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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Apr 24. 2024

안주할 수 없는 삶

수영장에서 건진 철학 61

그 아가씨의 사정

수영장 등록 기간이다. 다음 달에 등록을 했는지 쉴 건지, 반을 옮길 건지 무심히 물어보고 답한다. 대부분 그대로 가기 때문에 이렇게 지나가는 말투로 무심히 묻는 것이다. 그런데 오키나와 스타일의 아가씨는 다음 달, 한 달을 쉰다고 한다. 이유는 허리가 좀 안 좋아서. 흠... 수영장 가는 즐거움이 하나 없어지는... 그만하자. 


여하간, 이 아가씨 다음 달부터 못 본다. 그런데 어째, 그 이유가 찜찜하다. 허리가 안 좋아서라니. 허리가 좀 안 좋은 사람이 그나마 무리 없이 할 수 있는 운동이 수영 아니던가? 어쩌면 그게 진짜 이유가 아닐지도 모른다. 두 달 정도 같이 수영을 하는 동안 체력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앞서 다른 글에 썼듯이 우리의 웜 업은 자유형 250미터다. 25미터 길이의 수영장을 다섯 바퀴 도는 것. 속도는 대체로 일찍 오는 2번 아저씨가 정하기에 그렇게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다. 게다가 회원이 열 명 정도만 와도 레인이 꽉 차기에 함부로 속도를 낼 수가 없다. 그러니까, 열 사람이 일렬로 종렬로 맞닿아 누운다고 생각해 봐라. 평균 신장을 1미터 60센티미터로만 잡아도 수영장이 양 사이드의 1,2 미터를 제외하곤 꽉 찬다.


여기에 사람 간의 간격을 두기 위해 앞선 주자가 어느 정도 멀어졌다 싶을 때 출발하기에, 1번 주자가 속도를 내면 맨 뒷 주자는 잡힐 수도 있다. 여하간 이런저런 이유로 웜 업 자유형의 속도는 전력의 대략 60~70퍼센트 정도의 속도다. 뭐, 조깅 같다고 보면 된다. 이렇게 일정한 속도로 일정한 거리의 수영을 두 달가량 반복해서 했는데도 그걸 완주 못한다는 건 고급반 회원에겐, 어쩌면 수치다.


그 아가씨는 주로 내 앞에 설 때가 많았는데, 대체로 세 번째나 네 번째 바퀴가 막 시작될 때 옆으로 비켜나 휴식을 취하곤 했다. 그 아가씨의 자유형에 대해 썼듯이 그렇게 바쁘게, 크게 발을 차서는 일정한 템포를 꾸준히 유지하기 힘들다. 큰 근육인 허벅지 근육을 많이 쓰면 금방 피로가 오고 그에 따라 호흡도 가빠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그 아가씨가 고급반의 웜 업 속도로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자유형 거리는 1백 미터에서 1백5십 미터 정도인 것이다. 그게 그 아가씨의 한계다.     


한계를 극복하는 법

이 한계를 극복하는 법은 있다. 당연하게도 체력을 키우면 된다. 심폐지구력을 높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건 두 달 만에 불가능하지 않을까? 다른 하나의 방법은 스트로크를 교정하고 그 힘을 키우는 것이다. 이건 신경만 쓰면 가능할 수도 있다. 최소한 스트로크의 교정은 가능하다. 팔의 힘은 이 교정된 스트로크를 반복하다 보면 자연스레 따라오고, 부족하다 싶으면 밴드로 된 도구로 지상 훈련을 하면 된다.      


물론 다른 방법도 있다. 속도를 늦추면 된다. 내 뒤에 서 있는 여성 회원들과 함께, 그들과 보조를 맞춰 수영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속도를 안 내도 되고, 당연히 발을 열심히 안 차도 된다. 더 극단적인 방법도 있다. 난 그녀가 어쩌면 반을 바꿀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평균적으로 속도가 느린 반, 자신의 현재 속도로도 충분히 에이스 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원래의 반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쉬운 수준 VS 어려운 수준

힘든 선택이다. 여러 대학에서 각기 다른 대학에서 온 학생들과 어울려 다양한 교수들에게 배웠다. 어떤 대학은 적당히 수업만 빠지지 않아도 성적이 나왔다. 어떤 대학은 제법 공부를 해야 공부의 보조를 맞출 수 있었다. 어떤 대학은 정말 열심히 공부한 뒤, 그저 이 과목, 패스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공부의 양과 난이도가 높았던 적도 있었다. 강사로 경험했던 대학도 마찬가지였다. 학생 전체가 수준이 낮아서 학생이 조금만 잘해도 돋보이는 대학이 있었던 반면 다들 성실하고 실력이 좋아서 어지간해서는 앞서 치고 나가기 어려운 대학도 있었다. 당신이라면 어느 대학을 선택을 할까?     


이건 학교의, 소위 네임밸류 문제가 아니다. 유명한 대학이라 하더라도 그 학과의 분위기가 느슨하면 무명의 대학보다 공부 수준이 떨어질 수도 있다. 그 반대의 경우도 흔하고 말이다. 그건 회사도, 수영 같은 동호회도, 하다못해 독서 모임도 마찬가지다. 가벼운 책(?)만 읽고 뒤풀이에 더 열심인 유명한 독서 모임도 있고 어떤 책을 읽든 그 책의 진액을 다 빨아먹을 기세로 책에 관한 대화가 막차 시간까지 이어지는 작은 모임도 있다. 어떤 선택을 하든지 자기 마음이다. 솔직히 편한 게 좋지 않나? 그러나 일단 자신의 난이도를 높이면, 눈높이를 높이면 스스로 내려가는 건 힘들다.


앞서 서평에서 썼듯이 딸 친구 중에 온유라는 놈이 있다. 이놈이 5학년 때도 딸이랑 같은 반이었는데, 딸이 가끔 이 녀석한테 책을 빌려 왔다. 그때가, 딸이 한창 법, 특히 헌법에 관심이 많을 때였는데 자기 집에 법 관련 책이 있다면서 빌려 준 것이었다. 이것도 플러팅이라면 참 고급스러운 플러팅 아니겠나? 여하간 그때부터 그놈 참 특이하다 싶었는데, 또 같은 반이 된 것이다.      


이 녀석이 특이한 것이, 딸이 어느 날 물었다고 한다. 왜 그렇게 책을 많이 읽고 좋아하냐고.  <해리포터> 시리즈부터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까지 구미가 당기는 책은 닥치는 대로 읽는 녀석이었으니, 그 독서의 이유가 궁금했던 것이다. 그 녀석이 하는 말이, 집에 TV도 없고, 자기는 스마트 폰도 없어서 딱히 할 게 없어서 책이나 읽는 거라고 답했단다.      


그렇게 같은 반이 되고 한 달쯤 지났나? 도서관 수업을 위해 그 반 아이들이 단체로 학교 도서관에 들어가서 맘에 드는 책을 골라 읽었다. 딸도 한 권 고르려는데, 온유에게 한 권 권해달라고 부탁했다. 이 녀석이 무슨 책을 골라줬을까?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였다. 그런데 더 웃긴 건 딸이 그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는 것. 추천한 놈이나 읽은 놈이나.       


놀랍게도 <어려운 책을 읽는 기술>이라는 책이 있다. 나보다 열 살 정도 많은 일본학자 다카다 아키노리가 쓴 책이다. 그의 책 <나를 위한 현대철학 사용법>을 제법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다. 지바 마사야도 <현대철학입문>이라는 책에서 어려운 책을 읽는 방법을 언급했었다. 다카다 아키노리는 <어려운 책을 읽는 기술>에서 “전문 서적은 몇 개월에 걸쳐 거듭해서 읽고 한 번 이해했다는 생각이 들어도 몇 번이고 다시 읽는 작업을 거쳤을 때 조금씩 자신의 지식이 된다는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고 했다. 어쩌면 인생도, 수영도, 공부도 마찬가지 아닐까?     


요즘 부쩍 드는 생각이다. 삶은, 어떤 속도로든 움직이는 것이다. 어떤 방향으로든, 어떤 높이로든 움직이는 것, 그것이 삶이라는 생각이다. 지바 마사야가 <너무 움직이지 마라>에서 말했듯이 자신의 이 순간을 알아챌 정도의 속도로, 느리고 천천히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 삶이라는 생각이다. 궁극적으로, 삶은 안주(安住)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서둘 필요도, 조급해할 필요도 없다. 그 아가씨가 이런 마음만 없었다면, 좀 더 길게 내다보고 수영을 했다면, 어쩌면 다음 달에도 우리 반에서 수영을 하지 않았을까? 물론 정말 허리가 안 좋을 수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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