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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Apr 13. 2024

눈을 감지 마라

수영장에서 건진 철학 60

수영할 때 가장 두려운 순간?

수영 관련 동영상들 중, “수경 벗겨지지 않는 노하우”라는 제목의 영상이 많다. 수경이 벗겨지는 걸 아예  “Swimmers worst nightmare."라고 칭하는 동영상도 있다. 실제로 수경이 벗겨지는 건 프로와 아마추어 할 것 없이 공포스러운 것이어서, 실제로 지난 도쿄 올림픽에선 Lydia Jacoby라는 선수가 수경이 벗겨져서 그걸 입에 물고 끝까지 수영을 한 적도 있다. 그럼, 왜 수경이 벗겨질까?    

 

일단 수경이 벗겨질 때는 스타트할 때다. 물 밖에서 안으로 뛰어들 때 말이다. 고급반 사람들도 종종 이때 수경이 벗겨져서 옆으로 비켜서서 다시 수영을 쓰고 출발하곤 한다. 왜 하필, 이때 이렇게 수경이 벗겨지는 걸까? 이유는 여러 가지다. 먼저 자신에게 맞지 않는 수경을 썼을 때 그렇다. 사람마다 눈의 크기와 깊이가 다르다. 이러한 저마다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이 차이를 발견하기 전까지 눈에 맞지 않는 수경을 쓰고 스타트를 하는 경우 잘 벗겨진다. 특히 중급반에서 막 고급반으로 올라온 사람들이 이런 일을 겪는다.      


두 번째 이유는 고개를 드는 것이다. 스타팅 블록을 박차고 물속으로 뛰어드는 순간, 팔은 머리 뒤로 모아 일직선으로 뾰족하게 만들어주고 그 팔의 압력으로 자연스레 숙여지는 힘으로 턱을 당겨준다. 이렇게 순식간에 스트림 라인을 만들어준 상태로 물로 뛰어들면 귓가에 “차~악”소리가 나며 쏙 들어가게 된다. 이런 자세로 입수를 하게 되면, 당연하게도 얼굴로 물의 충격을 받아내는 것이 아니라 1차적으론 손끝으로, 2차적으론 정수리와 어깨의 뒤쪽이 받아주기에 수경이 뒤집힐 일이 없다. 그러나 종종 턱을 덜 당겨주거나 아예 얼굴부터 들어가게 되면 얼굴로 수면의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 수경이 뒤집혀 벗겨지게 된다.      


세 번째 이유는 눈을 감는 것이다. 아마 많은 고급반 사람들이 저지르는 아주 사소한 실수일 것이다. 중급반 이상, 대부분의 수영 동호인들은 눈에 꼭 맞게 수경을 쓴다. 당연히 눈을 뜬 상태로 수경의 위치와 탄력을 조정한다. 이렇기 때문에 눈의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수경과 눈 주변 사이에 틈이 생길 수 있다. 특히 천천히, 살짝 감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움찔하면서 깜빡하고 입수할 때는 물의 충격으로 인해 그 틈이 더 크게 벌어질 수 있다. 이때 수경이 뒤집히는 것이다.      


왜 눈을 감지?

의외로 많은 수영 동호인들이 습관적으로 눈을 감는다. 무의식적으로 말이다. 나도 최근에서야 그 버릇을 알아챘다. 물 밖에서 스타트할 때뿐만 아니라 강습을 받을 때 물 안에서 스타트를 할 때, 물속에 몸을 잠기게 한 뒤 스트림 라인을 만든 뒤 벽을 차고 나가기 위해 물속으로 잠기는 그 순간, 아주 찰나의 순간이지만 살짝 눈을 감는다는 걸 알아챈 것이다.      


3월의 어느 날이었다. 연습 풀에서 왼팔 물 잡기를 연습할 때였다. 수면 위에 있다가 물속으로 몸을 담글 때, 그 들어가는 순간, 물 밖에서 물 안으로 풍경이 바뀌는 순간, 그 경계를 넘나는 드는 순간을 보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딱히 무서울 것도 없는데 왜 눈을 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연습 풀에서 연습할 때마다 의식적으로 눈을 감지 않았다. 세계의 경계를 넘어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그 순간을 온전히 목격하기 위해 연습했다.    


4월 들어 맞은 첫 금요일, 스타트 연습을 하는 날, 스타트를 할 때도 눈을 감는지 궁금했다. 보통 스타트 연습, 그러니까 물에 뛰어드는 연습을 네 차례 정도 하는 데, 첫 번째 할 때, 물 밖에서 물속으로 뛰어드는 그 순간, 눈을 감는다는 걸 알았다. 이 멋진 광경, 물을 가르고 들어가는 광경을 보지 않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물 밖과 물속만 봐 왔을 뿐 그 순간은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경이 벗겨지지도 않고 잘도 해왔구나 싶었다. 이후부터, 눈을 감지 않고 뛰어들었다. 찰나의 순간, 귓가에 “차~악”하는 소리가 들리는 바로 그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세계의 경계를 넘어가는 그 경이로운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감지 않고 뛰어들었다.


눈 깜빡하는 순간

삶은 UFC 경기와도 같다. 경기를 보다 보면 지루할 때가 있다. 실제로 옥타곤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에도 딴짓하는 사람이 있다. 스마트 폰을 보거나 옆에 사람과 이야기를 하거나 좀 떨어져 앉아 있는 옥타곤걸에 한눈파는 사람도 있다. 두 선수가 케이지에 몸을 기대고 힘겨루기를 하거나 매트에 몸을 누이고 그래플링이나 주짓수 실력을 겨룰 때 특히 이런 관중들이 많다. 선수들 입장에서는 그 모든 순간, 몸짓 하나하나가 상대를 파악하고 승부를 결정짓는 승부수로 향하는 셋 업(Set-up)의 과정이지만 밖에서 보는 사람, 나같이 TV로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지루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그 지루함에 잠시 한눈팔 때, 스마트폰을 집어 들고 섹시한 여자에게 눈길을 주고 지나가는 직원에게 음료수를 주문하던 그때, KO 펀치가 터질 때가 있다. 엎치락뒤치락하다가 느닷없이 조르기가 들어가서 순식간에 항복을 받아내는 수도 있다. 캐스터의 상투적인 표현을 빌리면 그야말로 “눈 깜빡”하는 그 순간에 말이다.           


우리가 놓친 순간들

우린 결정적인 순간, 자극적인 순간을 좋아한다. 요즘은 애 어른 할 것이 다 그렇다. 축구라면 골 들어가는 장면만 좋아하고 야구라면 점수 나는 장면만 좋아한다. 그러나 그런 재미있는 순간만 보다 보면 다른 의미 있는 순간, 의미를 담고 있는 순간, 해석을 기다리는 의미 있는 순간을 놓칠 수 있다.


얼마 전 시합에서 류현진이 어떤 공 배합으로 양의지를 무너뜨렸는지, 광주 FC가 4연 패를 당하는 동안 상대팀들이 광주 FC의 공격 루트와 그 방법에 따라 수비 전략을 어떻게 바꿨는지, 경기의 흐름이 서서히 전환되는 그 순간, 타자의 의지와 중심을 무너뜨리는 커브가 날아가는 그 순간, 그 순간의 의미, 의미 있는 순간을 놓칠 때가 있다.      


그렇다. 어떤 순간은 두렵고, 어떤 순간들은 의미 없어 보일 수도 있으며, 어떤 순간들은 재미없다. 이런 여러 이유들로 인해 우린 많은 순간을 놓친다. 좀 야한 이야기를 하자면, 액션에 정신이 팔려서 그녀/그의 미묘한 피부의 습도와 색이 변하는 걸 놓치는 것처럼 말이다.


물속 스타트를 하던, 물 밖에서 스타트를 하던 그 경계가 바뀌는 순간을 목격한다고 해서 수영이 더 잘 되거나 안 되는 건 아니다. 수경의 상태에 따라 벗겨질 수도 안 벗겨질 수도 있다. 연인의 미묘한 변화를 알아챈다고 해서 그 밤이 더 뜨거워지고 없던 힘이 생길 리도 없다.      


그러나 그 순간의 포착, 알아챔으로 인해 우리의 경험은 풍성해진다. 평범한 것들로부터 비범한 것을 찾아낸다. 반복해서 하던 것들 속에서 반복적이지 않은 것들을 발견한다. 일상 속에서 눈부신 순간을 발견한다. 그렇게 삶은 찰나의 중첩으로 빛난다. 늘 가던 곳이라고, 늘 먹던 것이라고 무심히 가지도 먹지 마라. 늘 안던 사람이라고 불을 끄고 하지 마라. 늘 뛰어들던 수영장이라고 해서 눈을 감지 마라. 한 세계의 변화를 목격하는 그 순간, 눈을 감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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