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주도성과 존중 1 - 선택과 거절

아빠 품에서 시작하는 문해력 수업 17

by 최영훈
“그녀의 감시는 등하굣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등하굣길에 나쁜 유혹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녀는 직접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한 코스를 정해, 아들이 그 이외의 코스로 다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만약 어떤 사정으로 인해 정해진 코스로 갈 수 없을 때는 일단 집에 전화를 걸어, 어떤 길로 갈 것인지 지시를 받도록 말해놓았다. 매일 똑같은 길을 통해 학교에 다니던 그는 가끔 다른 길로 가고 싶다는 유혹과 싸워야 했다. 하지만 마음속의 욕망을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었다. 어머니에게 들켰을 때 얼마나 심하게 야단맞을지를 생각하면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 「인형신랑」, 단편집『독소소설』, P.167


문해력의 본질과 자기주도학습

문해력의 본질은 남의 도움 없이 글을 읽어내는 것입니다. 문맹은 문해력의 공백이 유발하는 사태이고, 그 사태는 세상에 넘쳐나는 텍스트 앞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공포의 숙주가 됩니다. 타인의 도움 없이 세상에 나갈 수 없다는 사실, 혼자서는 세상을 독해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는 이 명백한 사실 앞에서 문맹자는 소외와 고립이라는 동굴에 갇힐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스스로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부모나 학원의 도움 없이도, 선생님이 일일이 단어를 설명해주지 않아도 교과서를 읽고, 공부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당연하게도 가르치는 사람과의 조율은 불필요해집니다. 가르침을 받고 배우기 위한 때와 장소의 합의가 필요치 않습니다. 독학이라는 단어를 광범위하게 적용한다면, 혼자서, 스스로, 책을 보며 공부할 수 있는 존재는 언제나 독학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자기 주도의 공부죠.


학원가 키즈

많은 부모님들이 아이가 스스로 공부하길 바랍니다.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공부할 것을 정한 뒤 누구의 감시도 없이 해야 할 만큼의 공부를 해내길 바라죠. 반면 어떤 부모님들은 네 살 때부터 아이를 휘어잡고 빈틈없이 학원 순회를 시키며 공부를 시킵니다. 대치동 키즈, 목동 키즈로 불리는 아이들이죠. 서울만 그런 게 아닙니다. 전국 어디나 유명한 학원가는 있고 그 학원가를 쉴 새 없이 오가는 노란 승합차와 그 차에 실려 다니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지역의 지하철역에 가면 벤치에 앉아 문제집을 푸는 아이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카페와 맥도널드 같은 곳에서도 볼 수 있죠. 아이들은 학원이 내준 할당량만큼 풀어야 하고 이를 통해 소위 선행이라는 걸 하면서 현재의 학년, 학기보다 앞서가는 학습을 하게 됩니다. 이 완수는 부모의 안도감으로 이어집니다. 양적으로, 가시적으로 그 성과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죠.


이렇게 성장한 아이들 중엔 성장과정이나 혹은 어른이 된 뒤 마음의 병을 앓거나 어른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마음가짐, 또는 삶의 자세를 갖지 못한 채 성인이 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제법 큰 직장에 다니는 아내를 통해 종종 이런 젊은 직원들로 인해 발생하는 조직의 문제를 전해 듣곤 했지만 그 심각성에 대해선, 그러니까 그 후유증에 대해선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한 영상을 보고 그 심각성을 알게 됐고, 그 심각성의 인식은 앞에 인용한 저 소설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우선 영상에 관한 이야기부터 해보죠.

성장이 멈춘 아이들

영상은 작가이자 강사인 김미경 씨가 운영하는 채널의 콘텐츠였습니다. 대담 형태의 콘텐츠인데, 제가 본 건 소아정신과 의사인 류한욱 씨와의 대화였습니다. 류한욱 씨는 대치동에서 정신과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분으로 심리학자 김경일 씨와 <적절한 좌절>이라는 책을 집필하여 출판했고, 대담은 이 책의 내용을 중심으로 전개됐습니다. 류한욱 씨가 전해준 대치동 키즈의 그늘은 제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네 살부터 학원을 전전하면서 성장 과정에서 거쳐야 할 단계들을 거치지 못한 아이들은 나이만 먹은 공부 기계로 사육됐습니다. 개그우먼 이수지 씨가 패러디한 것처럼 어떤 아이들은 일곱 살에도 기저귀를 떼지 못했고 초등학교 2, 3학년 되어서도 배변의 뒤처리를 부모가 해주는 애도 있었습니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부모와 분리 수면을 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의 역할이 축소된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다자간의 다양한 관계 형성 방법을 알지 못했고 이로 인해 학교생활에 애를 먹었습니다. 그 대담에서 나온 표현을 빌려 말하면 그야말로 “생활”을 통해 배우는 기본적인 것이 누락된 존재가 된 것이죠.


전 이 대담을 들으면서, 앞서 말했듯이 저 소설을 떠올렸습니다. 소설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명문가의 아들이 있습니다. 역시 명문가의 규슈를 맞아 결혼식을 치르는 날입니다. 그날의 에피소드 사이, 회상이 삽입됩니다. 똑똑했던 남편을 일찍 떠나보낸 뒤, 명문가의 장손인 아들을 완벽한 가문의 후계자로 키우기 위해 엄마가 들인 노력들이, 집착과 강박에 가까운 노력들이 묘사됩니다. 제가 인용한 부분은 그 노력의 일부죠.


교육을 잘 시키고 좋은 곳에 취직한 자랑스러운 아들의 결혼식이 시작되기 전, 아들은 엄마에게 뭔가 말하려 합니다. 그러나 워낙에 명문가의 결혼이다 보니 손님들이 쉴 새 없이 찾아오고 이런저런 결정해야 될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정말, 꼭, 엄마에게 물어서 답을 얻은 뒤에야 행동할 수 있는 것이 있었기에 틈이 날 때마다 엄마와의 대화를 시도하지만 미처 대화할 새도 없이 결혼식은 시작됐고, 결혼식이 절정에 달했을 때, 아들은 그만 바지에 “똥”을 싸고 맙니다. 아들이 물으려 했던 건, 똥을 싸고 싶을 땐 어떻게 하나요, 였던 것이죠.


까막눈 부모의 소망

전 류한욱 씨의 말과 이 소설을 떠올린 뒤, 과거 우리 부모님 세대의 부모님들, 그러니까 조부모 세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 세대엔 글을 못 읽는 분이 흔했습니다. 부모님 세대들이 대부분 최소한 중졸 이상이었던 반면, 조부모 세대 중엔 학교 문턱도 못 가 본 분들이 제법 많았죠. 그런 분들은 스스로를 “까막눈”이라고 불렀죠. 말 그대로 문맹(文盲)이죠. 한과 아쉬움이 잔뜩 담긴 자칭이었습니다.


그 한을 가진 부모들이 자식 교육에 열정을 쏟았습니다. 고향에서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던 분들이 힘들게 일해 번 돈으로 자식들을 가르쳤죠.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까막눈으로는 갈 수 없고, 갈 수 없어 볼 수 없었으며, 갈 수 없고 볼 수 없어 살 수 없었던 넓은 세상, 대처(大處)로, 자식만큼은 나가 살 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자신과는 전혀 다르게 살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고향과 부모에 미련을 두지 않고 “환하게 보이는 눈”으로 넓은 세상을 향해 훨훨 날아가 살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문해의 자유를 바탕으로 세상과 겨뤄보고 더 높이 날아보라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커지는 시기

학습(學習)의 “습”자에는 어린 새가 날개의 힘을 키울 때까지 나는 법을 꾸준히 연습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합니다. 날개에 힘이 붙고 나는 법을 익힌 새는 당연히 둥지를 떠납니다. 이렇듯 학습엔 그것이 독립적인 인격체의 성장을 돕는 견인차 역할을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학습은 자기주도 학습이어야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자기주도 학습의 본질은 뭘까요? 바로 스스로 결정하고, 도전한 뒤 학습으로 인한 성공과 실패를 온전히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영광의 빛도, 패배의 굴욕과 그늘도 온전히 자신이 감당해 내는 것이죠. 도전의 준비도 자신이 하고 도전 또한 자신이 했기 때문에 결과 또한 책임지는 주체가 되는 것이죠.


이런 아이로 키우기 위해선, 전 우선 아이의 선택과 거절에 부모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은채는 키우기 쉬운 아이였습니다. 성장의 문턱을 넘을 때마다 마치 나름의 큰 결심이라도 한 듯 넘어서죠. 우유의 이유식으로 갈 때도, 기저귀를 뗄 때도, 젓가락질을 배울 때도, 한글과 산수를 배울 때도 그렇게 자신의 의지로 단계를 넘어섰습니다. 그런 은채도 “싫어”라는 말을 많이 할 때가 있었습니다. 1학년 말미에서 2학년 초, 그 언저리였죠. 숙제를 하라고 해도, 자라고 해도, 저녁에 단출히 차려 밥을 먹자고 해도 우선 “싫어”라는 말부터 던져 놓을 때가 있었죠.


"싫어"에 담긴 의미

그러나 그때, 은채의 “싫어.”에는 부정의 의미와 함께 중요한 일의 순서 결정을 아직 못 했다는 신호, 그리고 어떤 일을 조금만 뒤로 미루고 싶다는 신호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또 자신의 의견을 들어보고 결정해 달라는 표현도 포함되어 있었죠. 그래서 막상 “싫어.”라고 말해 놓고 몇 분 안에 하라고 했던 일을 하거나 아빠의 의견을 따르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전 그저 그 생각할 몇 분을 줄 뿐이었죠.


전 그때마다 “그래? 그럼 은채가 먹고 싶은 거 생각해서 말해 줘.”, “그래? 그럼 언제 잘 건데? 내일은 스포츠 홀릭 데이라 체력 충전해야겠던데?”, 이렇게 말을 건네고 기다리곤 했습니다. 또는, 어떤 부탁을 했을 때 은채가 싫다고 하면 전 종종 이렇게 말을 하곤 했습니다. “은채야. 서로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 가족이야. 은채가 아빠 부탁을 안 들어주면 아빠도 은채 부탁을 들어주는 게 좋을까?”, 결국 은채는 아빠의 이런 반 협박에 고개를 끄덕이곤 했죠.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내보니 애들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바쁘고, 아는 게 많아지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았습니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졸업하자마자 자신 앞에 놓인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 아이들은 그때그때 나름 최선의 결정을 내려야만 했죠. 방과 후 학교에선 뭘 하면 좋을지. 친구들이 다니는 태권도(를 포함한 다양한 운동), 미술, 피아노, 발레 학원들엔 나도 가고 싶은데 도대체 어딜 가면 좋을지. 수학, 영어, 국어 등 친구들은 이런저런 학습지를 한다는데 난 뭘 하면 좋을지. 이것저것 먹고 싶은 건 많은데 주말 외식엔 뭘 먹으면 좋을지 등 그 선택의 범주는 점점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은채의 “싫어.”라는 대답은 “잘 모르겠어.”나 “아직 결정 못했어.”, “함께 결정해 줘.”와 같은 의미인지도 모릅니다.


결국, 거절의 표현은 스스로 선택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은채는 어린이집 다닐 때까지 제가 입혀주는 대로 입었습니다. 그러다 초등학교를 들어가니 나름 자신만의 취향이라는 것이 생겼죠. 그래서 초등학교 내내 은채와 함께 등교 패션을 코디했습니다. 티셔츠를 고르고 바지를 고르는 게 전부지만 은채와 저는 나름 심사숙고를 했죠. 그러나 어떤 것들은 은채 스스로 결정을 했습니다.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오는 것도 철저히 자신이 선택해서 빌려 왔죠.


당시 은채에겐 어떤 결정, 특히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데 늘 아빠가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 시간을 버는 단어로 “싫어.”를 선택했던 것 같아서, 저는 조금 더 시간을 줬었죠. 어떤 결정을 내리든 은채 스스로 결정할 시간을 줘야 스스로도, 또 아빠도 후회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이렇게 거부와 선택, 이 과정을 통해 자신의 세상이 조금 더 견고해지리라 생각했고요.


양육과 사육 사이에서

앞서, 김미경 씨와 류한욱 씨의 대담에서 류한욱 씨는, 아이 교육에 매몰되어 있는 대치동 엄마를 표현하는 단어로 하녀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얼핏 들으면 자식에게 복종하는 부모처럼 들리죠? 아닙니다. 학원 선택, 스케줄, 입는 것, 먹는 것, 교우 관계와 이성 관계까지 전부 정하고 관리하는 역할입니다. 게임에서 캐릭터를 키우고 관리하는 게이머 같다고나 할까요.


엄마의 역할이 이렇다면 당연하게도 자녀의 역할은 수동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 대담에서 언급됐듯이, 대치동에서는 의대 진학을 위해서는 네 살 때부터 휘어잡아서 생활을 컨트롤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겠죠. 그야말로 공부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공부하는 기계”로 사육되는 것이죠. 그나마 그 공부라는 것도 “입시 공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만요.


전 아주 가끔 딸이 읽을 만한 책이 눈에 보이면 링크를 보내줍니다. 딸도 자기가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저에게 링크를 보내죠.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의 의견을 넌지시 표현한 뒤 함께 탐색해 보자는 것이죠. 요즘엔 가끔 딸이 주말이면, "뭐부터 공부할까?"하고, 물어보곤 합니다. 지금부터 세 시간 정도 공부를 할 건데, 어떤 과목부터 공부하면 좋을지 물어보는 겁니다. 제가 그 마음을 알 리가 없죠. 오늘 뭘 할지 정해놓은 사람이, 그 이상적인 순서 배치도 알겠죠. 그래도 물어보는 겁니다. 그럼 전 과목을 들어보고 말해줍니다. 그럼 또 딸은 그게 좋겠다, 말하고 공부방에 들어갑니다.


물론 그 순서대로 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 순서는 별로라고 말해놓고 그 순서대로 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건 딸의 마음에 달렸죠. 전 그저 딸이 필요할 때 거기 있어줄 뿐입니다. 지칠 때 위로해 주고 힘들 때 힘을 줄 뿐이죠. 외롭게 공부하는 딸의 등이 시려 보일 때면 그 등 뒤에서 가끔 책을 읽을 뿐입니다. 딸은 자신의 길을 선택한 뒤, 묵묵히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 길 끝에 뭐가 있을지 모르지만 자신이 정한 길이기에 스스로 자신을 독려하면서 독립적인 아이로 힘차게 가고 있습니다. 다음 편에선 저 "독립"의 의미에 대해서 심도 있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