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시작 4. 존재의 형성, 세계의 확장

아빠 품에서 시작하는 문해력 수업 05

by 최영훈
“언어는 구획된 성역, 다시 말해 존재의 집이다.”, 마르틴 하이데거, 「숲길」, P. 454.
“언어는 존재의 집이기에, 우리는 언제나 이 집을 통과함으로써 존재자에 이르게 된다.”, P. 455.


언어 : 나와 세계로 열린 창

우리는 지난 글에서 대화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타자라는 텍스트에 집중하고 그 텍스트를 독해하여 자기 것으로 만든 뒤 다시 자기 언어로 변용하여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 형성된다고 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세상에 책이 나오기 전 모든 이야기는 구전되었습니다. 무리 중 가장 기억력이 좋은 사람은 아마 가족과 부족의 역사를 기억한 뒤 후세에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을 겁니다. 영화 <더 기버 : 기억전달자>는 이 추측에 대한 은유라고 볼 수 있죠.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문제가 이어집니다. 독해를 위해서도, 기억과 전달을 위해서도 일정 수준의 언어 능력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더 냉정하게 말하면 언어의 능력에 따라 독해, 기억, 전달 능력이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얼핏 이해가 안 갈 수도 있습니다. 상황이나 사람, 사건이라는 텍스트를 수용하고 해석하는데 언어는 크게 필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기억을 위해서도, 또 전달을 위해서도 언어 능력이 중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이데거는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자 세계 속에서 나의 존재와 가치를 설정하는 도구라고 합니다. 줄여 말하면 언어는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도구이자 내가 만들어 나갈 세계의 부품이며 타자와 세계로 가는 문입니다. 언어가 없이는 홀로인 나는 물론이고 세계 속의 나도 위치 지울 수 없으며, 타자와의 소통도 불가능합니다. 결국, 문해력은 근본적으로 나라는 존재의 형성, 세계의 확장, 그 양자의 성장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존재의 성장

과거, 공부한 것들 때문인지, 직업 때문인지 저는 은채가 세상을 수용하고 이해해 나가는 과정을 상당히 흥미롭게 지켜봤습니다. 한글을 배운 뒤 책의 단계를 넓혀가고 높여가는 과정 역시 흥미롭게 지켜봤죠. 맞습니다. 그건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었습니다. 분명 저도 겪었을 과정이었지만 제 머릿속에 그 과정에 대한 기억이 없었기에 어쩌면 나도 저런 과정을 겪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또 저 같은 경우엔 십 대 이후, 현재 저의 문화적 취향을 구성하고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제법 힘들고 고통스럽게 혼자 터득하고 학습했기에 안정된 가정에서 자연스럽게 그 과정을 밟아가는 딸을 보는 기쁨이 남달랐습니다.


딸의 언어 능력은 3, 4학년 때 이미, 사소한 만화 영화 제목 하나 갖고도 아빠와 아주 진지한 토론을 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습니다. 뉴스 속 정치인의 말을 듣고 그 행간의 미묘함을 눈치채어 그 진정한 속내가 무엇인지 아빠에게 물어볼 정도가 됐죠. 그 때문인지, 자신의 글을 쓰는 데 있어서도 더 공을 들이고, 더 나은 단어를 찾기 위해 아랫입술을 깨무는 시간이 더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천천히 자신의 세계를 확장시켜 온 결과죠.


이 무렵, 재미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낙서 왕국과 얼추 네 명의 용사들>이라는, “짱구는 못 말려”의 극장판 제목을 두고 부녀가 토론을 했었죠. 당시에 써 놓은 글을 보니, 그 해 1월의 어느 아침에 딸이랑 TV를 보는 데 이 광고가 나왔던 모양입니다. 그때 무심결에 전, "얼추 네 명이 뭐야. 네 명 정도는 셀 수 있는데."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딸이 옆에서, "아니, 그게 아니라 대충 용사 같아 보이는 네 명을 얘기하는 거 아닐까?"하고 답했고요. 결국, 우리 둘의 토론은 이어졌습니다.


논쟁의 핵심은 “얼추”라는 부사가 “네 명”과 “용사” 중 어떤 명사를 꾸미고 있느냐 하는 것이었죠. 저에 주장은 네 명은 구분 가능한데 왜 네 명 앞에 쓸데없이 얼추를 붙였냐는 것이었고, 딸은 용사라고 하기엔 덜 떨어진 사람들이 용사랍시고 나섰으니 얼추 용사라고 불러준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만화 내용이 한 사람의 구실도 제대로 못 하는 사람 네 명이 모여 용사 노릇을 하는 것이라면 이 얼추는 딸이 생각한 방향으로, 제대로 쓰인 것이고, 만화 내용이 그렇지 않다면 얼추는 잘 못 쓰인 것이겠죠.


4학년 때, 은채에겐 언어적으로 다른 변화도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죠. 영어 관련 사교육은 받은 적이 없었던 은채는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 뒤 얼마 후부터 영어를 읽고 쓰고 말하는데 재미를 붙였습니다. 한 가지 에피소드가 생각나네요. 은채는 꽤 오랫동안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주산을 배웠는데, 그때마다 제가 동행했습니다. 영어를 배우고 나서 얼마 후,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주산을 마친 후, 음료수를 마시다가 소화전에 쓰인 영어 안내 문구를 무심히 읽고 있는 딸을 보며 가벼운 전율을 느꼈습니다. 단어를 모르고, 뜻을 몰라도 알파벳의 소리를 추적하여 단어의 소리를 유추하여 읽어냈죠. 그때 전, 한 인간의 세계는 이렇게 별안간 확장되어 버리는구나 싶었습니다.


세계의 확장 : 뽀로로에서 셜록 홈스까지

언어가 발달할수록, 그래서 자신의 세계가 확장될수록, 세상에 대한 해석 능력이 늘어가고 이에 따라 소비하는 콘텐츠와 텍스트의 구조와 복잡성도 증가합니다.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은채도 가족과의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어린이집 친구와 선생님의 이야기를 거쳐 더 넓은 학교라는 공간과 관계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들어 나갔습니다. 뽀로로라는 한정된 공간, 한정된 숫자의 캐릭터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여러 공간, 다수의 캐릭터가 만들어내는 복잡한 이야기 소비자로 성장해 간 것이죠.


우정과 화해, 공공질서를 잘 지키라는 뽀로로와 타요 등의 만화 내러티브는 딸에게 이야기의 알파벳, 세계의 첫 단서였습니다. 그것들을 통해 어린이집 이전에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사회적 상호 작용의 기본 도구를 습득했던 것 같습니다. 딸이 크면서 이야기의 복잡성은 증가했고 그 복잡성과 함께 딸이 신경 써야 할 감정들, 질서들, 규칙들, 상호작용의 대상도 늘어갔습니다.


이런 복잡성의 증가는 책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동화책에서 시작해서 최근의 어린이 소설로 이어지죠. 딸이 3, 4학년 때부터 눈에 띄게 책의 두께가 두꺼워졌습니다. 4학년 때부터는 해리포터 시리즈를 읽기 시작했죠. 그때는 종종 판타지와 담을 쌓고 사는 아빠에게 툭하면 이상한 주문을 걸곤 했습니다. 언젠가부터 엄마 곁에서 함께 드라마도 보기 시작했습니다. <도깨비>부터, 눈물을 글썽이며 보더니 <구미호>도, <여신 강림>도 같이 봤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어느 순간 과거의 만화와 그림 동화를 유치하게 생각하는 건 그만큼 성장했다는 증거입니다. 지적으로, 육체적으로, 감성적으로, 사회적으로 말이죠. 반대로 여전히 단순한 이야기, 내러티브, 일면적인 세계에 머물러 있다면 언어 수준 또한 그 세계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봐야 합니다. 성장이 정체되어 있는 것이고, 어쩌면 퇴행이라 볼 수 있습니다.


성장을 향한 욕심

언어 습득을 통해 자신의 텍스트와 콘텐츠 수용 및 해석 능력이 높아진다는 걸 느끼면, 더 높은 수준의 텍스트를 향한 욕심이 생깁니다. 이 또한 자연스러운 겁니다. 부모가 욕심내기 전에 이미 아이의 욕심이 앞서나갑니다. 은채도 그랬습니다. 은채는 두세 살 때부터 서재의 제 책을 탐냈습니다. 말을 제법 재잘거리게 됐을 무렵, 서재에 들어와 나중에 이 책들을 자기한테 달라고 몇 번이나 다짐받았습니다. 그때는 아주 먼 훗날의 일이라 여겨 생각 없이 오케이 했었습니다.


초등학교 들어가면서부터 애니메이션 <엉덩이 탐정>을 보기 시작하더니 탐정에 대해 궁금해했고 소설 속의 탐정 중 가장 멋진 탐정은 셜록 홈스라는 말에 아빠 서재에 꽂힌 셜록 홈스 전집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2학년 때 <에밀과 탐정>과 <수상한 바리스타와 사라진 금괴>를 읽은 후부터는 더 궁금해했죠. 결국 코난 도일의 <주황색 연구>를 빌려줬습니다.


며칠 후, 딸은 다 못 읽었다며 갖고 왔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눈물을 흘렸죠. 복잡한 눈물이었습니다. 책을 끝까지 못 읽어서 아빠를 실망시켰을지도 모른다는 자책감, 아직 이런 책은 쉽게 읽어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원망과 책망 등이 뒤 섞인 눈물이었죠. 괜찮다고 말해줬습니다. 다른 소설들을 버릴 때도 4,50 권의 재미있는 추리소설과 셜록 홈스 전집을 남겨 둔 건 다 너 때문이라고 말해줬습니다. 언젠간 이런 소설들을 너에게 물려준 뒤, 네가 읽어나갈 때 아빠도 다시 읽어가며 같은 소설로 얘기하고 싶어서 남겨뒀다고 말해줬죠. 그제야 딸은 눈물을 그쳤습니다. 책은 서재에 늘 있을 테고, 언젠가 때가 되면 자기도 읽을 수 있으리라는 안도감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당시 딸의 수준은 <시공 주니어>와 <13층 나무집 시리즈> 정도였습니다. 사라진 금괴나 물건을 찾는 정도의 이야기, 한 두 개의 단서로 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는 이야기, 내 이웃과 친구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이야기, 친구와 함께 모험을 하고 집과 현실로 돌아오는 이야기, 이런 이야기들이 현재 딸의 수준이었던 것이죠. 물론 <도깨비> 같은 드라마는 이야기의 복잡성만 놓고 보면 이런 소설들보다 훨씬 수준이 높습니다. 그러나 그건 드라마죠.


드라마의 이야기는 영상과 대사로 이어집니다. 장면 전환과 음악, 효과 등으로 이야기 전개와 그로 인해 발생한 감정의 성격과 농도까지 미리 알려주죠. 또 대부분의 드라마는 소위 클리셰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엄마 옆에서 몇 년간 드라마를 봐온 은채 같은 딸들이라면 당연히 엄마처럼 다음 장면과 이야기의 전개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늘 똑같은 내용인 일일 막장 드라마가 아니어도 가능하죠.


책은 다릅니다. 특히 추리소설은 다음 장을 예측할 수 없다는 데서 그 재미가 보장됩니다. 본격 추리소설에선 독자와 게임을 하죠. 책 곳곳에 단서를 흩어놓거나 불가능한 상황에서의 죽음을 제시하고 함께 문제를 풀어보자고 게임에 끌어들이기도 하고요. 저도 중학교에 접어들어서야 아가사 크리스티의 <구름 속의 죽음>이나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 <오리엔트 특급 살인>, 그리고 가스통 루루의 <노란 방의 비밀>, 존 딕슨 카의 <화형 법정> 등을 읽었습니다. 지금의 은채라면, 이제는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완성을 향한 열망

다 알고자 하는 욕망도 생깁니다. 어떤 분야에 대해 누구보다 더 깊이 알고자 하는 욕망도 생기죠. 이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라 봅니다. 은채 친구들 중에서도 이런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알고 싶은 욕심이 가득한 친구들 말이죠. 이런 욕망은 <Why> 시리즈 같은 것으로 촉발됩니다. 여기에 <신기한 스쿨버스>와 같은 시리즈물이 합세해서 그야말로 백과사전파 같은 지식의 총람에 대한 열망에 불이 붙습니다.


은채도 1학년 즈음부터 사전류와 도감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식물도감과 동물도감을 갖고 싶어 했죠. 식물도감은 저도 은채가 걷기 시작할 때부터 하나 갖고 싶었습니다. 은채가 이런저런 꽃과 나무의 이름을 물어볼 때마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았기 때문이었죠. 그나마 딸이 초등학교 들어가면서 구입한 스마트 폰 덕에 이미지 검색을 해서 말해주곤 했지만 학습의 모양새로는 영 아니다 싶어서 이 바람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원하는 정보를 찾는 게 쉬워진 세상에서 그 찾음의 과정과 시간 속에서 얻어지는 그 무엇의 결여를 체감했기 때문이죠.


결국 3학년을 코앞에 두고 중고 서점에 가서 보리 출판사에서 나온 <세밀화로 그린 어린이 식물도감>과 <세밀화로 그린 어린이 갯벌 도감>을 샀습니다. 전부터 사고 싶었던 책이었죠. 사고 보니, 당연히 아빠가 더 신이 났습니다. 그림들을 어찌나 실감 나게, 공들여 그려놨는지 감탄이 절로 나왔죠. 또 식물도감의 경우 과일, 곡물, 숲 등을 주제로 식물을 구분해 놔서 교육용으로 손색이 없었습니다. 당시, 함께 구매한 책도 아빠가 원하는지 딸이 원하는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맘에 들었던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어떤 보물이 있을까?>라는 책이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 서울 여행 중에 직접 보고 온 유물들을 중심으로 그 유물들의 역사적 배경과 발굴 에피소드를 담고 있죠. 예전에 읽었던 조유전 선생님의 <한국사 미스터리>의 어린이 버전 같다고나 할까요?


"글쓰기가 행복한 건 아닙니다. 존재한다는 행복감이 글쓰기에 매달려 있을 뿐이죠. 그건 약간 다른 이야기입니다.", 조르조 아감벤, <불과 글>, P213. (조르조 아감벤이 인용한 미셀 푸코, 말년의 인터뷰 중에서)

표현하는 주체, 세계의 재구성

전 딸에게 직접 한글을 가르쳤습니다. 그 이후, <받침 없는 동화책>으로 읽는 기쁨을 선사했죠. 좀 지나서 보니 은채에겐 읽는 기쁨만큼 글을 쓰는 기쁨도 큰 것 같았습니다. 학교에 들어가서 일기를 쓰는 걸 보면서 알았죠. 은채는 완전한 구조로 하나의 문장과 그 문장을 덧이어 하나의 문단을, 그 문단을 포개어 하나의 글을 완성하는 즐거움을 알아갔습니다.


앞서 인용한 미셸 푸코의 말을 응용해 말하면, 글을 “쓰는 일”이 행복하거나 즐겁지 않아도, 그것이 인생에 “행복감을 준다면” 글을 쓰는 것이 설령 고통스러워도 글을 쓸 수밖에 없다는 은채는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당시의 은채는 분명 일기를 쓰는 것은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님을 종종 고백하곤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저리 궁리해서 한 편의 완벽하고, 누구보다 긴 일기를 써내어 저에게 들이밀 때, 딸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고 득의양양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글쓰기 능력과 습관은 타고나거나 최소한 열 살 이전에 형성된다고 봅니다. 기사나 보고서, 논문 같은 실용적인 글쓰기는 자신이 속한 학회나 업계의 관습과 형식에 따라 쓰면 됩니다. 특히 논문 같은 경우는 선배 학자들의 논문을 보면서 따라 쓸 수 있죠. 물론 학자들 중에도 글쓰기의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대학원에서 한 2,3년 혼나면 그럭저럭 학회에서는 통과될 만한 글을 내놓게 됩니다. 업무 보고서나 공무원들의 과업지시서도 마찬가지죠. 그러나 저널리즘에서도 칼럼이나 심층 리포트 같은 경우엔 글쓰기 능력이 요구되고 이론을 기반으로 한 대중적 학술서적 또한 차원이 다른 글쓰기 능력이 요구되죠.


글로 표현하는 능력, 글쓰기 능력 또한 내재된 단어의 양과 언어 능력에 의존합니다. 앞서 서두에 말했듯, 하루 중 있었던 일을 잘 기억하여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에게 말로 생생히 전달하는 데에는 기억력과 함께 언어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죠. 우리가 흔히 “생생히 전달한다.”거나 “마치 영화를 보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라고 칭찬하거나, 소설에 대해 말하면서 마치 영화처럼 말한다는 표현을 하곤 하는 데, 이런 능력은 근본적으로 단어의 양과 언어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특히 어휘력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죠. 흔히들 표현력이라도 합니다.


이러한 개인의 어휘력과 표현력은 개인 안에 내재된 단어의 양에 비례합니다. 당연하죠. 즉 시중에 유통되는 사전이 한 언어에 쓰이는 거의 모든 단어를 모아놓은 것처럼, 한 개인의 사전 안엔 개인이 평소에 쓰는 언어가 들어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평소 말솜씨가 없거나 표현력이 부족한 사람은 사전의 두께가 현저히 얇다고 봐야 하죠.


내재된 사전의 중요성

단어의 부족은 세계의 수용과 해석의 불가능으로 이어집니다. 해석의 불가능함은 또 그 세계의 재구성, 그것의 불가능으로 이어지죠. 아무리 특이한 장면을 봐도, 희한한 사람을 봐도, 오늘 급식의 메뉴를 온전히 기억하고 그 맛이 인상적이었어도 그 장면과 사람과 메뉴와 인상을 표현할 단어가 내 안에 없다면 당연히 전달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반복되면 결국 무감, 무취한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이런 사람이 되는 걸 피하기 위해서는 결국 자신의 사전을 두껍게 만드는 훈련을 해야 하고, 그 사전으로 세상으로 읽고, 그 사전으로 읽어낸 것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알게 모르게 아이들은 이런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앞서 딸이 읽었던 이야기책들을 떠올려 보면 처음엔 동화책이었습니다. 글은 그저 그림을 거들 뿐이죠. 거기엔 이렇다 할 해석의 난이도가 없습니다. 글은 그림의 자막에 불과하죠. 그러다 조금 지나 읽은 앤디 그리피스의 <13층 나무집> 시리즈부터는 글의 비중이 높아집니다. <신기한 스쿨버스>도, <수학 유령> 시리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림이 글을 슬쩍 도우면서 그림으로 보여주는 대신 글로 표현된 것을 상상으로 메워보라고 합니다. <해리포터> 시리즈로 가면 그림은 아예 물러납니다. 첫 장에 호그와트 학교의 지도 한 장 딸랑 나옵니다. 그 뒤로 촘촘히 글들이 이어지죠.


언어 능력이 상승하고 사전이 두꺼워지면 스스로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림이 필요 없죠. 어쩌면 많은 전문가들이 학습 만화 독서는 독서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 일 겁니다. 글을 이미지로, 이미지를 글로 자유자재로 전환하여 내 것으로 만드는 능력의 향상을 가로막는 주범이니까요.


같은 이유로 게임도 전 안 좋다고 봅니다. 게임은 닫힌 세계입니다. 경우의 수가 있을 뿐이죠. 같은 세계의 반복은 언어의 빈곤을 부르고 이성과 감성의 성장을 저해합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그걸 바라지 않는 것이 게임의 세계죠. 그래서 게임만 하는 아이들은 소통의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과 사람은 예측할 수 없고 자신의 언어로는 다 해석할 수도, 소통할 수도 없기 때문이죠.


진화의 단계, 성장의 절차

가끔 저와 열몇 살 차이 나는 후배와 만날 때가 있습니다. 보통은 제가 사는 동네로 부르는데 가끔 후배가 좋은 곳이 있다며 강력 추천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약속 장소를 그리로 하자고 합니다. 그럼 잠시 후에 카톡이 옵니다. 온라인 지도가 첨부된 메시지가 오는 것이죠. 그걸 보면, 참 편한 세상이다 싶다가도 뭔가 결여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전 동그란 번호판, 그러니까 손가락을 넣어서 번호판을 돌려서 전화를 거는 전화기가 있던 시절에 유년기를 보냈고 이후 무선 호출기와 시티폰, 2G 폰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컴퓨터도 대학에 들어와서, 486을 처음 써봤고 플로피 디스크에 데이터를 저장해 봤으며 LP와 카세트테이프, CD를 거쳐 MP3 시대를 넘어왔죠.


그래서인지 음악과 책을 고르는 일에서, 그리고 약속 장소를 잡는 일에서도 아날로그적 방법만의 장점을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의 저의 문해력은 아주 긴 시간,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변환을 몸소 겪어내며 형성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날로그 시대에, 사고 싶은 책을 사기 위해 책의 정보가 전산화되어 있지도 않은 서점들을 배회하며 한 땀, 한 땀, 한 뼘 한 뼘 나라는 세계를 이어 넓히고 더 넓은 세계를 이해하면서 문해력이 단단해졌는지도 모릅니다.


불과 십몇 년 전만 해도 타인을 낯선 장소로 불러내기 위해서는 말로 설명해야 했습니다. 말이 부족하면 “약도”라는 것을 그려야 했죠. 그곳의 주요 도로를 그리고 요즘 말로 랜드 마크인 건물을 그려 넣은 뒤 그 길과 건물로부터 우리가 만나야 할 장소가 어느 만큼 떨어져 있고 몇 번째 길과 골목 뒤, 혹은 앞이나 옆에 있는지 그려 넣었죠. 이것이 바로 세계의 인식이고 그 인식의 표현 아니면 뭘까요. 우리는 그걸 아주 자연스럽게 익혀 왔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린 이 발전된 세계를 살면서 그 능력의 일부를, 발전의 기회 하나를 상실한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문해력은 결국, 다시 말하지만, 단순히 앞에 놓인 텍스트를 읽어내는 능력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정도 능력이라면 언어만 배우면 됩니다. 문해력은 읽고 본 것을 기억하여 전달하는 능력, 글자로 본 것을 이미지로 표현하고, 이미지와 영화 같은 시각적 텍스트를 문자로 전환시켜 표현하고 전달하는 능력입니다. 결국, 타자와 세계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능력이며 그 세계를 흡수하여 나라는 세계에 적용하여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 나가는 능력입니다.


그렇기에 다층적 수준의 다양한 텍스트를 넓고 깊게 받아들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이의 수준에 맞게 부모가 소개하고, 또 아이가 스스로 찾아가는 과정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또 부모가 그런 환경을 만들어줘야겠죠. 이를 통해 아이 스스로 자신의 존재가 확장되는 인식을 하고 그 인식을 통해 자신감을 얻어 더 복잡하고 어려운 텍스트를 소화하여 자신의 세계가 넓어지고 새로운 세계를 알아가야 합니다. 다음 장에서는 이 세계에 대해 좀 더 얘기해보려 합니다. 앞서 말한 존재의 형성과 세계의 확장을 위해 꼭 필요한 자기만의 사전을 두껍게 만드는 방법, 특히 가정에서의 방법에 대해 얘기해보려 합니다. 이를 통해 세계를 인식하는 자기만의 관점, 타자의 세계의 관점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세계관의 형성과 인식에 대해서도 말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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