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장에서 건진 생각 72
8월 중순 이후, 1번은 듬성듬성 출석했다. 언제나 10분 정도 늦게 들어온 그였기에 강습이 시작된 뒤에도 그의 등장을 당연시했었다. 그러나 8월 셋째 주에는 며칠 빠졌고 넷째 주에는 다 빠졌다. 셋째 주의 어느 날, 언제나 그랬듯 늦게 들어온 그는 웜업의 후반부를 함께 한 뒤 레인을 한 바퀴 걷는 휴식 시간 동안 소식 하나를 전했다. 반을 바꾼다는 것이었다. 네 시 반으로 말이다.
물론 누구나 시간을 바꿀 수 있다. 심지어 수영을 그만둘 수도 있다. 대체로 시간을 바꾸고 수영을 그만두는 사람의 대부분은 말없이 사라진다. 남은 사람들은 잠시 어리둥절하지만 며칠 지나면 강사나 다른 회원을 통해 그 사람의 거취를 파악하게 된다. 그만뒀거나 바꿨거나.
1번은 자신의 이동을 미리 말해줬다. 우리가 그를 기다린다는 걸 그도 알기 때문이다. 9월의 첫날부터 그를 기다릴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그는 미리 말해주기로 마음먹었을 것이다. 물론 2번 아저씨에게만 넌지시 얘기를 꺼냈고 그걸 뒤 따라 걷던 다른 아줌마 회원이 들어서 나를 비롯한 모두에게 전해졌지만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누구나 시간을 바꿀 수 있고 수영을 그만둘 수 있다. 그러나 1번의 공백은 남다르다. 1번은 “누구나”가 아니다. 그는 우리 반의 수준을 만든 사람이고 유지해 온 사람이다. 그는 고급 A반 회원들이 결국엔 다다라야 할 수준을 몸소 보여줬다. 나를 비롯한 많은 회원들이 그의 속도와 체력을 욕하면서도 따라잡으려 했다. 그런 그가 네 시 반으로 바꾸는 것이다.
물론 그가 원해서 가는 건 아니다. 발령으로 인해 근무시간이 조정됐고 그래서 부득이하게 계속 수영을 하기 위해서는 반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의 직업을 난 모른다. 물론 그도 내 직업을 모른다. 평소 그의 옷차림과 발령과 근무 시간 이동이라는 단어를 조합하여 추측해 보면 그는 아마도 항만에서 일하지 않을까? 24시간 현장을 돌리기 위해 3교대나 4 교대로 인력을 운영하는 현장은 생각보다 흔하지 않다.
울산에 있는 자동차 공장이나 에너지 관련 기업들이 그런 현장들이고, 공항도 그런 직장 중 하나지만 김해공항은 열한 시인가, 열두 시면 문을 닫는다. 부산에 있는 현장 중에서 고르라면 아마 항만이지 않을까? 세계 각지에서 들어오는 대형 화물선이 접안하고 그 화물을 싣고 내리는 항만엔 낮과 밤이 있어선 안될 테니 말이다. 게다가 내가 사는 지역 인근엔 항만이 몇 개 있고 말이다.
내가 농담처럼 한마디 했다. “혼자 가면 심심할 텐데, 따라갈까요?”, 그는 싱긋 웃어 보였다. 시간대를 바꾸고 반을 바꾸는 것이 얼마나 큰일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네 시 반의 실력도 확 끌어올려보죠. 뭐.”하고 그는 별일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2번 아저씨와 나는 잠시 마주 봤다.
샤워를 한 뒤 물기를 닦아내며 2번 아저씨와 잠시 대화를 했다. 1번의 공백에 대한 걱정을 나눴다. 2번 아저씨가 1번을 이어받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그러나 2번 아저씨는, 이 역시 추측이지만, 나보다 몇 살은 나이가 많은, 우리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남자 회원이기에 힘에 부칠 게 뻔했다. 일주일 내내 1번을 도맡아 하는 건 무리가 있었다. 결국 핀 수영을 하는 수요일엔 내가 1번을 맡기로 했다.
또 서로의 몸 상태에 따라서 나와 최근 새로 합류한 덩치 좋은 4번이 번갈아 1번을 맡기로 했다. 2번 아저씨가 어디 여행을 가거나 아프거나 명절에 고향이라도 가면 어차피 우리 중 누군가가 맡아야만 했다. 결국 1번 혼자 감당하던 짐을 나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생각보다 1번은 큰 짐을 지고 그 짐을 감당하기 위해 나름 전력을 다했는지도 모른다.
손흥민 선수가 주장과 관련하여 한 인터뷰 두 개가 생각난다. 하나는 주장의 본보기로 삼는 사람에 관한 질문이었다. 이 질문에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박지성을 뽑았다. 다른 질문은 영국 기자가 던졌는데, EPL, 즉 영국 프로축구 리그 팀의 역대 주장 중 가장 인상 깊은 주장이 누구인지 물었다. 손흥민 선수는 잠시 멈칫하더니 로이 킨을 선택했다. 의외였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박지성과 로이 킨이 정반대의 캐릭터라는 걸 알 것이다. 박지성에 대해선 누구나 다 알 테니 로이 킨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말해보자. 로이 킨은 아일랜드 사람으로 내 또래다. 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주장이었다. 박지성이 오기 직전의 일이다. 그곳에서의 커리어라면, 아마 일 년쯤 겹치지 않을까? 여하간 그는 엄청난 카리스마와 불같은 성격으로 선수단을 휘어잡았고 상대편을 공포에 떨게 했다. 캐릭터 상으로 그와 비교될 수 있는, 견줄 수 있는 선수가 있다면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정도 아닐까? 손흥민 선수는 이렇게 상반된 캐릭터를 가진 두 선수를 주장의 대표적 캐릭터로 뽑은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두 사람에겐 공통점이 있다. 누구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필드에 열한 명이 뛰고 주장도 그중 한 명이지만 주장은 언제나 한 명 이상의 존재감을 안고 있다. 박지성이 국가대표 주장일 때, 그가 필드 위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다른 나라, 특히 아시아의 선수들은 위압감을 느꼈다. 필드 밖에서는 선수단을 하나로 묶었고 함께 이뤄내야 할 목표를 제시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지금 뭘 해야만 하는지 먼저 보여줬다.
게다가 그들은 실력도 유지해야 했다. 주전이 아닌 선수가, 베스트 11에 들지 못하는 선수가 주장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부상이 아니라면 언제나 필드 위에 서 있어야 한다. 그 라인업에 들기 위해, 누구나 그렇듯 주장도 경쟁해야 한다. 주장이어서 필드 위에 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연습하는 동안 실력으로 입증했기에 필드 위에 서는 것이며, 그 필드 위에 설 수 있는 선수 중 모두가 의지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인 그가 주장을 하는 것이다.
결국 책임감이 있다고, 인격이 훌륭하다고 주장이 되는 것이 아니다. 실력까지 갖춰야 주장이 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사회에서 만나는 모든 리더들도 같은 조건을 갖춘 사람들 아닐까? 책임감과 인격과 실력을 두루 겸비한 사람만이 리더가 되는 건 아닐까?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사람이 들어온 자리는 티가 안 나지만 나간 자리는 티가 난다는 것이다. 들어옴의 채움보다 나감의 공백이 더 크다는 말이다. 나감의 아쉬움이 들어옴의 반가움보다 더 크다는 말이다. 그런가? 살아보니, 꼭 그런 건 아니다. 한 사람이 들어옴으로 인해 분위기가 바뀌기도 하고 팀이 바뀌기도 한다. 반대로 한 사람이 나가고 나서 분위기가 더 살아나고 팀이 잘 되고 더 나가는 조직도 있다. 전자는 에너지이자 비타민 같은 사람이고 후자는 암이자 걸림돌 같은 사람이다.
그러니 어떤 사람의 예상되는 공백이 걱정이 된다면 그 사람은 전자, 즉 에너지이자 비타민 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필드 위에서 한 명 이상의 존재감을 발휘하는, 그래야만 하는 주장 같은 사람이었다는 말이다. 그 사람의 공백은 발생한 뒤에야 절감하게 된다. 물론 수영장의 우리 반처럼 짐작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9월부터는 강사 하나가 그만둔다. 앞서 글에서 여러 번 언급한 선수 출신 강사가 대학 졸업을 마무리하기 위해 학교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의 공백도 아주 클 것이다. 그만큼 섬세하면서도 정성스럽게 자유형과 접영을 가르칠 수 있는 강사는 흔치 않으니 말이다. 우리는 종종 사람의 능력은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도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자영업을 해본 사람이라면, 나처럼 개별 능력을 가진 사람이 한데 모여 일을 하는 직종에 있는 사람이라면 잘 알 것이다. 직무를 대체하는 것과 능력을 대체하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라는 걸 말이다.
카메라를 만질 줄 아는 사람은 많지만 그 카메라로 어느 수준 이상의 영상을 만들어내는 촬영 감독은 몇 안 된다. 우리는 할 수 있는 사람과 잘하는 사람, 더 나아가 독보적인 사람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단계가 의미하는 것은 간단하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단계가 높아질수록 그 사람의 존재를 대체하는 것이 어렵다는 걸 의미한다. 아니,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우리 반은 이제 9월부터 전설의 1번 없이 수영을 한다. 때로는 가혹할 정도로 빨랐고 숨 쉴 틈 없이 몰아쳤던, 그래서 함께 운동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실력과 체력이 올라갔던 그 1번 없이. 우리는 1번이 안 나오기 시작한 8월 마지막 주부터 그의 공백을 연습하고 있다. 사람 좋은 2번 아저씨의 리드 하에 말이다. 물론 그도 이제까지 해온 것이 있기에 1번 못지않게 타이트하다. 그는 1번의 숙제를 이어받았다.
그렇다. 남겨진 사람들에겐 숙제가 있다. 1번이 수고해서 만들어 놓은 반의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각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다른 반 사람들이 언젠간 합류해서 함께 운동하고 싶은 반으로 남기 위해, 그런 선망의 대상으로 남기 위해 각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다른 모든 조직도, 어쩌면 사람이 모여 만든 무리와 공동체도 같은 숙제를 해야만 한다. 소중한 누군가의 공백, 한 사람 이상의 공백, 그 공백을 받아들이며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남은 자들이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를 알고 실천해야 한다. 그렇게 물속의 세상과 물 밖의 세상이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