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불안이 얼굴을 바꿨다.

우울과 피로라는 지연된 청구서를 받은 이의 아침 불안의 소고

by 전이서



아침의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아침에 눈을 뜨자 불안이 있었다. 심장이 요동치지는 않았고, 공포처럼 밀려오지도 않았다. 대신 아주 조용하게, 그러나 집요하게 내가 맡고 있는 일들, 다가올 미래, 그리고 내가 잘 해내지 못할 것 같은 현실적인 이유들이 차분한 얼굴을 하고 떠올랐다.


처음에는 나는 이것을 불안폭주인 줄 몰랐다. 너무 잔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을 두고 바라보니 이 역시 아침에 찾아오는 분명한 불안폭주였다.

몸이 아니라 생각의 층위에서 일어나는 불안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 하나 있었다. 그 불안 속에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아침 새벽의 이 어두움이 좋다’라고. 어스름하게 푸르러지는 일요일 아침의 이 고요함이 좋다고 ‘ 그렇게 마음속에서 내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아침이면 찾아오는 불안폭주 속에서 ‘좋다’라는 단어가 나온다는 사실은 나 자신에게도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불안한데 좋다 ‘란 말이 나온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흥분상태를 수반하는 기대감에 따른 불안정한 상태도 아닌데 말이다.



아침에 불안이 시작되는 생리적 이유들


불안을 섬세하게 느껴지면서 나는 많은 심리학책과 뇌과학책을 봤다. 그 정보에 따르면,


아침 불안은 종종 성격이나 마음의 문제로 오해된다. 하지만 많은 경우, 그 출발점은 생리적 변화다. 사람의 몸은 깨어나기 30~60분 전부터 코르티솔이라는 호르몬을 급격히 분비한다. 코르티솔은 흔히 ‘스트레스 호르몬’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몸을 깨우는 각성 호르몬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 각성 신호가 몸에서는 “일어나라”로 작동하지만, 의식에서는 종종 “대비하라”, “점검하라”, “위험은 없는가”로 번역된다는 점이다.


여기에 수면 중 낮아진 혈당, 탈수 상태, 부교감신경에서 교감신경으로 전환되는 자율신경의 불안정, 그리고 꿈에서 남은 감정의 잔상까지 더해지면 아침의 몸은 특별한 사건이 없어도 불안을 만들어낼 충분한 조건을 갖추게 된다.


이때의 불안은 직감도 아니고 예언도 아니다. 그저 깨어나는 몸의 소음에 가깝다.



그런데 왜 어떤 사람은 불안해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을까?


같은 생리적 조건에서도 사람들의 반응은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아침의 각성을 불안으로 느끼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느낀다.


“해야 할 일이 많다.”

“지금 움직이면 좋겠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이들은 불안을 불안으로 인식하기 전에 곧바로 행동과 과제의 언어로 번역한다. 불안은 생각에 머무르지 않고 행동으로 빠져나간다. 그래서 이들은 종종 말한다.

“일하면 오히려 안정된다”라고.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이 생리적 신호를 그대로 감각으로 느낀다. 심장의 리듬, 생각의 속도,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움직임을 멈춰 세워 바라본다.

이들은 불안을 행동으로 태우기보다 의식의 표면으로 끌어올린다.


불안을 느끼는 사람과 느끼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용기의 문제가 아니라

뇌의 번역 방식의 차이에 가깝다.



나는 어느 쪽이었고,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나 역시 한때는 불안을 행동으로 태우는 사람이었다. 해야 할 일을 하면 불안은 잠잠해졌고, 움직이면 괜찮아졌고, 그 방식으로 나는 오래 버텼다. 하지만 그 방식에는 지연된 청구서가 있었다. 우울과 피로라는 이름의.


지금의 나는 그 청구서를 이미 받아본 사람이다. 그리고 그렇게 한 번 인식한 지점을 다시 모른 채로 되돌아가기는 어렵다. 그래서 오늘 아침의 불안은 예전과 달랐다. 불안은 있었지만 그 불안이 처음에 불안인 줄도 헸갈렸고, 아침이면 찾아오던 불안폭주의 다른 모습이란 것도 다만 다른 것은 나의 세계 전체를 덮지는 못했다. 는 사실이다.


나는 어두움을 원래 무서워하는 사람이다. 그것이 아침의 어두움이던, 밤의 어두움이던 어두움을 무서워하는 이였다. 한때는 잠을 잘 때 불을 켜고 잠을 자야만 하는 사람일 정도로, 그런 나에게 아침의 어두움이 좋다는 감정은 정말 놀라운 반응이었다.

오늘 아침의 어두움이 좋았고, 푸르스름한 일요일 아침의 정적이 좋았다. 그것은 불안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불안이 모든 감각을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불안이란 존재를 안 이후의 삶에 대하여


아침의 불안은 반드시 제거해야 할 적이 아닐지도 모른다. 때로는 깨어나는 몸이 내는 조율되지 않은 신호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그 불안을 어떻게 내 뇌가 번역하느냐이다. 뇌의 번역반응은 꽤 많은 반복된 일상의 학습결과이다. 그 학습은 나의 생활 속에 느껴졌던 반응들의 총합체로 뇌가 인식해서 나오는 반응이라 내가 완벽히 통제하거나 기대한 데로 나오지는 않는다. 오늘 아침의 신기한 체험처럼.


행동으로만 태우며 살 것인가, 아니면 불안을 알아차린 채 조금 느리게 움직일 것인가.

나는 이제 안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실패가 아니라는 것도. 불안은 여전히 오지만, 그 와중에도 “좋다”라고 말할 수 있는 아침이 있다면,

그것으로 오늘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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