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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라이프-한야 야나기하라

동해선에서 읽은 책 136

by 최영훈

먼저, 이 책을 2권까지 읽어낸 독자들에게 그야말로 심심한 위로의 말을 전한다. 이 책을 구매해서 읽은 독자들에게는 더욱더.


사실 베스트셀러, 특히 소설은 거의 읽지 않는다. 올 초 딸 덕분에 드나들게 된 도서관에서 사르트르의 소설과 희곡을 읽은 것이 가장 최근의 사례고 산문으로는 이성복과 신형철을 읽었다. 이 소설은 얼마 전 딸이 학교 도서관에서 1권을 대출해 온 것이다. 워낙에 마케팅을 적극적으로, 드라마틱하게 해 놓은 책이라 궁금하기도 했고 사전에 파악한 바로는 중학생이 읽을 만한 책은 아니라고 판단되어서 먼저 읽어보겠다고 했다. 미리 말한 건 대, 난 1권만 읽었고 2권은 내용을 강박적으로 잘 정리해 놓은 온라인 콘텐츠를 통해 파악했다. 첨언하자면, 내가 예상했던 대로 2권의 내용이 전개되어서 놀라기도 했고, 그걸 읽지 않았다는 사실에 약간 안도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이 소설은 흔하디 흔한 아침 드라마다. 신파다. 정신과 의사 앞에서 끝도 없이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은 남자의 녹취록과 닮았다. 명문대를 나와서 전문직을 갖고 있는 네 남자의 상처의 나열로 시작해서, 그중 가장 상처 많은 남자의 과거와 오늘이 집요하게 반복되는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쓰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놀라운 점

놀라운 건 이 긴 이야기 중에 건질만한 문장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나마 작가는 독자들을 유혹하기 위해 캐릭터의 성별이나 인종이나 외모에 대해서, 심지어 편지를 받는 상대가 누군지에 대해서 확실히 알려주지 않은 채 제법 오래 이야기를 끌고 가서 독자들이 그 무거운 책을 계속 손에 들게 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 점은 인정해줘야 한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두 번째 놀라운 건, 이렇게 긴 소설에 각주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다들 전문직이다 보니 생소한 예술가나 전문가를 소개하는 짧은 각주 몇 개 있는 것이 다다. 미국 동부의 명문대를 나오고 석사까지 한 친구들의 대화는 한 없이 가볍다. 미적분에 관한 이야기를 제외하면 학문적인 얘기도 거의 없다. 심지어 주인공이 미국의 법조인인데 케이스 인용도 없다. 상상해 보자. 건축가, 화가, 배우, 변호사는 친구 사이다. 이들의 친구들, 부모들, 지인들 역시 교수, 작가, 화가, 사업가, 법조인이다. 그런데 6백 페이지가 넘는 분량 동안 지적인 대화는 어느 저녁 식사 시간에 나눈 대화가 전부다.


실제로도 그럴까? 그러니까 미국의 전문직 남자들은 저렇게 정신 상태가 빈곤한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런 소설의 그런 마케팅이 통했는지도 모른다. 때문에 트럼프 같은 사람이 대통령이 됐겠지. 이 소설이 나온 십여 년 전, 미국의 독자들이 정말로 이 소설에 열광했다면 그 당시의 미국 사회와 독자들이 총체적인 자기 연민에 빠져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소설을 읽으면서 밤을 지새우진 않았겠지.


적나라함의 오용

적나라한 것이 문학의 지향점일 리 없다. 그랬다면 아우슈비츠와 홀로코스트를 다룬 소설과 영화가 그렇게 많이 나왔을 리 없다. 4.3이나 5.18과 같은 근현대사의 아픔을 다룬 작품이 그렇게 많이 나왔을 리 없다. 상처의 속살을 여과 없이 드러내어 전시하는 것은 포르노의 테크닉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리고 그 테크닉은 가장 쉽다. 사회 현상을 담아내는 다큐멘터리조차 적나라하지 않다. 노출 그 자체에 함몰되지 않는다.

적나라함은 말 그대로 가림 없는 드러냄이다. 적나라(赤裸裸)는 벗는다는 한자가 두 번 반복된다. 그야말로 은유 없이 가림 없이 거침없이 까발려 보여주는 사태를 적나라하다고 표현한다. 얼마 전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한 후보가 내지른 말과 그 말이 부른 사태는 적나라해서는 안 되는 시공간에서 그리하여서 벌어진 일이고, 더 나아가 적나라해서는 안 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그리하여서 벌어진 일이며, 더 나아가 적나라하게 말해서는 안 되는 일을 그리 표현해서 벌어진 일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 사태 앞에서 분노와 수치심을 느낀 것은 그것이 표현되어서는 안 되는 시공간에 그리됐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적나라하게 표현해서는 안 되는 것을 그리 표현해서 불편했던 것이다.


이 소설은 1권 후반부와 2권에서 이 적나라함을 몰아쳐 보여주는데, 적나라함을 문학의 가치라 여기는 이들에겐 충분히 감동을 줄만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아무리 상처가 깊고 어둠이 짙다고 해도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줄 필요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서서히, 은유적으로 전해지고, 그조차 아주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그렇다.

이 소설이 당시 맨부커상과 전미도서상 후보였다하여 찾아보니, 2015년 맨부커상은 말런 제임스라는 소설가의 <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로 밥 말리의 죽음을 다 각도로 분석하고 해석한 소설이었고, 2015년 전미도서상은 2013년에 퓰리쳐 상을 받은 애덤 존슨의 단편집 <Fortune Smiles>이었다. 참고로 애덤 존슨의 퓰리쳐상 수상작인 <고아원 원장의 아들>은 번역되어 출간됐다.


마지막으로, 신형철의 문장을 인용한다.

“이 소설을 읽으면 알게 된다. 인간의 뒷모습이 인생의 앞모습이라는 것을. 자신의 뒷모습을 볼 수 없는 인간은 타인의 뒷모습에서 인생의 얼굴을 보려 허둥대는 것이다.”, <해석되지 않는 뒷모습>,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PP.55~56.


딸에게 말했다. 사서 선생님한테, 학교 도서관에서 학생대출불가 도서로 지정하는 게 좋겠다고 건의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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