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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May 17. 2024

자기만의 기준이 필요한 순간

수영장에서 건진 철학 65

쿨링 시간

강습이 끝나면 쿨링 시간을 갖는다. 강사가 고급반의 손을 한데 모으게 한 뒤 다들 파이팅을 외치고 난 후, 난 반대쪽, 피니쉬 라인을 향해 레인에 붙어 걸어간다. 혹시라도 느리게 자유형을 하면서 쿨링 하는 사람의 경로에 방해가 될까 싶어서다.     


그렇게 반대쪽에 도착해 풀 밖으로 올라와 연습용 풀로 가기 전에 잠시 물속에서 근육을 진정시키는 시간을 갖는다. 이때, 딱히 할 게 없으니 옆 레인, 초급반 레인을 보곤 한다. 강습 시간이 끝난 후, 단 5분이라도 강사의 말을 되새기며 연습을 하는 회원들을 물끄러미 보곤 한다.  

   

요즘, 초급반의 대부분은 접영과 평영을 배우고 있다. 이번 달이나, 저번 달에 등록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말이다. 초급반 회원들은 특히 접영의 웨이브를 정말 열심히 연습하고 있다. 웨이브... 다른 영법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접영의 움직임은 낯설다. 우리가 언제 이렇게 꿈틀거릴 일이 있었나? 브레이크 댄스를 추는, 요즘 친구들 말로 하면, 어디 크루라도 소속된 적이 있었던 사람이라면 몰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치 한 마리 장어라도 된 것처럼 하나의 흐름을 타고 꿈틀거려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나도 접영을 하기 전까진 그랬다. 그러니 다들 접영의 웨이브를 열심히 할 수밖에 없다. 낯선 동작을 내 것으로 만드는 방법은 익숙할 때까지 반복하는 길밖에 없지 않나?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팁

며칠 전에도 초급반 아가씨 몇 명이, 그렇게 그 몇 분을 활용해 접영 웨이브를 연습하는 걸 지켜봤다. 그녀들은 스타트 라인 쪽에서 출발해 내가 있는 피니쉬 라인 쪽으로 “꿈틀”거리며 왔다. 웨이브를 좀 길게 타면 힘이 좀 덜 들으련마는, 아가씨들에게 그런 노하우가 있을 리가 없을 터, 초급반 특유의 파장이 짧고 급한 웨이브로 힘겹게 오고 있었다. 보고 있는 내가 다 숨이 찰 정도였다. 도착한 아가씨는 그전에도 몇 번 간단한 팁을 알려주던 아가씨였다. 미야자기 하야오의 만화에 자주 등장하는 주인공의 어린 여동생 얼굴에 시골 아이처럼 까무잡잡한 피부여서 도저히 부산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마치 파타야나 피지 같은 곳에서 저번 달에 도착한 교포 같은 느낌을 주는 아가씨다.        


여하간 그 아가씨에게 농담처럼 한 마디 던졌다. “힘들죠?”, “네.”, “그렇게 하면 나도 힘들어.”, 아가씨가 웃었다. “좀 길게 타고 가슴으로 물을 누르고 들어갈 줄 알면 좋은데...”, “강사님은 그렇게 하라고 하는데 잘 안 돼요.”, “그게 벌써 되면 우리랑 수영해야지”, 아가씨는 또 웃었다. 간단한 요령 한두 개를 알려줬다. 부탁하기에 시범도 보여줬다.      


잠시 후, 이번엔 그 아가씨가 자유형을 연습했다. 이번에도 반대쪽에서 출발해서 내 쪽으로 왔다. 아가씨가 날 봤다. 무슨 말을 해달라는 것이 얼굴에 쓰여있었다. “호흡할 때, 어디 봐요?”, “네?”, “오른쪽으로 호흡할 때, 얼굴을 물 밖으로 내밀잖아요. 그때 어딜 보냐고요?”, 아가씨와 그 옆에 서 있던 다른 아가씨도 단 한 번도 그런 걸 신경 써 본 적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난 항상 이 레인을 봐요. 딱 레인을 볼 수 있을 만큼만 얼굴을 내밀려도 하는 거죠.”, “아, 왜요?”, “일단, 머리를 들면 하체가 가라앉아요. 앞이 뜨면 뒤가 가라앉는 거죠. 그러니 얼굴을 수면 밖으로 최소한만 나오게 하는 게 좋겠죠? 그리고 어떤 컨디션이든, 어떤 속도로 수영을 하든 늘 같은 자세를 유지하는 게 폼에도 좋고, 당연히 속도도 나고, 힘도 더 들거든요.” 아가씨들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던 아가씨가 갑자기 질문을 했다. “그럼, 물 안 먹어요?”, “아, 먹을 때도 있지. 그런데 이렇게 많은 물속에서 운동을 하면서 어떻게 물을 하나도 안 먹고 수영할 생각을 하나? 먹으면 뱉으면 되고, 그런 거지 뭐.”, 아가씨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키려는 규칙들

영법마다 몇 가지 지키려고 애쓰는 규칙이 있다. 예를 들어 배영은 천장의 무늬를 기준사람 똑바로 가려고 애쓴다. 팔은 최대한 멀리 뻗어 멀리 있는 물을 잡고, 킥을 할 때 무릎을 살짝 접어 차는 소위 Back kick을 활용해서 힘을 더 얻으려고 한다. 접영을 할 때는 물 밖으로 너무 많이 나오지 않으려 애쓰고 물은 정확하게 잡으며 팔을 빼 나비 같은 자세를 할 때는 견갑골을 사용하려 한다. 힘들 때일수록 엉덩이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것도 잊지 않으려 한다. 평영은 물 밖으로 상체를 꺼낸 뒤 최대한 빨리 들어가려 한다. 나왔을 때 어깨를 으쓱하고 올려서 높이를 확보하고 킥 타이밍은 한 템포 늦게 차려고 노력한다. 자유형은 킥보다 스트로크에 신경 쓰고, 킥을 할 때는 주로 원 킥, 컨디션이 좋으면 투 킥을 한다. 숨을 쉴 때는 레인에 눈높이를 맞추려 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몸에 배어서 “척하면 착”하고 실행되면 좋을 테지만, 난 아직 그 수준까지 다다르지 않았다. 그 수준까지 다다르기 위해, 그 수준에 다다랐을 때 모든 영법의 폼이 보기 좋고 효과적이면서 효율적이기 위해 지금 이렇게 몇 가지 잊지 말아야 될 규칙들을 머릿속에 상기시키곤 하는 것이다. 특히 컨디션이 안 좋을 때, 몇 세트를 한 후 힘들 때 더 그렇게 한다. 힘들다고 대충 할까 봐, 편하게 할 까봐, 그래서 폼도 흔들리고 운동의 효과도 떨어질까 봐, 어떤 경우에도 일관성 있게 하기 위해 그렇게 한다.      


쓰러졌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

수영을 하다 보면 물을 마실 수 있다. 자전거를 타다 보면 넘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한 번 마셨으면 다음엔 그 이유를 알아 대처해야 한다. 넘어졌으면 일어나서 다시 레이스에 합류해야 한다. 언제까지 너부러져 있을 순 없다. 1,2미터 정도는 약간 삐뚤게 가도 된다. 그러나 25미터, 50미터 배영을 그렇게 구불구불 가면 더 많이 간 것이다. 힘은 더 많이 쓰고 거리는 더 많이 간 것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선 천장의 무늬를 기준 삼아 가야 한다.


살다 보면 흔들릴 때가 있다. 지칠 때가 있다. 삶이, 일상이 수습될 수 없을 것처럼 흐트러질 때가 있다. 배영이든 인생이든 돌이킴은 알아차리는 데서 시작한다. 알아차리기 위해선 틀림을 알려주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건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삶이 좋은 삶인지, 어떤 직장이, 연인이, 일상이 좋고 바른 것인지는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려 있다. 우리 모두가 다르게 생겼기에 각자 편한 수영 스타일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 다르게 사는 건 괜찮다. 그러나 기준이 없는 건 안 된다. 나름의 수영 스타일이 있는 건 괜찮지만 그 스타일의 기준이 없어선 안 되는 것과 같다. 그 기준, 자유형 할 때 레인을 보는 것처럼 사소한 것들이다. 별 거 아닌 것들이다.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 늘 하던 운동, 잠깐이라도 짬을 내어 책을 읽는 시간, 사랑하는 이와의 통화, 산책, 정확한 식사 시간, 제한이 있는 흡연과 음주량... 뭐 이런 것들이다. 사소하지만 나다움을, 나다운 일상을, 나다운 인생을 만들어주던 것들. 그런 것들이다. 잠시 흔들려도 다시 바로 잡아주는 그런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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