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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 폐허-정명섭, 설재인, 장아미, 김이환

동해선에서 읽은 책 140

by 최영훈

먼저 밝혀둘 것이 있다. 이 책은 내 책이 아니다. 얼마 전 인스타그램을 시작한 딸이 내 “꼬임”에 넘어가 서평단 응모를 하기 시작했는데, 몇 번의 탈락 이후 드디어 하나가 당첨되어서 받은 책이다. <아몬드>나 <완득이> 같은 성장 소설도 아니고 말랑말랑한 연애소설도 아니고 그렇다고 묵직하고 유명한 문학작품도 아닌 SF 미스터리 소설이라는 사실에 살짝 당황했다.


돌이켜보니 나 또한 십 대 시절에는 장르 소설을 열심히 읽었고 심지어 서른이 넘어서도 추리와 공포, 미스터리 소설을 자주 읽었다. 그러니 딸이 이런 소설을 읽는 것은 어찌 보면 자기만의 독서 세계의 구축, 그 여정에서 거쳐야 할 하나의 관문 아닌가 싶다. 덕분에 나도 오랜만에 SF 미스터리를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딸이 얼마나 걸리겠냐고 물었다. 주말이면 다 읽을 것 같다고 했다. 서너 시간 만에 다 읽을 것 같다. 이 또한 장르물의 매력 아니겠나. 킬링 타임.


이 책은 앤솔로지다. 앞에 거명한 네 작가의 소설 하나씩을 받아 총 네 편의 소설을 담았다. Yes24의 크레마에서 인기 연재작이었다고 한다. 미안하게도 난 이들의 이름도, 크레마도 처음 들어 봤다. 하여 아무런 편견 없이 사전 지식 없이 책을 펼쳐 들었다.


먼저, 간단하게 각 소설의 내용을 유명한 영화에 빗대어 소개하면, 정명섭 작가의 <헤븐>은 <아이로봇>을 연상시킨다. 완벽한 도시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추적하는 고독한 조사원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렇다. 여기에 신약 개발과 두 정치 체계의 대립이라는 요소가 재미를 더한다.


<재잇은 실수한다>는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이다. 얼핏 <AㆍI>의 전반부를 연상시키지만 그보다 훨씬 더 철학적이고 인간 본성에 더 접근하고 있다. 완벽한 인간, 인간미를 갖춘 사람이기 위한 덕목으로 연령대에 맞는 실수가 있어야 하고, 이런 이유로 인공적으로 출산/양육된 아이들에게 적절한 실수를 교육시킨다는 설정이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아주 작은 속삭임>은 전형적인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이다. 최후의 생존자들이 형성한 공동체가 다른 공동체를 찾기 위해 한 사람을 떠나보낸다는 설정은 <매드맥스>, <월드워 Z>, <28일 후>, <일라이>와 같은 영화를 연상시켰다. 또 주인공이 폐허가 된 도시에서 고독한 사투를 벌이는 부분은 <나는 전설이다>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화성의 폐허>도 상당히 매력적인 작품이다. 고대 문명과의 시공간의 뛰어넘는 조우를 다뤘던 <스타게이트>도 떠올리게 했고, 인류의 기원에 대한 심오한 질문을 던졌던 <프로메테우스>도 떠올랐다.


이 소설들의 근원은 근본적으로 인류의 역사에서 반복되는 오류와 실수, 그 실수의 후유증이다. 많은 SF 영화와 공포 영화가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기술 발달, 과잉 소비, 극단적 이기성과 위선적인 이타성, 미지와 마주할 때 발현되는 막연한 두려움과 자기 문화/민족/국가 중심적인 자기 우월감 등이 대표적이다. 소설은 같은 장르의 대중문화 콘텐츠들처럼 이 모든 오류와 실수, 그 후유증을 감당하는 현 존재들의 분투와 함께 그것의 극복과 새로운 미래의 가능성도 함께 모색한다. 물론 그 극복과 가능성은 다른 콘텐츠처럼 연약하고 희박하다는 것도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끝으로, 꽤 오래전, 밀리언셀러 클럽의 한국공포문학 단편선과 한국추리 스릴러 단편선을 통해 확인했던 한국 장르 소설의 힘이 SF 장르에서도 유효함을 확인할 수 있어, 한 때 장르 소설의 팬이었던 한 사람으로 묘한 뿌듯함을 느꼈다. OTT와 유튜브에 장르 콘텐츠가 넘쳐나는 요즘, 그 콘텐츠들의 뿌리에 이런 소설과 작가들이 있음을, 콘텐츠의 생명력과 힘과 상품성이 유지되고 높아지기에 이런 작가들의 존재가 더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새삼 재인식하게 됐다.


사족

서평단을 모집하는 출판사들에게 한마디 남기자면, 혹시라도 @eunologue_ 라는 인스타그램 아이디로 신청하는 이가 있다면 신경 써서 봐주시라. 그 친구가 되면 덤으로, 이렇게 진지하게 서평을 쓰는 그 아빠도 따라가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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