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번 말했듯이, 목요일이 가장 힘든 날이다. 여기에 자유형 주간이 겹치면 다른 영법의 목요일보다 운동량은 더 많아진다. 차라리 접영 주간의 목요일이 편할 정도다. 8월 첫째 주의 목요일도 그랬다. 휴가 기간이라 많이들 안 왔다. 그래도 1번과 2번이 왔고, 4, 5, 6, 7을 돌아가며 하는 네 명이 왔다. 3번인 날렵한 아줌마는 골프를 하다 어깨를 다쳐 요즘 재활(?) 중이다. 그렇게 수영을 오래 하면서도 멀쩡하던 어깨가 골프를 하다 다치다니...
사람도 별로 없는 데 템포도 빨랐다. 자유형 백 미터 세 개로 이뤄진 라운드를 할 때도, 자유형 50미터 여섯 개로 이뤄진 라운드를 할 때도, 6번 주자를 맡았던 - 수요일 핀 수영을 하는 날 2번을 맡은 덕분에 뒷 번에 자연스럽게 섰다. - 내가 들어오기 전에 출발을 했다. 난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6번 주자의 자유형 라운드라면 세트 사이 갭이 짧아도 문제없었다.
그러나 올봄부터 우리 반에 합류한 사람은 1번의 빠른 템포에 종종 당황하곤 한다. 이 날도 역시 그랬다. 3번을 맡았던 평영을 잘하는 젊은 엄마로 보이는(?) 4번과 사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덩치 좋은 5번은 1번이 출발할 때마다 서로 마주 보며 한숨을 쉬거나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 앞 주자인, 앞선 글에서 언급한 스트로크가 정확하지 않아서 발차기로만 가려하는, 그래서 더 많은 에너지를 써서 빨리 지치곤 하는 아가씨도 힘든 내색을 했다. 그러나 1번은 운동 시간이 끝날 때까지 템포를 늦추지 않았고 2번 주자도 이에 호응했다. 당연히 나도 불만 없이 따랐다.
적응과 배려, 그리고 이데올로기
모든 수영장의 모든 반, 특히 중급반, 혹은 수영장에 따라 교정반으로 불리는 레벨 이상의 레인에선 늘 같은 논쟁과 시비가 인다. 맨 뒷사람에게 속도와 템포를 맞출 것이냐, 아니면 1번에게 그 템포와 속도를 일임할 것이냐. 물론 우리 수영장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수영장의 대부분의 레인에선 전자를 선택할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거니까. 그러나 종종, 우리 반 같은 경우가 있다. 함께 오래 수영한 사람들이 함께 실력이 늘어서 템포와 속도가 굳어진 탓에 새로 합류한 사람들이 그 템포와 속도에 적응해야만 하는 레인의 경우가.
이 논쟁을 생각하면 유시민 작가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예전, 고 노무현 대통령이 야인이던 시절에 당원들과 함께 이동하기 위해 대절 버스를 탄 적이 있었는데, 이때, 노무현 대통령이 유시민 작가에게 만석인 버스를 예로 들어 진보와 보수, 공산주의를 설명했다고 한다. 공산주의는 누군가 버스 안에서 혁명(?)을 일으켜 운전자를 갈아치우고 직접 내가 몰겠다고 나서는 것이다. 행선지도, 속도도 바뀐 운전자가 정하니, 당연히 버스 안에 사람들도 입 다물고 따라가야 한다. 반면, 진보는 버스에 타지 못한 사람들을 생각한다. “야, 좀 안으로 들어가 봐라. 밖에 있는 사람들도 같이 가자.”하면서 안에 있는 사람들을 설득한다. 불편하지만 더 많은 사람과 갈 수 있다.
보수는, “어이, 기사 양반, 이제 갑시다. 좁아 죽겠는데 뭘 더 태워. 지금 딱 좋아. 이대로 갑시다.”하고 말하는 이들이다. 주어진 조건을 유지하고 그 조건 속에서 만족을 누리는 사람들이 그 조건을 유지하려는 동력이 체제를 유지하고 움직인다. 수영장에도 이런 해석이 적용 가능할까? 진보적인 레인, 공산주의적 레인, 보수적인 레인....
정치적이지 않은 문제
미안하지만 수영장의 레인에 위와 같은 정치적 해석이 들어올 자리는 없다. 이건 일종의 수준의 논리가 적용된다. 간단하면서도 피부에 와닿는 예를 들어보자. 필자는 지방의 대학을 나와 서울의 대학에서 석사를 한 뒤, 한참 뒤에 이 전공으로는 가장 유명하고 수준이 높은 대학에서 박사 공부를 했다. 워낙 나이를 먹고 들어간 데다가 공부의 양과 질이 다른 동일 학과의 대학원과는 현격한 차이-학회에 가보면 절감하게 된다. -가 나서 따라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학과장에게 가서 공부의 양을 좀 줄여주고 그 수준을 낮춰달라고 얘기를... 했을까? 당연히 안 했다. 더 많이 공부하고 더 집중해서 했다. 심지어 혼자서 대입 공부를 하던 시절에도 다니지 않았던 공공도서관을 내 집 드나들 듯 다니면서 공부를 했다.
그런데 만약, 내가 그런 요구를 했고, 학교 측이 그런 내 요구를 들어줬다면, 그래서 전체 대학원의 공부 양이 줄어들고, 그 수준이 낮아졌다면 어떻게 됐을까? 교육 수준은 떨어졌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 학회에서 그 실력과 밑천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 떨어진 실력을 숨길 수가 없다. 결국 서서히 명성이 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조만간 거의 대부분의 대학들이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
학생 수가 줄어들고, 그 줄어든 학생 중에서 대학원에 진학하는 학생들이 더 줄어들면 입학의 문턱은 낮아질 테고 공부의 수준과 양도 가볍게 될 것이다. 특히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대학원은 이런 흐름이 더 빨리 올지도 모르겠다. 만약 이렇게 되면 대학들은 사람과 돈을 얻는 대신 그 수준과 명성을 잃게 될 것이다. 물론 잃을 명성 같은 것이 없는 대학들은 어떤 학생이든, 어느 나라의 학생이든 와주기만 해도 감사해서 허겁지겁 받아들이겠지만.
결국 아주 우수한 몇 개의 대학과 대학원만 남게 되고 우수한 학생들은 그런 곳에 몰리게 되고 그 우수한 대학들은 더 특별하고 독보적이게 될 것이다. 그야말로 파레토의 2대 8 법칙보다 더 무서운, 인재의 양극화가 이뤄질 것이다.
사실 회사도 마찬가지다. 내가 그나마 좀 아는 분야인 고객사인 조선과 중공업 분야를 예로 들어보자. 작은 회사의 우수한 직원은 수평으로 이직을 하지 않고 수직으로, 그 업계에서 더 높은 위상을 가진 기업으로 이동한다. 직원 수는 물론이고 수주액도 차원이 다른 회사로 간다. 당연히 높은 직급과 연봉이 보장된다. 그러나 막상 일을 하려고 하면 버거울 때가 있다. 선박 블록, 즉 대형 선박의 일부분을 제작하던 회사에서 선박 전체를 설계하고 완성을 책임지는 기업으로 옮기면 그 일의 질적/양적 차이가 더 체감될 것이다. 그렇다고 경력직에게 적응의 시간을 줄 리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나라 모든 해안에 있는 조선/중공업 기업들은 글로벌한 경쟁 상황에, 좋든 싫든,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말려들어 있기 때문이다. 멈칫 거리는 순간 선박 블록의 발주는 다른 곳으로 가는 상황인 것이다.
기회, 과정, 결과
기회의 평등과 과정의 평등, 결과의 평등은 다르다. 기회는 원한다면 누구에게나 주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이 말도 틀리다. 어떤 기회는 준비된 사람,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주어질 때가 많다. 아니 대부분의 기회가 그렇다. 살면서도 그런 걸 체감했지만 아이를 키우면서 더 체감한다. 성적도, 월반도, 영재 교실에 들어가는 것도 다 준비를 하고 시험을 봐야 기회가 주어졌다. 모든 초등학생에게 기회는 있지만 시험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만 기회가 주어진다.
설령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기회라 할지라도 과정이 다를 수 있다. 과정 속에서 테스트가 지속되기 때문이다. 그 테스트에 따라 반이 갈리고 그에 따라 교육의 질과 양이 달라진다. 같은 돈을 내고 학교와 학원을 다녀도 과정에 얼마나, 어떻게 참여했는지에 따라 그 과정, 그러니까 가는 길이 갈리게 된다.
가는 길이 갈리게 되면 당연히 결과도 달라진다. 각자가 같은 시간을, 같은 공간에서 보내지만 배우는 게 다르면 결과도 다른 걸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슬프고, 약간은 무섭지만 내가 살면서 받아들인 교훈이고 아이를 키우면서 재차 뼈저리게 느낀 교훈이다.
나에게 맞춰달라
종종, 이 모든 걸 공평하게 해 달라는 사람들이 있다. 수영장의 예를 들기 전에 아주 유명한 사례 하나를 들어보겠다. 충남 아산의 삼성고등학교 사례다. 알다시피 삼성은 아산에 디스플레이 공장을 지었다. 당연히 임직원들도 아산으로 왔고 그 가족들도 함께 왔는데 자녀들이 다닐 학교가 부족했다. 없었다는 말이 적절하겠다. 당연히 학교를 더 지어달라고 했는데, 아산시는 예산이 없다고 거절했다. 돈도 많고 추진력도 좋은 삼성이 기다릴 리 없었을 테니, 당연히 학교를 지었다. 짓고 나서보니 삼성 직원들이 다니는 일종의 자립형 사립고가 되어 버렸다. 당연하게도 말이다.
그러자 지역 주민들과 소위 진보적이고 좌파적인 학부모와 시민단체가 기회의 균등을 요구하면서 지역의 학생도 받으라고 요구했다. 그 결과 삼성 직원 7, 일반 학생 3의 비율이 됐다. 여기서 끝났으면 좋았겠지만, 더 받으라고, 심지어 일반 사립고로 전환하라는 요구가 들어왔다. 삼성이 꼼짝도 하지 않자 시민단체는 소송을 걸었고, 알다시피 삼성과 학교 측이 이겼다. 소송비용은 어떻게 감당했는지 궁금하다.
자, 수영장으로 돌아가서 이 논쟁을 간단히 매듭지어 보자. 핵심은 선택의 문제다. 이번 달, 우리 반에 새로 합류한 청년이 있었다. 8월 첫 주, 월요일과 화요일, 우리 반의 강사는 휴가였는데, 마침 그 월요일에 그 청년이 왔다. 아직 서른 살이 안 되어 보였고 다른 힘든 운동을 한 적이 없었는지, 최소한 야외에서 하는 운동을 한 적이 없었는지, 근육도 없었고 피부도 희었다. 그는 풀 밖에서 중급반의 여자 강사와 잠시 대화를 했다. 추정컨대, 다른 시간 중급반에서 왔거나 다른 곳에서 영법을 다한 뒤 고급반에 신청했는데 어떤 레인에 들어가면 되는지 물었던 모양이다. 그 여자 강사는 우리 레인을 추천했고 그날, 그는 우리와 함께 수영을 했다.
엄청난 차이가 났다. 자유형 50미터, 여섯 개의 세트를 할 때, 매 랩마다 내가 들어와 뒤를 돌아보면 그제야 그는 턴을 해서 돌아오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1번은 그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5번 주자가 들어오면 출발했다. 앞에 들어온 사람들의 몸이 식기 전, 열기가 식기 전 다음 랩을 출발한 의무가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화요일에 작업실에 나갔다가, 수요일에 수영장에 가보니, 그 청년은 고급 B반으로 가 있었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다시 말하지만, 선택의 문제다. 평등의 문제가 아니다. 내 능력 이상의 일이나 학업, 또는 조직을 경험할 때, 그래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버거운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 앞엔 두 가지 선택이 있다. 내가 편하도록 수준을 낮춰달라고, 나에게 맞도록, 현재의 내 능력으로 소화해 낼 수 있도록 일의 속도를 늦추고 업무의 난이도를 낮춰달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과거의 경험을 잊고, 현재의 조직과 직무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전력을 다할 수도 있다. 이건 선악의 문제도, 능력과 무능력의 문제도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선택의 문제다.
스트레스를 받기 싫으면 그만두고 편한 곳, 편한 부서, 수영장이라면 편한 레인으로 바꾸면 된다. 계속하고 싶으면 노력을 해서 본인의 수준을 올리면 된다. 그런데 바꾸지도 않고, 노력도 하기 싫은 사람이 회사와 학교와 수영장 클래스의 수준을 자신에게 맞추라고 하는 건 무리한 요구다. 세상의 모든 수준을, 자신을 힘들게 하는 난이도를 자신에 맞게 조절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일종의 사적인 파시즘이다. 그 난이도와 강도에 적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시간을 바친 사람들에 대한 모욕이기도 하다.
앞서, 다른 글에서 말했듯, 우리 반은 우리 수영장에서 가장 수영을 잘하고 체력도 좋은 반으로 소문이 나 있다. 그건 강사들도 인정하는 바다. 이 명성이 악명인지, 유명인지는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다를 뿐, 그 명성과 평가는 동일하다. 단지 받아들이는 이의 해석이 다를 뿐이다. 악명이라고 여겨지면 비난할 필요 없이 그저 떠나면 된다. 중이 절을 떠나듯이 말이다.
1번을 비롯한 앞의 주자들은 이 반의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성실하게 수영을 했고 수영 기술을 익혔다. 물론 그 명성에 대한 인식도, 그 명성을 유지하겠다는 욕심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운동을 해 왔기 때문에 그 명성이 얻어졌고, 현재도 그렇게 하기 때문에 그 명성이 유지되고 있다. 이 명성을 어느 한 사람의 요구로 훼손시킬 수 있을까? 수영 실력이 떨어지지만 고급 A반에서 계속 수영을 하고 싶기에, 내 실력과 체력에 맞게 수영을 해달라는 누군가의 요구를 들어줘야만 할까? <정의란 무엇인가?>를 잘 못 읽은 사람들이 종종 이런 요구를 당연시한다. 같은 돈을 냈지만, 체력과 실력이 다른 사람들이다. 문제는 선택이지 평등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