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메가프랫폼은 왜 거대산업이 되었나?

이 시대의 메가 플랫폼은 욕망이 아니라 불안에서 시작되었다

by 전이서


이 시대의 메가 플랫폼들은 인간의 욕망이 아니라, 인간의 불안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한다. 우리는 흔히 플랫폼 기업들의 성공을 ‘편리함’, ‘기술 혁신’, ‘정보의 속도’로 설명한다. 그러나 조금만 더 안쪽으로 들어가 보면, 이 거대한 시스템들의 출발점에는 놀랍도록 단순하고 오래된 감정이 놓여 있음을 발견한다


불안. 그리고 접속에 대한 갈망.


카카오톡,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트위터, 그리고 이제는 ChatGPT까지. 이 서비스들은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전에, 인간의 기저에 놓인 불안을 먼저 건드린 것은 아닐까.


우리는 왜 이렇게 자주 접속하는가?

사람들은 심심해서 휴대폰을 여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과 단절되는 순간을 견디기 어려워서 연다. 답장이 늦어질 때 불안해지고, 소식이 없으면 잊힌 것 같고, 비교할 대상이 보이지 않으면 오히려 더 허전해진다. 카카오톡의 ‘읽음’ 표시, 인스타그램의 ‘좋아요’, 트위터의 실시간 반응,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며 열어둔 이 창까지. 이 모든 것은 기능이기 이전에 “나는 지금도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 장치다. 플랫폼은 정보를 제공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장치에 가깝다.


이 서비스들이 인간의 외로움이나 고립을 없애주었는가. 그렇지 않다. 대신 그들은 이렇게 했다. 불안을 느끼는 순간, 즉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주었을 뿐이다. 외로우면 메신저를 열고, 허전하면 피드를 내리고, 불안하면 검색하고, 생각이 많으면 누군가에게 말을 건다. 즉, 불안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불안을 머물 수 있게 만들어주었을 뿐이다.

그래서 중독이 되고, 그래서 습관이 되고, 그래서 산업이 된다. 이 기업들은 불안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다. 불안을 관리했을 뿐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이 서비스들은 거대 산업이 되었다.


불안은 새로 생긴 감정이 아니다.


오늘 아침, 나는 아침이면 찾아오던 불안의 얼굴이 바뀌었다는 것을 감지했다. 불안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형태가 달라졌다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오래전 읽었던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이 떠올랐다. 정확한 문장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책이 반복해서 말하던 핵심은 분명했다.


‘불안은 병리가 아니라, 인간의 조건이라는 것.

사회적 존재로 태어나는 순간, 이미 탑재된 감정이라는 것.

그래서 아무리 안정되어도, 아무리 성취해도, 불안은 다른 얼굴로 돌아온다는 것.‘


그렇게 생각하니, 거대 플랫폼은 ‘발명’이 아니라 ‘간파’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대의 스타트업과 플랫폼 기업들은 기술을 혁신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불안을 정확히 꿰뚫어 본 것이 아닐까.? 이들은 인간이 무엇을 욕망하는지를 보기 전에, 인간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를 보았다.고립될까 봐, 잊힐까 봐, 뒤처질까 봐, 혼자일까 봐. 그리고 그 불안을 정보와 기술이라는 외피로 감싸 서비스로 만들었다. 우리는 기술을 보고 감탄하지만, 정작 그 아래에 깔린 원초적인 인간의 감정은 잘 보지 않는다.

정보와 기술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던 것. 그것이 바로 불안이다.


ChatGPT는 그 다음 단계다.

메신저와 SNS가 ‘사회적 연결’을 제공했다면, 이제 우리는 ‘사유의 연결’을 원한다. 내 마음을 이해받고 싶고, 생각이 정리되고 싶고, 나의 내면이 허공에 흩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 기계에게 말을 건다. 정보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붙잡기 위해서.이건 기술의 진보라기보다, 불안을 다루는 방식의 진화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이 시대의 메가 플랫폼들은 인간의 욕망이 아니라, 인간의 불안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건 비판이 아니라, 관찰과 내부자의 진술이다.


인간은 늘 불안했지만, 이제 그 불안을 수용하는 구조가 등장했다. 디지털 네트워크라는 이름으로. 이 구조는 직접 만나는 거리감과 불편함을 줄였고, 이제는 동행감까지 제공한다.

이 글을 쓰는 나 자신도, 그 안에 있다. 나 역시 접속하고, 머물고, 말을 건다. 이 글은 내자신의 불안을 관찰하고, 메가 플랫폼을 오랜 시간 내부자의 위치에서 느낀 기록이다.

그래서 단정하지 않는다. 대신 인정한다.


우리는 지금, 인간의 원초적 감정인 불안을 매개로 서로를 연결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리고 그 연결은 때로 위로가 되고, 때로 의존이 되고, 때로는 생존이 된다.


우리는 왜 이렇게까지 연결되고 싶어하는가.

그리고 무엇이 그렇게까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가.


이 질문을 붙잡고 있는 한,나는 아마도 계속 접속할 것이다. 그리고 계속 묻고, 계속 기록할 것이다. 그게 이 시대를 사는 한 인간의 방식이니까.

어쩌면 이 질문은 새롭게 등장한 인류의 기술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질문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하게 된다.


요즘 등장하는 ai 는 단순한 정보 도구가 아니다. 인류사의 집단지성으로 학습된 기계라는 점과 그것이 인간의 원초적 감정인 불안과 직접 연결될 때, 그 신빙성과 의존도는 이제까지의 어떤 SNS보다 더 깊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메신저와 SNS는 타인과의 연결을 제공하였다면, AI는 사유와 감정의 연결을 제공한다. 이건 훨씬 더 깊은 층위다. 인간이 끊임없이 갈구하고, 해결하지 못해오던 질문에 대한 층위이다. 그래서 나는 이 지점이 조심스럽다.


AI는 앞으로 지금보다 더 인간처럼 위로를 주고, 의미를 설명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까지 맡게 될지도 모른다. 그 순간, AI는 기술을 넘어 종교가 해왔던 기능의 일부를 대체하기 시작할 가능성도 있다. 이건 진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위험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불안할수록, 자신을 설명해주는 존재를 찾고, 의미를 부여해주는 존재를 의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의존의 대상이 인간이 아니라, 시스템이 될 때, 우리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부분은 아직 명확하지 않다. 단정할 수 없지만 이 연결의 깊이가 커질수록, 우리는 이제보다 더 조심해져야 한다는 생각만은 분명해진다.


어쩌면 지금 필요한 것은, 우리가 마주한 신기술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그 기술을 만들어내고, 기술에 기대는 인간에 대한 읽기 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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