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품에서 시작하는 문해력 수업 07
저희 가족은 부산시립박물관 앞에 삽니다. 살다 보니 몇 년 후, <유엔평화기념관>이 개관했고, 또 얼마 후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까지 개관했습니다. 덕분에, <유엔기념공원> 내에 있는 기념관까지 포함하면 집 근처에 박물관에 네 개나 있게 됐습니다. 앞서 다른 글에도 썼듯이 이런 입지 덕분에 주변 자연경관은 그야말로 숲세권입니다. 모든 건물이 시와 나라를 대표하는 건물이니만큼 조경에 엄청 심혈을 기울였기 때문이죠. 게다가 유엔기념공원을 둘러싸고 평화공원과 조각공원이 있으니 아이들 통학로로 이보다 더 푸르른 곳은 부산 도심에선 찾기 힘들 정도입니다.
박물관뿐만 아니라 다른 주요 기관도 인근에 있습니다. 부산남구 도서관은 걸어서 십분 거리에 있고 부산시립미술관은 지하철로 대여섯 정거장 거리에 있습니다. 아이와 함께 걸어서 갈 수 있는 제법 규모가 있는 서점도 두 곳이나 있고 인근에 부경대학교는 부산에선 보기 드물게 평지에 위치한 대학이라 아이가 막 걸음마를 하며 뛰어다닐 때 자주 갔었습니다. 은채는 이렇게 좋은 동네 덕을 보며 자랐죠.
이런 동네에 살면 몇 가지 버릇이 생깁니다. 우선 학교 갈 때 걸어가는 것을 좋아하게 됩니다. 앞서도 얘기했듯이 은채는 초등학교 내내 걸어서 학교를 갔습니다. 제가 등하교를 책임졌죠. 혼자 다닐 수 있을 학년이 됐을 때도, 은채는 아빠와 함께 울창한 나무 그늘 아래로 이어지는 통학로를 함께 걷는 걸 좋아했습니다. 봄을 알리는 매화와 모과나무 꽃을 본 뒤 벚꽃을 기다렸고, 그 후엔 철쭉과 영산홍 등을 보며 5,6월을 보내다가 한여름엔 장미와 능소화를 보며 걸었죠. 가을엔 국화가 폈고 코스모스가 반겼습니다. 그동안 박물관 담장 안쪽에 우뚝 서 있는 메타세쿼이아와 가로수인 은행나무가 볕을 가려줬죠. 은채는 그 속에서 계절의 변화를 체감하며 성장했습니다.
이렇게 걷는 길엔 전시 정보와 공연 정보를 알리는 현수막과 가로등에 묶인 배너 광고들이 흔히 보입니다. 박물관 담장과 후문엔 다가올 기획 전시와 특별 강연을 알리는 현수막이 걸리곤 하죠. 걷다가 이런 광고 앞에서 그 내용을 유심히 보는 아빠를 봐온 은채는, 요즘엔 저보다 먼저 보고 저를 불러 세우곤 합니다. 특히 박물관의 기획 전시 관련 정보는 아주 상세하게 기억하죠. 제목, 내용, 기간 등을 말이죠. 덕분에 우린 은채의 초등학교 내내 부산시립박물관에서 하는 기획전시는 빼놓지 않고 갔습니다. 특히 몇 년 전 새 관장님이 오신 뒤로는 주제와 공간 구성면에서 수준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박물관에 가면 제일 먼저 뭘 할까요? 은채는 팸플릿을 먼저 찾습니다. 그리고 아주 꼼꼼히 읽습니다. 솔직히 요즘엔 챙긴 뒤 집에 가서 읽는데, 일이 년 전까지만 해도 기획 전시실 앞 로비에서 읽곤 했죠. 그다음 전시실로 들어갑니다. 은채의 특징은 단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한다는 겁니다. 보통 기획 전시의 경우 주제를 함축한 영상이 손님맞이를 합니다. 은채는 우선 그 영상을 아주 집중해서 봅니다. 이어서 전시의 주제와 소재가 적힌 패널을 읽죠. 그 뒤로 관람이 이어집니다. 제 눈엔 관람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학습처럼 느껴집니다. 전시물을 보고 밑에 있는 설명을 읽는 것을 두세 번 반복합니다. 그다음 모르는 단어가 나오거나 전시물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으면 옆에 있는 저에게 물어봅니다. 그럼 전 설명해 줍니다. 결국 그렇게 넓지 않은 기획전시실을 다 둘러보고 나오는데 한 시간 넘게 걸립니다.
미술 전시는 의외로 흔합니다. 지하철 역 휴게 공간에서 할 때도 있고 은채가 주산을 배우기 위해 매주 가던 백화점 문화센터 로비에서도 거의 매주 열렸습니다. 이러다 보니 은채한테는 미술 전시, 미술을 “관람”하는 행위가 뭔가 유별하거나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인식이 생겼습니다. 이 때문인지, 초등학교 고학년에 들어서자, 방학을 맞으면 박물관의 기획 전시와 함께 보고 싶은 미술 전시회를 검색하여 저희에게 먼저 의견을 제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최근, 을숙도에 있는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힐마 아프 클린트 전시회도 은채가 발견해서 같이 가자고 했죠. 덕분에 삼촌까지 따라나서게 됐고요.
미술관에 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은채는 우선 팸플릿을 챙겨 봅니다. 클린트처럼 생소한 화가인 경우라면, 더구나 요즘처럼 스마트 폰과 태블릿 PC로 자유자재로 정보를 검색할 수 있다면, 기본적인 정보는 물론이고 아주 구체적인 정보까지 알고 갑니다. 기억이 정확하다면 이 전시회는 거의 세 시간 가까이 봤습니다. 삼촌과 엄마는 중간에 지쳐서 나가 로비에서 저와 은채를 기다렸을 정도죠. 반면 은채는 한 작품도 소홀히 하지 않고 봤습니다. 화가의 시기별 특성도 꼼꼼히 읽고 이해하기 힘든 추상화가 대부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작품, 한 작품 그 의미를 찾아 유심히 봤습니다. 우리는 추상화의 미로 속에서 한참을 헤매었죠.
은채의 박물관과 미술관 사랑은 여행을 가서도 이어집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그랬습니다. 1학년 여름엔 고령으로 여행을 갔습니다. 그곳에선 고령대가야 박물관과 가야금의 창시자인 우륵 박물관에 갔었죠. 기억이 정확하다면, 당시 고령대가야 박물관 본관인 역사관이 내부 공사 중이어서 우리 가족은 왕릉전시관만 봤습니다. 우륵 박물관에선 다양한 전통 악기들의 소리를 들었고 가야금의 줄을 받쳐주는 안족을 활용한 목걸이를 만드는 체험도 했었죠.
겨울 방학 땐 서울 여행을 했습니다. 그곳에서도 우리는 덕수궁과 국립중앙박물관을 갔는데, 특히 덕수궁에선 석조전 관람을 예약하여 더 특별한 경험을 했었죠. 최근에, 우리 가족은 전주와 남원을 갔었는데, 그때는 계획에도 없던 전시회를 갔었습니다. 한지 박물관 큐레이터의 추천을 받아 팔복예술공장에서 열렸던 라우 뒤피와 앙리 마티스의 전시를 보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죠.
전 이 글을 연재하면서 텍스트라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사실 텍스트는 광범위한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기본적으론 본문, 글자, 문서, 원고, 교재 등의 뜻으로 쓰입니다. 이 뜻들에는 근본적으로 “글”이라는 의미가 심겨 있죠. 그런데 끝에 ~ure를 붙여 Texture가 되면 질감, 직물의 뜻이 되고 심지어는 조화라는 뜻도 됩니다. 그러니 어찌 보면 텍스트라는 단어에는 활자언어와 음성언어를 포괄하는 뜻뿐만 아니라 한 개인의 경험과 그것의 어우러짐까지 농축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하나하나의 경험은 한 개인의 존재감, 질감, 인성과 감성과 지성이라는 직물을 직조하는 일종의 씨줄과 날줄이 되겠죠.
아이의 박물관과 미술관, 도서관의 방문은 단순히 그 안에 담긴 콘텐츠를 소비하는 경험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경험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심지어는 이 시대의 양식이 아니거나 일반적인 용도를 위해 설계된 건물이 아닌 특별한 건물로 들어가는 경험부터 시작됩니다. 인제에 있는 그 유명한 기적의 도서관만 그런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최근 지어지는 도서관들은 책의 소장권수보다 책과 공간의 경험을 더 중요시하기에 그야말로 설계가 아닌 디자인의 개념이 들어갑니다. 매일 집과 학교를 오가는 아이한테는 그야말로 특별한 경험일 수밖에 없죠.
특히 박물관과 미술관의 기획전시의 경우엔 공간의 구성 자체가 전시의 일부입니다. 동선의 형성, 공간의 구분, 조명의 개수와 조도의 강도 조절은 전시된 유물 및 작품과 함께 전시의 의도와 목적을 돕는 동반자이자 훌륭한 조연이죠. 그렇기 때문에 전시를 보는 행위는 일종의 5감이 공존하는 종합적인 예술품, 2차원과 3차원이 어우러진 경험입니다. 여기에 전통적인 “텍스트”도 넘쳐나는 경험이기도 하죠. 팸플릿은 물론이고 작품의 설명이 계속 이어지니까요. 게다가 본 이후 나름의 감상문까지 쓰게 되면 이 한 번의 경험으로 모든 종류의 텍스트를 경험하고 체험하고 생산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아이의 경험 세계가 더 깊어지고 문화적 자본이 더 풍부해지죠.
이렇게 성장한 은채는 호텔에서의 루틴도 다릅니다. 호텔에 체크인을 하러 가면 제일 먼저 뭘 하시나요? 보통 체크인 시간보다 이르게 호텔에 도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경우, 저와 은채는 호텔 로비 이곳저곳을 둘러봅니다. 그 사이, 운전을 한 아내는 편히 쉬죠. 호텔 로비는 호텔 건축의 코어입니다. 호텔의 가치와 지향점이 이 한 곳에 다 응집되어 있죠. 때문에 호텔 로비에는 다양한 그림과 조각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평소에 보기 힘든 화려한 조명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유명 관광지에 있는 호텔이라면 지역 특산품을 활용한 음료를 팔기도 하고 서점이나 서가가 있는 곳도 있습니다. 당연히 지역 관광 안내 및 관광 상품 홍보 책자가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죠. 은채는 그 모든 곳을, 볼 수 있는 곳이 더 이상 없을 때까지 둘러봅니다. 안내 책자도 당연히 챙기고 싶은 건 다 챙기죠. 숙소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네 맞습니다. 그 책자들을 아주 재미있게 보는 겁니다.
전 여행을 별로 안 좋아합니다. 아내를 만나기 전까지, 여행다운 여행을 해본 적이 없을 정도죠. 물론 집안 사정이 안 좋아서 그런 여유가 없어서였기도 했지만 전 집이 제일 좋은 집돌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채가 크면서 이곳저곳 여행을 다녔습니다. 그렇다고 계절마다 여기저기 다닌 것도 아니고 비행기를 밥먹듯이 탄 것도 아닙니다. 그저 일 년에 두어 번, 국내 여행을 주로 다녔습니다.
그때마다 장소 선정과 숙소 선택은 아내 몫이지만 여행지에서의 가보고 싶은 곳을 찾는 것은 저와 은채 몫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그랬죠. 전 개인적으로 건축물을 보는 걸 좋아해서 사찰이나 성전 같은 장소를 찾고 은채는 도서관, 박물관, 전시회는 물론이고 소녀답게 아기자기한 카페도 가고 싶어 합니다. 여행 일정과 관광지는 우리의 이런 취향으로 계획되고 선택되죠. 이런 부녀의 취향이 한데 어우러진 곳이라면, 강릉에 있는 피노키오 박물관이 갑자기 생각나네요.
여행을 하는 동안에도, 한 뒤에도 사진을 SNS에 올리거나 하진 않습니다. 그나마 저만 사진 몇 장 올렸었는데, 그마저도 귀찮아서 요즘엔 안 합니다. 은채는 최근에 좀 하는 것 같더군요. 모든 여행의 과정과 결과는 은채의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문화적 자본의 형태로 말이죠. 이 단어는 나중에 더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그전에 약간 다른 맥락으로 이 단어를 얘기해 보죠.
전 아이를 학교에 보낸 뒤, 개근의 의미가 저 때와는 완전히 달라졌다는 걸 알고 사실 살짝 놀랐습니다. 학기 중이라도 부모와 국내외 여행을 가는 것을 학교에서도 당연시하더군요. 그래서 일부 아이들 사이에선 “개근 거지”라는 말이 통용된다는 사실에 더 놀랐습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부모님들도 아이를 데리고 여행을 많이 다녔을 겁니다. 그때 뭘 하셨나요? 먹고 마시고 자고 쇼핑하고 이게 다 인가요? 경치 좋은 곳에 자리한 펜션에 가서도 어른들은 고기를 굽고 술을 마시고 아이들은 스마트 폰과 태블릿 PC로 게임을 하거나 동영상을 봅니다. 대체로 그렇죠. 해외여행을 가도 크게 다르지 않죠. 특히 동남아나 일본, 태평양 지역의 휴양지로 갔다면 여행의 콘텐츠는 더 빈곤할 겁니다. 물론 저도 술을 마십니다. 그러나 최근엔 은채가 가고 싶고 보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이 많아짐에 따라 일정이 빡빡해지면서 아주 조금만 마십니다. 안 그러면 다음 날 은채와의 동행이 힘드니까요.
경험과 체험이 가득한 여행을 만들어줬으면 좋겠습니다. 바다를 보러 오는 부산에도 역사와 관련한 박물관이 세 곳이나 있습니다. 복천박물관에선 가야 시대를, 정관 박물관에선 삼국시대를, 영도구에 있는 패총박물관에선 선사시대를 배울 수 있죠. 사실 수도권을 이동의 범위로 삼으면 국립김해박물관도 말 그대로 “국립”이기에 꼭 가봐야 하는 곳이고 울산시립박물관에는 산업의 역사가 잘 정리되어 있어 볼만합니다. 울산엔 또 그 유명한 암각화 박물관도 있죠. 미술관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산엔 앞서 말한 을숙도의 현대미술관과 센텀의 시립미술관이 있고 울산에도 개관한 지 얼마 안 된 울산시립미술관이 있습니다. 요즘 울산시립미술관의 기획전시는 상당히 수준이 높죠. 사실 우리나라 어느 곳에 여행을 가도, 박물관과 미술관, 그리고 도서관은 꼭 들러볼 만한 장소입니다. 앞서 말했듯, 얼마 전 은채와 함께 다녀온 남원의 시립 김병종 미술관처럼 건축적으로도 충분히 볼만한 가치가 있는 건축물들이고 관광 시즌에 맞춰 기획 전시들을 하는 곳이 많기 때문이죠.
아이에게 풍성한 “텍스트”의 옷을 입혀 주고 싶다면, 아이의 지성과 감성에 차별 된 질감의 “텍스트”를 잔뜩 쌓아 주고 싶다면 여행에 변화를 주세요. 늘 하던 여행에 약간의 변화만 주면 됩니다. 장소 몇 곳만 추가하면 됩니다. 아빠가 동행해 주면 됩니다. 함께 보고 함께 감탄하고 함께 읽고 쓰고 이야기를 나누면 됩니다.
그 여행의 결과는 SNS가 아니라 아이의 마음에 깊이 있는 “텍스트”로 영원히 남습니다. 그리고 그 쌓인 “텍스트”는 평소엔 잘 드러나지 않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 한 사람의 “소프트 파워”가 되죠. 그런 아이 곁엔, 언제나 친구들이 모입니다. 부자여서, 예뻐서, 공부를 잘해서가 아닙니다. 묘하게 친구들을 끌어당기는 힘을 가진 친구는 안에 쌓인 그 힘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