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을 담으며 함께 울다.
은채의 졸업식이 가까워 오자 저와 아내가 가장 궁금해 했던 건 답사를 누가 하는 가였습니다. 다른 부모님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전 은채가 한번쯤 모든 사람 앞에서 답사를 하는 경험을 해봤으면 했습니다. 아내나 저나 사람들 앞에 서도 긴장하지 않는 성격이라 은채도 답사를 무난히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 됐고요.
1월 셋째 주쯤 됐을까? 저와 아내는 은채에게 넌지시 물었습니다.
“답사는 누가한데?” 은채는 모른다고 했습니다. 아직 안 정해졌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한주쯤 지났을까, 설이 코앞이던 어느 날 은채를 데리러 갔더니 선생님이 은채가 답사를 하기로 했다고 말해줬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재미있습니다.
“은채가 와서 저한테 묻더라고요. 답사는 누가 하나요 하고요. 그래서 왜 하고 물었더니. 아빠가 궁금해 한 대요. 그래서 하고 싶냐고 물었더니 하고 싶데요. 그래서 네가 제일 먼저 물었고 하고 싶어 하니 너 하라고 했어요.”
은채의 평화반 선생님은 50대의 원감 선생님입니다.
은채가 여섯 살 때인 열매반 때부터 아이들을 맡아서 가르치셨죠. 그래서 은채의 성격도, 저와 아내의 직업도 제법 잘 아십니다. 아마도 이런저런 상황을 고려했을 때 은채가 충분히 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셨던 모양입니다.
정작 은채가 그걸 한다고 하자 전 은근히 긴장, 걱정이 됐습니다.
‘은채가 떨면 어떻게 하지? 하다가 울면 어떻게 하지? 울다가 어디까지 했는지 못 찾아서 중간에 멈추면 어떻게 하지?’ 온갖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설이 지나고 본격적인 졸업식 연습이 시작됐습니다.
초반엔 어린이집에서 진행됐고, 순서에 따라 은채의 답사 연습도 진행 됐죠.
은채는 설 이후 선생님이 건네준 답사 원고를 이 삼 일만에 다 외웠습니다. 전 혹시라도 다 외웠다고 자신만만해서 원고도 없이 할까봐 원래 그런 거 할 때는 원고를 보면서 하는 거라고 몇 번이나 말해 줬습니다. 자기도 안다고 하더군요. 선배들도 악보 보는 대에다 올려놓고 했다고 말이죠.
졸업식이 있는 주, 은채는 월, 화, 수, 삼일 연속 졸업식이 거행 될 한 교회의 강당에서 리허설을 했습니다. 그런데 화요일 날 데리러 갔더니 은채가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빠. 나 연습할 때 정말 펑펑 울었어.”
“어? 왜?”
“응. 선생님이 연습할 때 평화반 친구들이 연습을 정말 잘해서 자랑스럽다고 했는데 울음이 터졌어.”
나중에 건너 들으니 그야말로 폭풍 오열을 했다고 합니다. 졸업식은 목요일. 당장 내일 모레인데 그때도 이렇게 펑펑 울면 어쩌나, 하고 제 걱정은 더 커져 갔죠.
걱정은 기우였습니다. 은채는 조금 작은 듯 했지만 울지 않고 담담히 답사를 해 나갔습니다. 그날 자리 배치는 졸업생 전원이 무대 밑에 계단 형태로 손님과 동생들, 선생님들을 마주 보고 앉았습니다. 엄마, 아빠를 비롯한 가족들은 아이들의 감정 변화를 그야말로 라이브로 볼 수 있었죠.
은채는 졸업식 내내 앞에 앉은 담임선생님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습니다. 졸업식 전, 아이들에게 졸업 가운을 입히고 난 후 아이들이 입고 왔던 외투를 부모님을 찾아 나눠 줄 때부터 이미 선생님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기 때문이죠. 감정이 풍부한 딸은 그런 선생님과 눈을 마주치면 울지 않고는 배길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다행히도 큰 눈물 없이 졸업식은 순조롭게 진행됐습니다. 그러나 송사와 답사가 끝나고 부모님, 친구들, 선생님, 그리고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주는 편지를 순서대로 읽어주는 대목에서 장내가 그야말로 눈물바다가 됐습니다. 정말 아무리 기억을 뒤져 봐도 졸업식 가서 운 기억이 없는데 이날은 정말 눈물을 참느라고 목이 다 뻐근했습니다. 선생님께 감사 편지를 읽는 순서를 맡은 예아는 이 어린이집에 세 살 때 와서 무려 5년을 다녔습니다. 그러니 감정을 추스르는 게 쉽지 않았겠죠. 예아가 울먹이며 읽자 앞줄에 앉았던 여학생들의 울음이 터졌고 당연히 은채의 눈물보도 터졌습니다. 또 은채의 단짝이자 하필이면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서희의 눈물보도 터졌고 그 옆에 앉아 있던, 친구들 안아주기 좋아하던 예지의 눈물보도 터졌죠. 딸들이 우는데 엄마들이 참을 수 있나요. 엄마들의 눈시울도 금세 붉어졌고 옆에 앉았던 아내도 그 대열에 동참했습니다. 갱년기가 가까워서인지, 아니면 감성이 풍부해서인지, 그도 아니면 이날 유난히 몸이 안 좋아서인지 저도 눈물이 났죠.
졸업식의 마지막 순서는 강당을 대여해 준 교회의 담임 목사님의 기도였죠. 목사님은 기도를 하시기 전에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제가 애가 네 명입니다. 방금 전에도 졸업식에 갔다 왔죠. 그런데 요즘 졸업식에 가면 우는 애들이 없어요. 그런데 여기 와서 눈물을 봅니다. 기쁨도 보고요. 이걸 보니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얼마나 사랑으로 돌봐 주셨는지, 아이들도 얼마나 사랑을 받으며 어린이집을 다녔는지, 그리고 부모님들은 그걸 또 얼마나 잘 아시는지 알 것 같습니다.”
사연이 있는 곳에 눈물이 있습니다.
은채는 세 살 반쯤부터 지금은 없어진 작은 어린이집을 다녔습니다. 그때만 해도 낯을 가렸던 은채에게 단독 주택에서 작게 운영하는 어린이집이 맞을 것 같아서였죠. 그 어린이집은 집에서 걸어서 십오 분 정도 거리에 있었습니다. 전 매일 은채를 데려다주고 데려 왔습니다. 처음엔 유모차에 싣고, 조금 컸을 땐 뒤에서 미는 손잡이가 달린 세 발 자전거에 태워서 말이죠. 추울 땐 유모차와 세 발 자전거에 마치 오픈카의 커버를 씌우 듯 바람막이를 씌워서 데리고 갔고, 비올 때는 비를 막아주는 레인 커버를 씌워서 데리고 갔죠. 어린이집에서 데리고 올 때는 근처의 박물관이나 평화 공원, 조각 공원에 가서 같이 나무를 보고 꽃을 보고 새를 봤습니다. 은채가 처음 친구를 사귀는 것도 봤고, 친구가 가진 킥 보드를 사고 싶다고 처음으로 조르는 것도 봤죠. 그러나 일 년 반 정도 다니는 동안 은채는 그 작은 어린이집을 마칠 때까지 원장 선생님하고는 얘기도 하지 않았죠. 오직 담임선생님하고만 얘기를 하고요.
네 살 반까지 밖에 없는 그 어린이집을 졸업한 후, 은채를 한반에 20명 가까이 되는 규모가 큰 어린이집으로 옮길 때 걱정이 많았습니다. 적응은 잘 할지, 친구는 사귈 수 있을지, 주눅은 들지 않을지 말이죠. 걸어서 2,3분밖에 안 걸리는 가까운 어린이집을 그렇게 3년을 다녔습니다. 야외 체험도 많고 공연 체험도 많이 있는 어린이집 행사에 은채가 참여할 때마다 무사히 잘 다녀올 수 있을지, 물놀이하다가, 눈썰매를 타다가 다치지는 않을지 늘 걱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은채는 저에 이런 걱정을 그야말로 기우로 전락시키면서 몰라보게 자라줬습니다. 친구들은 점점 많아졌고, 담임선생님뿐만 아니라 모든 선생님과 친해졌습니다. 자기가 뭘 잘하는지 알게 됐고, 다른 친구들과 자신의 다른 점을 알게 되면서 자존감도 높아지고 사회성도 함께 커졌습니다. 특히 6살 때부터 졸업 때까지 함께 해주신 김미란 선생님 덕에 은채는 그야말로 만개를 했습니다. 목소리도 커졌고, 친구들과 언쟁도 심심치 않게 하게 되는 부산 가시내로 성장하게 됐죠.
어쩌면 그런 모든 과정들을 함께 했기에, 그런 변화의 시간들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기에 저에 눈물이 터져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은채의 마음을 성장시키고, 머리를 깨워주고, 감성의 지평과 마음을 넓혀준 어린이집과 그런 시간을 함께 해준 선생님에 대한 감사함과 함께, 그 성장의 변화를 매일매일 목격하는 흔치 않은 경험을 한 아빠의 공감의 눈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리허설을 하며 울었다고 했던 날. 전 은채에게 물었습니다.
“은채야. 졸업식 날, 너 답사할 때 네가 울면 아빠도 펑펑 울 것 같은데 어떡하지?”
그러자 은채가 말했습니다.
“아...울어도 되는데 너무 펑펑 울지는 마. 나도 좀 참을 거니까. 펑펑 울면 좀 부끄럽잖아. 아빠도 나도.”
부녀는 펑펑 울지 말자는 약속은 겨우 겨우 지켜냈지만 흐르는 눈물과 밀려오는 아쉬움은 막아낼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제 평생 가장 기억에 남는 졸업식이 아닐까요? 은채의 초등학교 입학식 때는 울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