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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자본을 읽자 - 고병권

동해선에서 읽은 책 93

by 최영훈

요즘 애정하는 작가들

보통 책을 읽으면 두 가지 맥락에서 깊은 인상을 받는데 하나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거나 내가 관심 있는 이론이나 개념을 쉬운 언어와 적절한 예로 정확하게 설명하는 사람을 만날 때이고, 다른 하나는 완벽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어려운 이론이나 상황, 이슈를 너무나 쉽게 설명하는 사람을 만날 때이다.


전자의 경우엔 나와 동년배 일본 학자들인 지바 마사야나 사사키 아타루, 아즈마 히로키, 정신분석학자인 백상현과 재독 철학자인 한병철 등이 그런 경우이고 후자의 경우엔 나보다 나이가 많은 한국의 학자들, 예를 들면 박찬국, 이진우, 고병권 등이 그렇다.


무지막지한 고병권

고병권의 책을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이 정도 분량의 책을 쓰기 위해 이렇게까지 공부할 일인가?'다. 다음으론, '아니 이 어려운 걸 이렇게 쉬운 언어로 쓸 수 있는 건가?' 하는 것이고 마지막으론 '미사여구나 형용사 없이 완벽한 구조를 가진 문장만으로도 이렇게 문장의 쾌감을 줄 수 있는가?'이다.


고병권은 니체로 가는 길의 안내자로 선택한 학자인데 그 역할을 국한시키기엔 그 공부의 양과 깊이가 남다르다. 소위 학교 안의 학자들이 아는 것은 당연히 알고 그들이 간과하고 넘어가는 것까지 그러모아 분석하여 과거의 텍스트가 가진 의미의 심해까지 들어가 꺼내어 보여준다.


그래서, 학교 안의 학자들이 법의학자와 같다면, 그는 거기에 더해 탐정이자 흥신소 직원 같다. 그에게 있어 하나의 텍스트의 해석은 그 텍스트와 그 텍스트를 만든 사람, 시대, 역사, 상황에 대한 전반적 이해를 기반으로 한다. 그렇기에 그의 책을 읽으면 유명한 학자나 고전이 다면적으로 보이고, 그 결과 다층적으로 알게 된다. 설령 읽었거나 잘 아는 이론이라 하더라도 그의 안내를 받아 그것에 다가가면 새롭게 보이고 알게 되는 이유다. 이것이 그의 능력이다. 오히려 이 능력이 그의 글쓰기 실력보다 그를 눈부시게 하고 독보적인 위치에 있게 한다고 본다.


채무감

물론, 나는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어 본 적이 없다. 대학교 1학년 때 <공산당 선언>을, 그 이후에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인가를 읽은 기억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딱히 좌파도 아니었고 운동권도 아니었다. 대학원 가서, 그 당시 학계 흐름에 의해 비판 커뮤니케이션과 문화 이론을 공부한 게 소위 진보적 이론을 공부한 것의 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론>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건 카피라이터 초년병 때 마케팅 관련 도서를 열심히 읽으면서 이걸 제대로,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제 이론을 이해해야 한다는 필요에 의해 경제학 도서를 읽으면서부터다. 그때부터, 일종의 저 책의 채무감이 따라다녔고, 서점 도서 목록에 이 책이 뜰 때마다 망설이곤 했었다.


열두 권의 첫권

고병권의 이 책, <다시 자본을 읽자>는 뒤에 이어지는 열한 권의 <북클럽 자본>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이다. 그렇다고 무슨 삼국지나 슬램덩크처럼 1권을 읽으면 연달아 읽어야 전체 이야기를 알 수 있는, 그런 책은 아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나온 수많은 개념들을 이해하고, 그것이 이 시대에 갖고 있는 의미를 함께 독해해 나가는 책들의 시리즈일 뿐이다. 그렇기에,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몇 번째 권, 어떤 내용의 책을 읽더라도 고병권의 글솜씨와 논리는 일관되게 빛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기에, 언젠간 이것들을 다 읽지 않을까 하는 불길한 예감이 들기도 하고.


이 책을 통해 많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이 노동자들이 이해하길 바라며 되도록 쉽게 썼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써진 첫 장 때문에 노동자들이 읽지 않을까 걱정되어 그 장만 넘어가면 읽어나갈 수 있으니 계속 정진해 나가라는 독려의 글을 썼다는 것, 마르크스는 이 책에 관한 대부분의 연구와 집필을 영국 런던에서 했지만 최초의 번역은 러시아였다는 것 등이다. 이 외에도, 정말 집요한 학자가 아니라면 밝혀낼 수 없고 알 수 없는 사실을, 설령 밝혀내고 알게 되더라도 깊은 이해와 글솜씨가 있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텍스트와의 의미 연동을 저자는 훌륭하게 해낸다.


마르크스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도,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고병권의 이 훌륭한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이 아름다운 구조와 문장을 나 혼자만 읽기에는... 전혀 아깝지 않지만... 좋은 건 나누는 게 미덕이니.(2022.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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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강연이 짧아 질문을 많이 받고 답을 길게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사회자는 세 개의 질문을 받겠다고 했다..... 세 번째 질문은 "지금까지 많은 영화를 보고 책, 글을 읽으셨을 텐데 가장 인상 깊은 것으로 하나씩 추천하신다면..."이었다. (강연자) 둘 다 또 한숨을 쉬었다.


"이 질문은 얼마 전 딸이, 자기가 생에 처음으로 마실 맥주로 좋은 걸 추천해 보라는 질문만큼 어렵습니다. 흠... 일단 요즘엔 한국 작가로는 백상현, 고병권 선생님 책을 읽습니다. 또 저와 동년배 일본 철학자인 사사키 아타루, 지바 마사야, 아즈마 히로키도 읽고요. 이들은 저와 공부의 궤적도 비슷하고 대중문화의 소비 패턴도 비슷해서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이 중 한 권을 추천하라면 가장 최근에 읽은 고병권 선생님의 <다시 자본을 읽자>를 추천합니다. 공부의 양도 엄청난데 글도 아름답습니다. 추천합니다."(2022.1007)


난 고병권 작가의 친필 싸인이 들어간 책, 두 권을 갖고 있다. 하나는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다른 하나는 <자본을 다시 읽자.>이다. 후자는 어제 딸과 함께 아내가 일하는 병원으로 이동하는 길에 읽으려고 펼친 후에나 알았다. 어떤 미친놈이 저자 싸인본을 중고서점에 팔았는지 몰라도, 덕분에 이런 횡재를, 두 권씩이나 얻었다. (2022.0824)


이 글은 고병권 선생님과 인스타그램 맞팔을 하게 된 것을 기념하여, 또 마침 <다시 자본을 읽자>의 리뷰가 브런치에 없어서, 이렇게 흩어진 글과 사진을 모아 엮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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