 발견하게 됐고, 그 단서와 <니체와 철학>의 중후반부의 독해를 통해 뭔가 좀 가벼워진 느낌을 받고 있다. 그것을 여기서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수영은 물에 떠 있기 위함이 아니라 물에서 이동하기 위한 것이다. 특히 스포츠의 맥락에서 수영은 주어진 거리를 가장 빠르게 가기 위함이다. 그래서 자유형은 그야말로 어떤 방법을 쓰든 자기가 앞으로 가기에 가장 편하고 빠르다고 생각하는 영법을 하면 된다. 그게 개헤엄이어도 상관없다. 모든 선수가 자유형을 할 때 “자유형”을 하는 것은 그 영법이 가장 빠르고 쉽고 편하기 때문이다.      


역설적이지만 편하기 위해선 자유형을 “잘” 배워야 한다. 편하고 잘하고 안 다치고 오래 하기 위해선 정말 “잘” 배워야 한다. “잘” 배우지 못하면 오키나와 스타일의 아가씨처럼 쉽게 지치거나 어깨가 다칠 수 있다. 편하고 자유롭기 위해 정확하게 배워야 한다는 말엔 묘한 역설이 담겨 있다. 그렇지 않나?     


그런데 자유형을 더 자유롭게 하기 위해선 킥의 리듬을 다양하게 갖춰야 하고 스트로크의 리듬도 당겼다 풀었다 할 줄 알아야 한다. 함께 하는 수영이라면 더 그렇다. 혼자 해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오늘을 살펴 그에 맞게 리듬과 강도를 선택할 줄 알아야 한다. 앞서 말한, 강하 돼 휠 줄 알며 휠 수 있대 충분히 강해야 하는 대나무나 회초리처럼 힘을 빼 돼 적당히 몸의 긴장을 유지해야 하고 몸의 긴장을 유지하되 몸이 경직 돼서는 안 된다.      


가타오카 이치타케(이름이 참 어렵다.)의 책은 라캉의 이론을 요약해 놓은 책이 아니다. 물론 그 이론도 들어있지만 궁극적으론,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라캉의 이론이 지향하는 정신분석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라캉 류 - 이런 속된 범주화의 실례를 무릅쓰고 - 의 정신분석은 자아를 회복시켜 주고 심리를 치료해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스스로도 모르고 있는, 어쩌면 자기도 모르게 숨기고 있는 주체를 길고 긴 대화를 통해, 어느 순간 떠오르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마치 오래전에 죽은 이의 시신이 마른 호수 한 귀퉁이에서 몇 달만 에 떠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주체는, 저자의 말을 빌리면 “존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생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체는 매번 “언제나 좀 더 다른 것으로 나타”난다. “언제나 그것이 아닌 것, 그때까지의 생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부분은 니체의, 그리고 니체의 것을 빌려온 들뢰즈의 영원회귀를 연상시킨다. 주사위 놀이의 무한반복, 그 반복 속에서 언제나 새롭게 등장하는 숫자, 그 우연과의 조우, 그 조우를 기꺼이 환영하는 삶, 생성과 차이와 반복의 철학이.     


같게, 그러나 매번 다르게

다시 수영 이야기로 돌아가자. 오키나와 스타일의 아가씨의 자유형은 “완성”됐다. 그녀가 바꾸지 않는다면 현재의 자유형을 하는 오키나와 스타일의 아가씨는 미래에도 지속된다. 오늘의 자신을 꼭 붙잡고 있으면 내일의 새로운 나는 볼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어느 순간 우린 변화를 받아들이고 변화된 내가 될 수밖에 없다. 나이가 들어 체력이 떨어지고 근력이 떨어지면 그에 맞게 폼을 바꾸거나 리듬과 템포를 바꿀 수밖에 없다. 그걸 퇴화로 볼지, 아니면 새로운 나에 도래로 볼지는 전적으로 나에게 달렸다.      


반복해 말하지만, 변화는 어렵다. 그 수용 자체가 힘들다. 오늘 샤워장에서 지난해 우리 강사였던 선수출신 강사와 중급반의 남자 회원이 나누는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됐다. 마침 난 그 옆에서 샤워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의 앞을 추론해 보니 중급반 회원이 어깨가 아픈 모양이다. 그 통증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강사에게 의견을 물었던 듯하다. 내가 막 샤워를 하기 시작했을 때, 강사는 어떨 때 아픈지 이어 물었다. 회원은 자세히 설명했다. 강사는 재활 운동을 권했고 인근에 있는 한 피트니스 센터를 소개했다. 재활 관련 전문가들이 포진한 곳이고, 자신도 선수 시절 무리가 갔던 어깨를 그곳에서 운동으로 치료한 덕분에 현재도 강사로 일할 수 있다고 했다. 물론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50회의 PT가 기본인데, 한 회당 3만 원이라고 했다. 백오십만 원이다.      


그 회원뿐만 아니라 다른 회원들 중에도 어깨가 아픈 사람이 많다. 어깨가 아픈 원인이야 한두 개가 아니겠다만, 대체로 자유형을 할 때 팔을 접는 스트로크가 완성이 안 된 상태에서 계속 무리해서 수영을 하거나, 그 완성을 위해서 꼭 해야 할 몸통의 롤링이 안 돼서 어깨를 무리하게 들어서 돌려서 일 것이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하자면 사람마다 자신의 어깨의 유연함이 다 다르기에 그 상황에 맞는 스트로크의 각도와 강도를 찾아야 하는데 그걸 못 찾은 상태에서 계속하거나, 심지어 맞지 않는 스트로크가 맞는다고 착각하고 계속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단순하다. 어떤 운동을 해서 아프면 무리를 했거나 잘 못 했다는 거다. 배드민턴이나 테니스를 하는 사람들은 끼니도 잊고 그걸 해서 종종 부상을 당한다고 하니 대체로 전자에 해당될 것이다. 그러나 수영하는 사람 중에 몇 시간 동안 수영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강습 시간에 나와 운동을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이렇게 수영을 하는 사람이 어깨가 아프다면 당연히 후자의 경우인 것이다.      


다시, 그렇다면 답도 단순하다. 고치면 된다. 잘 못 된 자세를 고치면 된다. 자기에 맞는 각도와 강도를 찾으면 된다. 젊었을 때 몸에 익혔던 자세가 나이가 들어 더 이상 맞지 않으면 바꾸면 된다. 정말 더 나이가 들어 수영이 힘들면 다른 운동을 찾으면 된다. 나이가 들어 살이 찌면 옷을 새로 사거나 살을 빼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단순한 결정이 쉽지 않다. 어제의 나와 다르고 오늘의 나를 배신하고 실망시키는 또 다른 나와 만나기로 결정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오늘의 나를 놀라게 하고 환희에 젖은 내일의 나를 만날 수 있는 선택과 결정도 쉽지 않다. 우리는 내가 누구이길 말할 수 있길 바라고 모두가 아는 나를 유지하기 바라기 때문이다.      


어쩌면 순리대로 사는 것이 이런 것일지 모른다. 나무나 풀이 계절의 도래를 긍정하지 않으면, 그 도래 속에서 자신의 변화를 긍정하지 않으면 성장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 부산은 벚꽃이 한창이다. 작년에 봤던 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작년에 피었던 꽃은 그때 사라졌다. 꽃이 돌아왔으나 그 꽃은 아니다. 모든 나무와 모든 풀에 핀 꽃들이 그러하다. 이것들이 지난봄에 핀 꽃들을 붙들고 있었다면 새 봄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 또한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몸살을 앓으면서, 4월의 첫 수영을 한 후 집에서, 벚꽃 길이 이어지는 하굣길을 딸과 걸으며 이런 생각들을 두서없이 했다. 그 생각 끝에 작은 다짐을 했다. 후회 없이 수영을 하자. 오늘의 내가 기뻐 웃을 수 있는 그런 수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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