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품에서 시작하는 문해력 수업 10
앞선 글에서 효능감에 대해서 잠깐 얘기했습니다. 그러다 곁길로 나가버렸죠. 효능감은 심리학에서 주로 쓰는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어떤 일, 혹은 임무를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다는 자신에 대한 확신, 혹은 기대감을 말합니다. 영어로 <Self-Efficacy>라고 하죠. 영어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마음은 스스로 갖게 되는 마음이자, 스스로 지켜내는 마음입니다. 그렇다고 어느 날 갑자기 이것을 갖겠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마음은 아닙니다. 아이를 키워 본 분은 알겠지만, 아주 사소한 것들을 스스로 해내는 과정을 통해 차곡차곡 쌓이는 마음이죠. 마치 오래된 지층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말이죠.
전 아이들이 효능감을 얻는 방법엔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신체 활동이고 하나는 지적인 활동이죠. 친구들보다 빨리 달리거나 어려운 동작을 해내거나 농구를 배워 슛을 집어넣거나 아주 수준 높은 줄넘기 동작을 할 때 성취감과 함께 뭐는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 바로 효능감이 생기죠. 이걸 바라고 그런 건 아니지만, 우리 부부는 아이에게 음악 줄넘기를 꽤 오랫동안 배우게 했습니다. 은채는 특유의 집중력과 끈기로 어려운 동작을 하나하나 배워갔고 나중엔 자격증도 따더군요.
저는 농구도 가르쳤습니다. 농구는 의외로 혼자서 가볍게 할 수 있는 운동 중 하나입니다. 슈팅과 드리블 연습 같은 건 언제든 가능하죠. 또, 특히 공이 림을 통과하면서 그물이 철썩일 때마다 스트레스도 해소되기 때문에 여자 아이라도 배워두면 좋을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죠. 전 이때, 은채가 성취 욕구가 강하고 노력을 통해 얻어낸 결과를 만끽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3학년 때쯤이었을 겁니다. 주말마다 인근 대학교 농구 코트에 갔습니다. 처음엔 당연히 드리블을 가르쳤습니다. 그다음엔 패스를 가르쳤죠. 그러다 슛을 해보고 싶다고 하더군요. 아빠가 쏙쏙 넣는 것이 부러워 보였겠죠.
어깨 힘도 없고 아직 온몸의 힘을 쓸 줄 모를 것 같아서, 행여나 부상이라도 당할까 봐 처음엔 말렸습니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하도 졸라대기에 골대하고 아주 가까운 곳에서 슛 연습을 해보기로 하고 요령을 가르쳐줬습니다. 당연히 들어가지 않았죠. 그런데 계속하더군요. 세보지 않았지만 아마 열 번 이상 시도했을까요, 드디어 골이 들어갔습니다. 그때 들은 은채의 환호 소리와 그 환희에 찬 표정은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롱 보드를 잘 타게 됐을 때도 그런 표정은 나오지 않았죠.
왜 이 얘기를 길게 했을까요? 전 은채가 책을 그야말로 독파해 나가는 즐거움을 알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이를 통해 자기 효능감과 자신감을 안으로 쌓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죠. 그리고 후에 초등학교에서 음악 줄넘기와 농구를 배우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제 생각은 확신이 됐습니다. 이 아이는 자기가 시간을 들이고 집중을 하고 노력과 연습을 하고 공부를 하면 그 어떤 것이든 자기 것이 된다고 믿고 있구나. 그럴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구나 하고 말이죠. 앞서 말했듯, 동화책을 달달 외워 엄마, 아빠를 깜짝 놀라게 했던 그 순간에 든 생각이 확신이 된 것이죠.
은채에게 책은 결국 두 가지 의미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는 책 속에 내가 모르는 것의 답이 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이 있다면 읽어야만 한다. 이 단순한 사고가 하나 있었던 것 같고, 다른 하나는 조금 어려운 책을 읽어내는 그 행위 자체에서 얻어지는 성취감과 효능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입학 후, 은채의 이런 성향을 어렴풋이 간파한 저는 은채와 함께 도서관에 드나들기 시작했습니다. 집에 있는 책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아이의 열망을 소화해 낼 수 있는 곳은, 그곳밖에 없었죠.
여러분은 언제, ‘야, 내가 이 대학에 오길 잘했구나.’, ‘야, 내가 이 동네에 이사 오길 잘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나요. 저에겐 이런 생각이 들게 하는 공통된 조건이 하나 있는데 바로 도서관입니다. 집 근처에 공원이 있고 산이 있고 심지어 몇 정거장만 가면 바다가 있으며 박물관도 있는 동네에 살지만 아이를 키우다 보니 도서관이 가까운 것이 정말 중요하더군요. 규모와 시설이 아주 좋은 도서관이 말이죠.
대학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학부 시절, 제가 다녔던 대학의 도서관은 아직 완벽한 전산화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믿기 어렵겠지만 폐쇄식 서가였죠. DOS로 운영되는 컴퓨터로 책을 검색하여 책의 제목과 서가 번호를 종이에 써서 사서에게 주면 사서가 찾아다 주는, 그런 형태의 도서관이었단 말입니다. 입학 후, 몇 번 간 뒤에 진짜 열받아서 아예 발을 끊고, 그다음부턴 책을 사서 봤을 정도였습니다.
대학원을 서울에 있는 모 대학으로 갔습니다. 때마침, 그 대학의 중앙도서관이 한 독지가의 기부를 받아 완전히 새로 지어진 직후였죠. 처음, 지하철 개찰구처럼 생긴 도서관 입구에 학생증을 "띡" 댄 후 통과할 때, 기분이 얼마나 좋았던 지요. 아니, 그전에, 이미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의 내부에 들어간 것처럼 층층의 원형 회랑이 둘러싸고 있는 도서관 로비에 들어갔을 때, 그 위를 올려다보면서 얼마나 기분이 좋았던 지요. 어쩌면 은채가 처음 구립도서관에 갔을 때도 비슷한 기분 아니었을까요.
은채는 우리 집안에서 처음으로 대출카드를 만든 사람입니다. 그것으로 읽고 싶은 책을 다섯 권, 2주 기간 한정으로 빌릴 수 있다는 걸 알고 아주 기뻐했죠. 함께 가면 저도 은채의 이름으로 책을 빌렸습니다. 어차피 2주 안에 읽을 수 있는 책의 권수는 제한되어 있으니 둘이 합쳐 다섯 권을 빌리기로 한 것입니다.
도서관에서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건 뭘까요? 바로 도서관의 서지 분류법입니다. 배운 다기보다는, 뭐랄까요, 간파해야 한다고 할까요? 특정 번호 대가 어떤 분야의 책을 의미하는지 파악하고, 도서관이 그 번호대의 책을 어느 서가에 배치하고 있다는 걸 파악하는 것이 도서관 이용의 효율성을 높이기 때문입니다. 또 도서관에 따라선 새로 입고된 책엔 다른 번호 체계를 부여할 때도 있으니 그것도 알아야 하고, 분류에 따라 다른 층에 배치하는 경우도 있으니 그것도 알면 좋겠죠.
은채는 이런 도서관의 운영시스템을 알아가는 걸 상당히 흥미로워했습니다. 자기가 읽고 싶은 책이 어디 있는지 파악해서 서가를 이동하고 층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에, 뭐랄까요, 어떤 재미를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몇 번 간 이후엔 은채의 말엔, '아빠는 아빠 걸 찾고 난 내 걸 찾자', 이런 뉘앙스가 담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내 건 내가 알아서 찾을 테니 아빠는 들뢰즈인지 누구인지, 여하간 그 양반을 찾아가쇼.', 뭐 이런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어디서 만나자고 약속(도서관에서 통화를 하면 실례라고 가르쳤으니까요.)을 하고 각자 읽고 싶은 책을 찾아 헤어져 헤매기 시작했습니다.
서점에서나 도서관에서나 딸에게 책을 고르게 하는 기준은 동일합니다. 첫 째, 지금 관심 가는 분야의 책을 고를 걸, 두 번째, 소설 같은 그냥 재미 삼아 읽을 책도 고를 걸, 세 번째 자기 수준에 맞는 책과 그보다 조금 높아 보이는 책도 함께 골라 올 것. 이 기준은, 저 개인적으론 상당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저에게도 좋아하는 철학자와 작가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일본 철학자이자 작가들 중 제 또래의 아즈마 히로키와 사사키 아타루, 지바 마사야를 좋아합니다. 이들은 들뢰즈나 데리다의 철학을 깊게 연구하고 흥미롭게 해석하여 글을 썼죠. 한국의 철학자와 작가 중엔, 서동욱과 김재인 교수, 백상현 같은 학자들을 좋아하고 최근엔 문학평론가인 신형철을 추적하듯 읽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만 읽으면 솔직히 지루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 무라카미 하루키나 파올로 코엘료, 폴 오스터, 스티븐 킹 같은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도 있습니다.
딸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학교에서 뭘 배우냐에 따라 관심사는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앞선 글에 썼듯 환경 보호를 배우면 환경에 관심을 갖게 되고 법과 정치를 배우면 거기에 관심을 쏟는 것이 당연합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을 다녀오고 경주에서 유적 투어를 하고 경주 남산 곳곳에 숨어 있는 불상을 해설사와 동행하여 보게 되면 당연히 유물과 유적, 역사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죠. 그러면 당연히 그 분야의 글을 읽고 싶습니다. 그런데 청소년 도서 코너에 꽂힌 가슴 설레는 소설에 마음이 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전 그 두 분야의 책 모두를 고르게 놔뒀습니다. 사람이 달릴 때가 있으면 쉴 때도 있어야 하니까요.
도서관에서 부모가 해줘야 할 역할이 또 하나 있습니다. 어쩌면 아이의 유년기, 독서 습관이 형성되는 시기에 해줘야 할 역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난이도의 설정입니다. 아마 모든 부모님들이 우리 아이가 어느 정도 수준의 책까지 읽을 수 있는지 궁금하실 겁니다. 또, 어떤 책이 그 수준에 맞는 책인지도 궁금하시겠죠. 이를 위해 학교와 정부의 관련 기관, 그리고 지역 도서관에선 연령에 맞는 권장도서나 필독서를 정해주죠. 이런 범례에 따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뒤에 더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저는 우선 “청소년”이라는 단어가 제목 앞에 있으면 읽게 했습니다. 헌법을 다룬 책이라도 “청소년”이라는 전제가 있으면 읽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죠. 반면 이런 단서가 없는 책들은 읽기 힘들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은채는 자기가 관심 있는 분야라면 눈에 보이는 데로 읽고 싶어 했죠. 물론 저는 말리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빌리까 말까 망설이고 있으면, “야, 이런 책은 목차만 읽어도 도움이 되는 거야. 그냥 빌려.”라는 말을 해주면서 독려까지 했습니다.
저에 이런 철학은 은채가 저에게 셜록 홈스 전집 중 1권을 빌려 읽으려 하다가 포기한 후, 다시 돌려주며 눈물을 보였던 기억에 기반합니다. 사실 완독만큼 도전도 중요합니다. 또, 도전만큼 완독도 중요하죠.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아이가 중학생, 고등학생이 돼서도 엉덩이 탐정만 읽는다면 그건 일종의 퇴행적 독서입니다. 반면 아직 그 정도 수준인 아이가 히가시노 게이고나 미야베 미유키의 추리소설에 도전해서 번번이 좌절하는 건 일종의 치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니면 스스로에 대한 판단 미숙이라고 볼 수 있죠.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 당연히 책을 멀리 하게 됩니다. 그야말로 내겐 너무 어려운 당신이 되어버리는 것이죠.
은채는 초등학교 내내 자기가 읽기에 버거운 책을 꼭 한 권씩 대출해 왔습니다. 그때마다 전 이 책은 어려운 책이니 다 읽으려 애쓰지 말고 목차라도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너무 두껍거나 어려워서 다 못 읽으면 반납하면 그뿐이라고도 얘기해 줬죠. 은채는 저에 이런 말에 힘을 얻어 관심이 가는 책은 두께와 난이도에 상관 없이 빌려왔습니다. 어떤 책은 빌려 와 집에서 표지를 열어 목차를 읽어본 것만 있고 어떤 책은 한두 챕터 읽어보기도 했죠. 그러다 어려운 단어가 나오면 저에게 묻기도 하고요. 그렇게 도서관에서 책을 부담 없이 고르고 대출을 했죠. 이런 과정의 반복을 통해 자신의 적정 수준을 스스로 가늠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제가 판단하건대, 은채는 초등학교 3학년쯤부터, 최소 두 살에서 최대 네 살까지, 또래보다 높은 수준의 책을 읽어냈던 것 같습니다. 최근, 이런 은채의 수준을 다시 느꼈습니다. 극성스러운 은채가 고등학교 독서, 소위 비문학 과목의 전국연합학력평가 문제집을 사 왔는데, 거기에 나온 철학 지문을 수월하게 읽고 문제를 풀더군요. 서점과 도서관에서 끊임없이 어려운 책과 쉬운 책 사이에서 방황한 시간이 빚어낸 당연한 결과겠죠.
은채의 투병이 시작될 즈음 지역의 구립도서관이 리모델링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읽고 싶은 책은 인근에 있는 작은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전해줬죠. 은채는 병실에서도 책을 읽고 수학 문제를 풀었습니다. 전 그 곁에서 사르트르의 책을 읽었죠. 그때 읽은 사르트의 <구토>에는 아주 강박적인 지식인이 나옵니다. 은퇴 이후 지역 도서관의 책을 다 읽겠다고 다짐하고 알파벳 순서대로 읽어나가는 사람이죠. 그 사람은 그렇게 읽어나가면서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던 지식을 습득하여 은연중 자랑했습니다. 지식을 자기 자랑의 수단으로 활용한 것이죠. 일종의 지식을 자기 주체성의 근거로 삼은 사람입니다.
전 은채의 과도한 지적 욕구를 조절해 왔습니다. 다 읽으려 하고, 다 알려고 하는 욕망을 조절하여 그 욕망이 평생 지속되는 지적 욕구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조절해 줬습니다. 다른 친구들보다 한 달 늦게 중학교에 들어간 이후, 은채는 학교 도서관에 거의 매일 갑니다. 그곳에서도 역시 자기가 읽고 싶은 책과 읽어야 될 책, 읽어낼 수 있는 책과 읽고 싶으나 읽어낼 수 없는 책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가끔 저에게 묻곤 하죠. 지금도 저의 대답은 같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읽고 싶으면 읽고 힘들면 천천히 읽고 그래도 안 읽히면 좀 나중에 읽으면 된다. 그러니 서가에 꽂힌 책을 뽑아 품는 걸 두려워하지 마라." 이렇게 격려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