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품에서 시작하는 문해력 수업
앞선 글에서 말했듯이 저는 은채의 성장 과정, 특히 텍스트와 콘텐츠 소비의 진화 과정을 아주 흥미롭게 지켜봤습니다. 은채는 어떤 것에 흠뻑 빠져 있다가도, 어느 순간, 이제 됐어,라는 말이 들린 것처럼 그것을 휙 그만두곤 했습니다. 이어 다른 것에 열정적으로 빠졌죠. 그 과정에서 우리 부부는 제법 많은 돈을 썼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더 이상 그건 내 세상이 아니야, 하고 외치듯이 고개를 휙 돌려 버리는 딸의 마음을 과거에 묶어 둘 수는 없으니까요.
은채도 다른 아이들처럼 처음엔 동화책을 읽었습니다. 아니, 들었죠. 그러다 조금 시간이 지나서 <뽀로로>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타요>도 봤죠. 재미있는 건 이 시기, 은채가 제일 좋아했던 만화는 <또봇>이었습니다. 은채가 처음 갔던 어린이집에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는 파티를 계획해서, 부모님들한테 아이가 좋아하는 장난감을 하나씩 사서 보내라고 했는데, 우리는 그때 <또봇>에 등장하는 로봇을 사서 보냈을 정도였습니다. 선생님들이 “정말, 이걸 은채가 좋아하나요?”하고 되물었던 게 기억나네요. 은채가 좋아하는 로봇 중에 소방차 로봇이 있다는 걸 알고, 얼마 후에 삼촌이 따로 사주기도 했죠.
조금 크니까 서사가 조금 복잡해졌습니다. <레이디 버그>라고, 무당벌레 무늬의 옷을 입은 전사가 악당을 물리치는 만화도 좋아하기 시작했습니다. 맥락 없이 웃기는 <라바>나 <브래드 이발소> 같은 만화도 좋아하기 시작했죠. 그중에서도 초등학교 저학년 때 가장 사랑했던 만화는 <프리파라>이었습니다. 평범한 초등학생(얼핏 중학생으로 보이는)이 아이돌이 되어, 그 레벨을 밟아 성장하는 이야기죠. 이 만화의 “사악함”은 만화 속의 카드를 실제로 오프라인에서 구매하여 게임기를 통해 자신의 캐릭터 아이돌을 키울 수 있다는 점이었죠. 덕분에 은채랑 엄마가 한동안 이 게임기를 찾아 대형 마트와 해운대의 갓차샵을 무수히 드나들었습니다. 이를 통해 은채의 프리파라 카드 앨범은 아주 두꺼워졌죠. 지금도 하냐고요? 당연히 안 합니다. 조금 지난 후 진짜 아이돌에 빠졌거든요.
은채가 가장 처음 좋아한 아이돌이 누군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은채가 초등학교 들어가면서부터 <에스파>의 광팬이 됐다는 겁니다. 이 이후, <아이브>와 <뉴진스>를 비롯한 여자 아이돌 그룹의 댄스를 하나 둘 카피하기 시작했습니다. 초등학교 때 방과 후 학교에서 방송 댄스를 배웠기 때문에 유독 춤에 관심이 많았죠. 우리는 운동도 되고 스트레스 해소도 될 겸 해서 춤을 외우고 추는 걸 놔뒀습니다. 오히려 그 어려운 동작을 다 외워서 노래가 나올 때마다 척척 따라 하는 걸 신기하게 생각했죠. 춤만 외운 게 아니었습니다. 멤버들의 이름은 물론이고 소속사의 이름과 대표의 이름까지 알고 있더군요. 게다가 <에스파>의 경우 나름의 “세계관”이 있는데 그걸 어찌어찌해서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노래가 나올 때마다, 틈이 날 때마다 엄마, 아빠에게 그 세계관을 친절하게 설명해 줬습니다.
그러다, 몇 년 전, 그 “오빠”가 세상에 등장했습니다. 제로베이스원의 성한빈 오빠가. 딸은 그 팀을 뽑는 프로그램을 열심히 챙겨보더니 결국엔 이 팀의 팬이 됐습니다. 그중에서도 성한빈의 팬이 됐죠. 춤도 잘 추고 얼굴도 참하게 생긴, 천안이 고향인 이십 대 초반의 “오빠”한테 반한 것이죠. 아내는 딸의 덕질을 도와줬습니다. 제로베이스원이 모델로 나오는 제품이나 한정판을 사주기도 했고 앨범도 사줬습니다. 생각해 보니 예전에 <아이브>와 <에스파>, <뉴진스>의 팬일 때도 그들의 사진 한 장을 얻기 위해 피자나 치킨을 일부러 시켜 먹었네요. 여하간 딸의 덕질은 계속 됐고, 현재는 <올 데이 프로젝트>라는 그룹을 제일 좋아합니다. 물론 성한빈 오빠는 여전히 마음에 둔 채로 말이죠.
그 사이, 딸이 너무 아이돌 음악만 듣는 건 같아서, 그러다 음악적 취향이 너무 한정될 것 같아서 제가 다른 음악을 소개해줬습니다. TV로 유튜브를 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이후였을 겁니다. 전 오랫동안 일본 록그룹 <One ok Rock>의 팬이었습니다. 그들의 영상 중, 일본 NHK에서 방영한 <18 fes>라는 프로그램의 클립을 보여줬죠. 그 뒤부터 딸은 이 팀의 팬이 됐습니다. 저는 전혀 모르는, 멤버들의 이름은 물론이고 나이와 고향, 현재 사는 지역까지 탈탈 털어 알게 됐습니다. 나중에 SNS를 하게 된 이후에는 그들을 팔로우해서 그 팀의 해외 투어 일정과 장소까지 알게 되더군요. 덕분에 요즘엔 딸에게 그 팀에 대해서 배우는 상황입니다.
취향은 스스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자신의 신체와 지향하는 바를 정확히 알아 취할 건 취하고 버릴 건 버리면서 차곡차곡 채워가는 것이죠. 이 과정에서 모방의 과정과 반역의 과정이 동반됩니다. 형제, 자매가 있는 집 아이들은 서로를 모방함과 동시에 상대와 다르기 위해 배운 것을 반역하고 거스르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갑니다. 형제, 자매가 없는 집 아이들은 부모나 친척한테 배우죠. 은채는 옷 입는 건 엄마한테 배우고 있고 IT 분야는 삼촌에게, 그리고 독서와 글쓰기 분야는 저를 동반자로 삼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없으면 힘듭니다. 모방도 반역도 표상이 되는 사람이 있어야 가능하죠. 이런 이유로 저는 상당히 힘들었습니다. 십 대에 들어서면서 집이 가난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주변에 표상으로 삼을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결국 혼자서 꾸역꾸역 배워나가야 했죠. 검색대도 없던 시절, 동네 서점에 들어가면 한 시간 넘게 있는 것이 당연했고 음악에 대해선 레코드 샾 사장님에게 물어봐야 했죠. 영화는 그나마 영화 잡지들이 막 등장할 때여서 서점에서 슬쩍 훔쳐보면서 배워나갔죠. 재즈에 관심이 생겼을 땐, 덜컥 <재즈 입문>이라는 책을 먼저 사서 본 뒤에, 그 책에서 소개하는 앨범들을 시대 순으로 사서 들었을 정도였습니다. 검색해 보니, 이제는 절판이 됐더군요.
은채는 이런 고통을 겪지 않길 바랐습니다. 나비가 탈바꿈하는 것처럼,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배워서 성장하기를 바랐습니다. 앞선 글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은채는 저에 걱정과 기대를 알기라도 한다는 듯, 자연스럽게 성장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입학 후, 은채가 가장 뿌듯해했던 것은 도서관 대출 카드가 만들어졌을 때입니다. 등교를 한 지 2주가 넘어서야 은채의 이름으로 대출 카드가 발급됐죠. 이후 처음 빌려 온 책 목록을 볼까요. 메리디스 후퍼와 알랜 컬리스의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관>, 질 바클렘의 <찔레꽃 울타리- 가을 이야기>, 콜린 톰슨의 <영원히 사는 법>입니다.
이후, 은채의 독서 수준은 꾸준히 성장했습니다. 학교와 엄마의 권장/필독 도서와 상관없이 자기만의 세계를 형성해 갔죠. 코키 폴의 <마녀 위니> 시리즈와 <마법의 시간 여행> 시리즈, <신기한 스쿨버스> 시리즈도 읽어나갔습니다. 이후 앤디 그리피스의 그 유명한 <13층 나무집>으로 이어졌죠. 그 해 여름 방학 때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속담에 꽂혀서는 <자신만만 저학년 속담>이라는 책을 서점에서 읽었네요. 지난 원고를 계속 보니 3학년 때는 <보리 어린이 식물도감>,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어떤 보물이 있을까?>, <시가 말을 걸어요.>를 사서 읽었고 조금 뒤에는 제프 키니의 <웜피 키드> 시리즈와 마크 패리시의 <마티 팬츠의 사건일지>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렇게 글밥이 많아질수록, 분야와 장르가 다양해질수록 아이의 관심사는 급격히 변합니다. 그건 변덕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죠. 은채도 잠시 <Why 시리즈>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주제가 참, 뭐랄까, 어수선합니다. 중고 서점에 가서 몇 번에 걸쳐 산 주제는 인체, 남극/북극, 바다, 갯벌, 물고기 등입니다. <마법의 시간 여행> 시리즈들의 주제 또한 사라진 공룡, 끝없는 우주, 고대 그리스 올림픽, 이집트의 피라미드입니다. 어른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책들의 목록만 봐서는 이 사람의 직업이 뭔지, 취미가 뭔지, 전공이 뭔지 당체 종잡을 수 없겠죠. 그러나 은채의 입장, 어린이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목록의 혼란은 당연합니다. 은채에게 세계의 대부분은 아직 미지의 세계이고 미스터리한 영역이 훨씬 많기 때문이죠. 그러니 그때그때 궁금한 것들의 궤적을 따라 살 수밖에 없고 그 궤적은 어느 날 뚝 끊기기도 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다시 궤적이 시작되기도 합니다.
3학년 때는 환경 보호에 그야말로 꽂힌 적이 있었습니다. 그해 여름 방학 때 산 책을 보니, <몽당연필도 주소가 있다.>와 <마음의 온도는 몇 도일 까요?>와 같은 시집 두 권과 <열두 달 환경 달력>이라는 책이 있고, 비슷한 시기에 학교 도서관에서는 <기후변화가 내 탓이라고>를 대출해서 읽었네요. 5학년 때는 갑자기 헌법에 꽂혀서 관련된 책을 열심히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사회 시간에 등장한 헌법의 매력에 완전히 푹 빠졌기 때문이죠. 이때 읽은 책들을 보니 <처음 읽는 헌법>, <10대를 위한 생각하는 헌법>, <헌법 쉽게 읽기>, <이야기 형법>등을 읽었습니다. <민법 입문>과 <사형을 집행하라>와 같은 책도 대출했지만 읽지는 못했을 겁니다.
이건 변덕일까요?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장의 과정이고 축적의 시간이며 자기완성의 단계입니다. 역사가 중요해, 철학이 중요해, 과학이 중요해, 이러면서 부모가 아이에게 특정 분야, 특정 장르의 책을 권할 때가 있습니다. 아니, 사실 대부분이 그렇게 강권하죠. 전 여기에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특정 시기까지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 자기가 관심 있는 것을 찾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난, 사랑 이야기를 좋아해. 어! 소설 중에도 그런 게 있네.’, ‘오늘 환경 보호에 대해서 배웠는데, 관심이 생겼어. 어! 그런데 아빠랑 서점에 갔더니 관련된 책이 있네.’, 이런 식의 의식 구조가 먼저 생겨야 된다는 거죠. 내가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것이 책에 있다. 이런 확신과 의식이 있어야 어떤 관심사, 호기심이 생겼을 때 그것을 충족시킬 수단으로 책을 우선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유튜브나 AI와의 소통 이전에 말이죠.
전 은채에게, 저도 모르게, 스스로의 지적 세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가르쳐 온 것 같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주제나 소재를 선택하고, 그걸 가장 잘 쓰고 표현하는 저자나 출판사의 책을 찾아내서 자신의 책의 세계, 더 나아가 자신의 지적 취향과 소양을 구축해 나가는 과정을 말이죠. 이런 과정의 반복 속에서 자신의 지적 세계를 만든 아이는, 그 세계에 다른 조각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그것을 찾기 위해 서점을 배회하고, 온라인 중고서점을 들락거리면서 절판된 책이나 희귀한 책을 구하기 위해 틈틈이 검색하고, 그렇게 찾게 된 조각으로 자신의 세계를 더 확장해 나가게 됩니다.
그때까지 부모가 해줘야 할 건 뭘까요? 우선은 격려입니다. 특별한 분야에 관심이 생긴 것에 대해 격려를 보내줘야 합니다. 그다음은 그 관심이 식을 때까지 그 분야 탐색의 동반자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아이의 관심이 우주로 향하면 부모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열정이 갑자기 식어도, 관심사가 갑자기 변해도 비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분야의 책을 아무리 많이 사들였어도, 별을 보겠다고 해서 천체 망원경을 사줬다고 해도, 참고 넘어가야 합니다. 우리 집에도 은채가 초등학교 때 타보고 싶다고 해서 사 준 롱 보드가 인테리어 소품으로 걸려만 있게 된 지 꽤 됐으니까요.
새로운 관심사가 생겼으면 오히려 칭찬해줘야 합니다. 살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게 얼마나 많습니까. 아이는 그 광대한 지식의 여정 앞에 이제 막 오른 모험가입니다. 그 여정의 지도를 덥석 안겨주지 마세요. 자기만의 지도를 만들도록 격려해 주세요. 나만의 세계, 나만의 철학, 나만의 모험 방법이 있는 아이는, 결국 부모님들이 그렇게 만들고 싶어 하는 자기주도 학습을 하는 아이로 성장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