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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이서 May 26. 2018

사람들은 ‘그래서’ ‘그곳에’ 가고 싶어한다.

공간밀도차이가 주는 기쁨

‘사람들의 어디론가 향하고 싶어한다.’ _런던아이 _photo by Eun Chun  2018 봄


몇년전 서울 근교의 신도시가 하나더 생겼을때, 인터넷의 ‘사소하지만 대미’를 장식한 기사는 새로생긴 도시가 새롭게 추구하는 가치나 기존의 도시와 얼마나 다른가 하는 언급이 아닌 그곳에 가보고자 하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 차량체증에 관한 기사였다. 그 교통체증의 주범은 그곳에 생긴 대기업의 거대 쇼핑몰 방문 때문이다. 그 대기업의 복합쇼핑몰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보면 이제껏 우리가 흔히 봤던 쇼핑몰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곳에 담겨져 있는 내용, 건축에서는 이것을 프로그램이라 하는데 그렇게 몰려갈만큼 별다른 프로그램이 아니다. 헌데 왜 사람들은 그 무시무시한 교통체증을 감수하고도 몰려가는가? 의문이 들지 않는가?


새로운 곳에 가보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팍팍한 도시에 사는 도시민의 갈증을 해소해 보고자, 어린아이를 키우고 있는 부모들은 매주 휴일이면 시달리는 아이들의 놀이의 대안공간을 찾아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 새로운 곳이 생기면 제일먼저 달려가본다. 그곳을 한번쯤 가봐야 겠다. 이것은 누구나 쉽게 ‘그래 그럴 수 있지’ 하는 가변운 수긍으로 끄덕일수도 있다. 헌데 , 정말 보이는 그런 이유만일까? 그런 이유라면 한번끝이라 아마 그 대기업의 쇼핑몰은 망할게 뻔한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서울에 있는 백화점에 있는 의류샵들, 음식점들과 별다르지 않은 곳을 왜 그 멀리 교통체증을 감수하고라도 가려하는 것일까? 무엇이 다르지?

그 대기업의 거대 쇼핑몰의 얼마나 좋은가? 건축적으로 훌륭하다? 그 도시에 적합한 도덕성은 갖추었는가 하는 ‘건축적 소양’은 언급하지 않겠다. 그곳으로 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작동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주목하면 건축적 해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건축가의 시선으로 보면 그곳은 공간밀도가 다르다.  그곳에서 사람들의 지배하는 건축적 측면은 공간의 밀도의 차이다. 그곳에는 ‘광할한 번화함’ 이 있다. 한껏 트여진 너른 공간에서 이제껏 보았던 쇼핑을, 놀이를 번잡함이 아닌 번화함으로 만끽하고 싶은 것이다. 사람들은 ‘공간밀도 차이가 주는 기쁨’을 맛보고자 하는 것이다.


도심내 대형백화점과 쇼핑몰들이 차지한 면적을 보면 주거나 오피스에 비해 그 하나의 크기는 상대적으로 절대 작지는 않다. 그러나 그곳은 최대 밀도로 아주 치밀하게 조작된 공간 조직으로 이루어진다. 분명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조직규모의 결과이다. 이러한 곳에서는 쇼핑의 욕망과 배고픔의 욕망이 채워지고 나면 그 나머지 마음의 여유의 공간은 사실상 부여되기 어렵다. 정확한 목적성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 목적성이 집약된 공간이다. 그래서 백화점을 한껏 돌아다니고 나면 피곤도가 높아지는 것이다. 해서 사람들은 쇼핑중간중간에,  밥을 먹고 나서 , ‘커피한잔?’이라는 커피숍을 찾아 헤맨다.  이러한 공간밀도가 매우 높은 곳이 도심내 쇼핑몰이나 놀이공원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곳들이 번잡할 만큼 치밀한 조직을 사람들이 과연 그럼 싫어할까? 하면 사실 그렇지만은 않다. 시장이나 백화점, 음식점은 사실 사람들이 북적북적해야 맛이 난다. 그 적당함은 개인차가 있을 지언정. 그러나 이곳의 북적함에는 잉여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와 물건’, ‘나와 음식’ 의 대면으로 그 시간이 채워진다. 1차적 차원의 대응 공간이라 보면 된다. 무엇보다 목적적 욕망이 우선시되고 그 1차 욕망이 채워지면 그곳은 그만인 것이다. 해서 북적함이 주는 즐거움은 번잡함으로 피곤을 남긴다.


그런 이 잉여의 공간을 도심내에서 없을까? 왜 없으랴, 그러나 이것을 가지려면 비싼 값을 치뤄야 한다.  운영자도 소비자도. 그 잉여의 공간은 물리적으로 공간밀도의 차이에서 발생된다. 도심지에 부여하기 힘든 잉여의 시간, 잉여의 공간이 도심지를 조금 떠나 있는 곳인 그곳에 있는 것이다. 이 잉여의 공간을 비지니스 모델로 삼는 것이 근교의 신생도시의 대기업 쇼핑몰이다. 도심지에서 누릴 수 있는 편의성과 세련됨도 가진 광할한 번화함의 한가운데 사람들을 놓는다 . 그럼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뭔지는 모르지만 무엇인가 채워진 착각에 들게 한다.


여기서 하나 주목해볼 사안은 서울 근교의 , 새롭게 생성된 도시의 대형 복합공간을 찾는 사람들에게 내재되어 있는 심리이다.  가족단위, 연인단위, 친구와 함께 찾는 이곳은 결코 자신을 만나기 위해 가진 않는다. 아마 그곳을 분석을 해야 하는 목적이 있지 않는 한 혼자 그곳을 방문하지 않을 것이다. 가족, 친구, 연인하고 함께 가지만, 그곳에서 사람들이 채우고 싶어하는 것은 쇼핑이 아닌 ‘타인과의 동질성’이다. 이 사회에서 다른이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사회적 안정감’을 가지고 싶어서이다. 나도 ‘함께’했다. 는 사회성을 채우기 위해서 간다. 여기에 특별한 목적도 없고, 익명성까지 갖춘 이 사회적 안정감은 목적성으로 가득찬 공간에선 가지기 어렵다. 목적달성을 했다는 성취감은 채워질언정 지금 현재의 동시대의 사람들과 함께 했다는 사회적 욕망은 채워지진 않는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특별한 목적은  없는 잉여의 시간을 던져줄 공간을 필요로 한다. 더우기 자신만의 공간이 아닌 익명의 사회성이 채워질 곳을 말이다. 현대 사회에 있어서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그러한 잉여가 있을 법한 공간을 찾아나선다.


도시경계부에 새로 생겨난 대기업의 대형 복합 쇼핑몰은 그 건축적 가치나 소양을 떠나 일정기간 유효하게 작동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유효함의 바탕에는 건축적인 ‘공간밀도의 차이가 주는 기대’가 먼저 존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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