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이서 Apr 03. 2021

‘건축하기’ 란 ‘생각있는 집짓기’이다.

생각있는 집짓기

양적인 수요가 질적 수요로 넘어갈 때 봐야 하는 것


사람들은 잘 살기 시작하면 제일 먼저 잘 먹기 시작하고 그 다음엔 잘 입는 것에 관심을 둔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에선 잘 짓고 사는데 눈을 돌린다. 의, 식, 주에 해당하는 것들은 잘살고 못살고를 떠나 삶과 땔 래야 땔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기초생활로써의 면을 넘어서 잘 살게 되면서 사람들이 보이는 속성, 양적인 수요가 질적인 수요로 변환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는 유독 땅과 아파트가 부동산의 최상의 수익모델이고 환금성 대체수단이었다. 아파트를 제외하곤 ' 땅값이지 집값은 없다.' 가 지배적인 생각이었다. 비록 해방과 전쟁이후 70년의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낸 고도성장국가가 가질 수 밖에 없었던 필연의 과정이었다 하더라도 부동산 불패신화나 어린아이들의 장래희망이 건물주가 되어버린 병적인 부동산문화로 고착화 되어 왔다는 것에 반론을 제기하긴 어렵다.

그런 우리사회에 최근들어 집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있는 현상이 보인다. 또한 우리사회의 건축에 대한 관심은 다양한 분야에서 매우 올라갔다. 각종 매체에서 건축을  한 부분을 다루고 콜라보레이션 전시에서 심심치 않게 건축을 만난다.


이런 관심의 시대에 들어선 지금 대중은 건축에 대해 어떤 시각으로 관심을 보이는 것일까?
그럼 일반인들에게 있어서 건축은 어떻게 가늠될까?


건축이라고 인지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 ‘자신이 사는 집은 건축이라 생각할까?’
이러한 의문의 출발은 사람들이 건축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가를 , 건축에 대해 얼마나 가깝게 생각하는지의 기준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유효하다.


어떤 이들은 몸의 촉각까지도 닿는 작은 방에서부터 건축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박물관이나 관공서와 같은 큰건물, 거대한 사무소 빌딩쯤 되어야 건축이라 보기 시작한다. 이를 통해 알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건축을 인지하는데 크게 작용하는 것은 '크기와 보임'이다. 즉, 보통은 개인이 범접할 수 없는 크기 그리고 시각적으로 끄는 다름 , 더 나아가서 미감을 자극하는 요소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건축으로 보느냐 아니냐가 쉽게 결정된다. 이렇게 보는 시각이 건축이다 아니다의 재단요소인 것은 틀린말은 아니다. 건축의 특징들이 생산해 내는 시각적 결과들이니.


건축을 객의 입장에서 보느냐 주의 입장에서 보느냐


여기서 주지해야 하는 부분은 거대한 크기와 다름에 대한 보임으로 건축이다 아니다라는 것을 판단한다는 것은 건축을 '객의 입장' 에서만 본다는 것을 시사한다는 점이다. 자신이 건축을 발생시키는 주체가 되거나 주체적인 입장에 서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일반인들과 대화를 해보면 보편적으로 자신은 건축을 그리 근접해서 생각해야 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않는다. 사실 건축의 스펙트럼은 매우 다양한데, 그것에 비해 일반인들이 건축이다 아니다 인지하는 기준은 매우 작은 정보에 의한 단순하고 좁은 시각에 의해서이며 더우기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영역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하게 국민의 대다수의 로망이 건물주인 나라의 압도적인 관심에 비해 건축의 인식점은 매우 단순하고 좁고 무관심하기까지 하다.

건축을 이야기하는데 주체의 문제가 왜 중요할까?  주체가 되지 않음은 자신이 그 건축물을 생산해내는 주체자의 영역에서는 벗어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누군가의 선도나 때로는 사기치는 것이라 하여도 따라가게 되어있다.


우리주변의 익숙한 현상들, 현재의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수많은 부채를 안고 아파트를 장만하려 달려가고, 개발이 될지 모른다는 섣부른 정보에 그린벨트의 땅을 사기도 한다. 그저 개발업자가 자신의 땅을 이제나 저제나 사갈까? 하는 막연한 희망에 살고 있던 집을 생활환경 개선을 위해 고치지도 않고 살면서 스스로 낙후의 주범이 되기도 한다. 하물며 조금 오래된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아파트가 재개발에 편입되기 위해 구조안전진단에서 구조적으로 위험하다는 판정을 받으면 행가래를 치며 '안전진단통과' 라는 플랭카드를 내건다. 자신이 사는 아파트가 구조적으로 위험하다는 판정에 이렇게 반기는 나라. 이상하지만 우리주변에 늘상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것의 저변에는 건축을 보는 주체자 영역에서 벗어나 있는 생각이 초래한 현상이고 결과이다.


사실상 한 개인이 일생을 통들어 건물을 지어볼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더우기 한국형 기형적 주택시장의 성장의 배면에 있는 주요한 요인인 아파트는 일반이들에게 단순 대입의 이해가 쉬운 주택단위였다. 정부주도형 대단위 단지 계획의 아파트 개발의 도심의 형성에서 어떡하든 삶의 터전을 마련해야만 했던 한국사회의 구성원들은 다양한 주택 건축의  주체에  서본 경험이 턱없이  부족하다.  이것은 한국사회에서 왜 건축물이 단순히 매매의 환금성의 수단이 되어 왔는지에 대한 매우 중요한 하나의 단서가 된다.


하나의 건물이 만들어지려면 그 건물을 필요로 하는 수요자, 진행자인 의뢰인 있을 수 있고, 그 건축물의 설계를 하는 건축가가 있으며 나와진 설계도서를 시공하는 시공사 그리고 본 건축물이 제대로 공공의 영역에 맞닿는 부분에 부합하는지를 검토하는 관청의 공무원이 있다. 이들이 주된 건축물을 만들어내는 직접적인 진행과 관계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건축물 생산에 있어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주체자들이다.


그러니 이들을 제외한 타인은 건축물과 관계없다? 아니다. 건축물은 개별적인 집을 제외하고 건물을 만들려고 하는 우리가 보통 건축주라고 하는 의뢰자외에 그 건물의 사용자가 있다. 건축가들은 그 사용자의 수용과 예상되는 활동을 읽어서 설계를 한다. 그렇다면 건축에 있어서 우리 대다수는 주된 진행자가 아니어도 수많은 용도의 건축물의 사용자이다. 결국 우리가 그 건축을 발생시키는 요소이며 이미 건축하기를 하고 있던 것이다.


물리적인 주체가 아니니 건물이 이렇게 지어지던 저렇게 지어지던 관심을 두지 않음이 건설흐름의 주류에서 벗어나 있게되고 이러한 태도가 결국 자본주의 흐름에 충실한 건물에로만 주목하고 남들이 제시하는 계획과 시장에 바지가랭이가 찢어지게 쫒아가야 하는 삶이 따라온 것일 수 있다.


최근 건축에 대한 관심이 성장하고 있는 시점이 양적인 수요가 아닌 질적인 수요로 전환으로써 중요한 시기이다.  이것은 건축물의 생성에 자신의 이해타산에 기거한 민원과 같은 간섭으로 보라는 것이 아니다. 관심과 간섭은 다르다. 제대로 된 관심은 좋은 건축을 보는 눈을 키운다. 그리고 좋은 건축이 많은 도시는 우리가 사는 환경을 풍요롭게 만든다.


그리고 다른 한편, 건물이라고 하는 것들이 꼭 대규모이고 시각적으로 다름을 보이는 것만이 우리주변에 있는가? 돌아보면 사실 우리 일상을 모두 둘러싸고 있는 것이 건물인데 그럼 이것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하는 질문을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선 다른 일군의 일반인들은 모두가 건축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맞다 광의의 의미로는 다 건축이다. 그러나 실제 보통 그것은 '건물'이다. 농담으로 "그 건축물 어땠어?" 라고 물어올 때,  "응 그냥 건물이었어. "라는 대답이 주는 의미를 생각해 보면 쉽다. 모든 건물이 건축이 되진 않는다.

이것은 건축의 특별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흔히 황당한 행동을 하거나 어이없는 결과는 보고 ‘생각이 가출한것 아니야? ‘하는 농담을 던질때가 있다. 이것으로 보면 이해가 쉽다. 즉, 생각이 없이 지어진 건축은 전문영역에서 건축으로 보기 어렵다. 이것은 라이센스가 있는 건축사가 설계를 했으면,  합법적인 시공자가 시공한 건축물이면 무조건 건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없이 지어진 건물은 건축이라 말하지 않는다.

'건축하기'라 함은 건축이 만들어지기에 참여하는 모든이들의 건축과 관련된 행위를 말한다. 이 건축하기를 할때 제대로된 생각을 담아야 한다.  건축가는 전문적으로 그 행위들을 건축적 언어로 설계를 하고 좀더 나은 삶을 위한 디자인을 제시하고 시공자는 기술적으로 그것을 재현하는 사람들이다. 이들 모두의 단순히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닌 생각이 있게 건물을 짓는 것이 건축이다. '생각있는 집짓기' 가 모든 이들에게 건축일 수 있는 것이다.

왜 '주체적인 건축하기' 를 말하는가?

건축이 만들어지는 영향요소는 너무 많고, 건축의 스페트럼은 매우 다양하다. 그 다양한 분야의 건축을 알고싶고 미래의 건축주를 꿈꾸고 있다면, 자신의 요구를 반영하고 싶다면 준비자세가 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무엇이 건축인지? 라고 인지할 자세가 되어있는가?.


#건축가전성은 #전아키텍츠 #집짓기 #건축적넛지 #eunchun #chunarchitect #Yseo #전이서

매거진의 이전글 사람들은 ‘그래서’ ‘그곳에’ 가고 싶어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