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집짓기는 처음이라, 두 번째 이야기_ 내집짓기의 사회적 가치
내집짓기 이야기를 하면서 그 첫 번째 이야기로 '당신의 상상의 집짓기는 어땠느냐? 묻는 것에 의아해했을 수 있다. 그 이유는 잠자고 있는 본능을 깨울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건축가가 보기에 한국사회의 사람들은 공간을 읽고 상상하는 능력, 특히나 자신에게 맞는 적정한 집을 볼 수 있는 세포가 죽어있다. 이것은 개인의 공간지각 능력을 폄하해서가 아니다. 그간 한국 주거 역사로부터 오는 부작용을 우리 모두 안고 있기 때문이다.
주어진 공간에 익숙해져 버린 사람들
한국의 경우 1970년부터 시작된 대규모 단지 중심의 아파트의 공급은 사람들을 획일화된 공간에 익숙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주거 공간의 발화 자체 어려운 구조였다. 아파트 외에는 진화할 시간도 갖지 못했다. 다양한 공간적 경험이 많아야 좋은 공간이 무엇인지, 자신과 맞는 공간이 어떤 것인지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기회가 사회적으로 주어지지 못한 것이다. 공급자 중심의 제공된 공간을 그저 받아 들 일 수밖에 없던 사람들은 공간에 대한 가치를 아파트 10평, 17평, 25평 , 35평 45평이라는 면적의 욕망에 머물게 된 것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자신들이 고를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나의 주거 결정권은 어디에?
더욱이 그 아파트 단지가 20년 30년마다 이어지는 재개발, 재건축은 아파트 가격이 폭등하는 시스템으로 연결되었다. 이제는 사회 전반에 걸쳐 모든 부동산 시장을 움직이는 거대 괴물이 되었다. 주거가 환금성으로 대체되었을 때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들의 삶'을 담보로 한다는 것에 있다. 삶과의 조율전에 가격을 따라야 하고, 결국 그렇게 그곳에 들어간 사람들도 미래의 가격만이 주거의 가치로 보는 사람이 된다. 자신의 주거의 선택을 당첨이란 제도에 의존해야 한다던가, 현재 자신의 소득 수준을 훌쩍 넘어 영 끌을 해서라도 아파트를 사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재건축 관련해서는 더 해괴한 현상을 자주 본다. 자신들이 사는 아파트가 구조적 안정성에서 위험하다는 결과에 경축이란 플래카드를 거는 나라가 어디에 있을까? 재건축이 될 것이라는 소문만 나도 낡은 아파트는 주변의 그 어떤 건물보다 가격이 폭등한다. 그때부터 그렇게 비싸진 아파트는 수도꼭지에서 녹물이 나와도, 꼬질꼬질 더러워져도 쓰레기가 쌓여도 고치지 않는 집이 된다. 자신의 집에 대한 애정이 오직 돈에만 집중될 때 오는 문제이다. 환금성은 투자대상이 되기 때문에 자신이 주거로 필요로 하지 않은 수십 채의 아파트를 투기목적으로 굴리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생기게 된다. 수요자의 필요와 그것을 움직이는 요소의 간의 불균형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주어진 공간에 자신의 삶을 맞춰서 살아왔던 사람들이, 환금성으로 대체된 주거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공간의 질을 보고 자신의 삶에 적정한 공간에 가치를 매기기란 쉽지 않다. 경험도 부족하고 학습도 되어 있지 않으니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의 한계도 있다. 그러다 보니 아파트의 브랜드에 집착하고 어떤 아파트에 사느냐에 따라 계급층을 만들어 자신이 지불한 가격을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려 하는 현상이 생긴다.
그렇다면 아파트는 나쁜 건축인가?
아니다. 과밀화되는 도시에서 아파트와 같은 주거유형은 필수 불가결한 공동주택유형이다. 경제학에서 주로 쓰는 용어로 '규모의 보수'라고 일정 규모 이상이 될 때 수익이 나고, 많은 다수가 함께 공동으로 할 때의 얻을 수 이득이 대단위 공동주거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규모의 보수 측면에서 보면 아파트는 더 싸고, 가장 보편적인 가격이 되어야 한다. 문제는 대단위 공동주거는 분명 가장 보통사람들을 위한 곳이어야 하는데 현재 한국에서는 가장 비싼 주거유형을 대표한다는 데에 있다.
오랜 시간 집중화된 산업은 발전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단지형 아파트가 야기시킨 도시의 경계 짓기 문제를 떠나 물리적인 측면에서 한국의 아파트 자체만으로는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 공동주택의 수준이 높아지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최근에는 아파트 설계에 건축가들이 개입되면서 기존의 아파트 형식을 넘는 다양한 아파트들도 등장하고 있다. 필자도 얼마 전 공동주택 설계공모를 통해 당선이 되었고, 제안한 새로운 타입의 아파트가 지어지고 있다. 특히나 요즘 SH, LH 임대아파트는 설계공모를 통해 선정된 좋은 설계안으로 예전의 임대아파트랑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임대아파트들이 지어지고 있다.
당연히 위치와 건축적으로 더 좋은 아파트가 나올 수 있고, 그에 따라 가격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의 아파트 가격은 다른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는 데에 있다. 건축적으로 좋은 아파트여서, 좋은 환경이어서 가격이 높은 것이 아닌 재건축, 부동산 광풍에 의해 아파트 가격이 오르내림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대다수는 평생 티끌모아 산 아파트에 그 아파트에 그대로 살고 있는데 아파트 가격은 폭등을 하고 다른 요소에 의해 오르내린다는 사실이 새로 집을 장만해야 하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한다. 여기에 더불어 브랜드 아파트에 사느냐, 임대아파트에 사느냐에 사람들을 계층화하는 인자로 수요 공급에 작동하고 있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가격의 결정에 수요 공급의 법칙은 중요 인자이다. 아파트의 수요가 많으니 공급이 부족하다면 수요공급의 법칙으로 가격이 올라간다. 그 수요의 쏠림현상이 왜 생길까? 단순히 아파트 공급이 부족해서만일까? 아니다.
아파트 단지 외의 동네들은 어떠한가?
한국의 경우 아파트가 그 어떤 주거보다 우위를 가지는 것은 단순히 아파트가 환금성이 좋다는 문제만은 아니다. 오랜 시간 대량 주거공급이라는 미명 아래 도시인프라가 아파트 중심으로 구성되다 보니 그 나머지 지역은 상대적으로 낙후되는 문제점을 낳았다. 도심 안에서 내집짓기를 하려 땅 찾기를 해보면 아름다운 동네를 만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된다. 오랜 세월 도시주거의 불균형이 지속되고 있는 현장을 눈만 돌리면 금방 만날 수 있다. 아파트가 아닌 주거시설은 투자대상에서 낮은 점수로 인해 은행 대출도 어렵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살던 지역에 대한 애정도 떨어지고, 더 좋게 만들려는 노력도 들이기 쉽지 않다. 자신 소유의 땅과 집을 가지고 있음에도 아파트를 가지 못한 다음 계층이 사는 동네처럼 여겨지게 되는 부차적인 문제점을 가진다. 더 나쁜 현상은 이제나 저제나 내가 소유한 땅이 몰수되어 재개발이 되길 바라는 이상한 현상에 목매게 되는 것이다. 타자에 의해 자신의 삶의 터전이 바뀌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한국의 동네의 수준은 상업시설의 의존도가 높다. 그 동네에 들어와 있는 카페 등 핫플레이스라는 상업시설에 따라 좋은 동네, 아닌 동네로 나뉘고, 유행처럼 동네를 옮겨 다니며 뜨는 동네, 지는 동네를 양산한다. 여기에도 일상의 삶이 가져야 하는 정주성의 가치는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
자신의 삶을 좀 더 충실히 담아줄 공간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내 집 짓기를 하고자 사람들이 있다. 아파트와 같은 획일화된 공간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에 적정한 공간에서 살고 싶은 사람들, 마당이 있고 자연을 곁에 두고 싶어 하는 사람들, 내가 살아왔던 터전에서 더 나은 집으로 탈바꿈하고 싶은 사람들, 일의 성격상 주거와 일터가 한건물에서 있는 것이 유리한 사람들, 비싼 아파트를 깔고 앉아있느니 집도 되고 일정 부분 수익이 나는 대체되는 부동산을 가지고 싶은 사람들, 그리고 공동생활이 힘든 사람들이다. 무엇이 되었던 사회의 주류의 생각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움직여야 하니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사실 아파트 제일주의인 한국에서 내집짓기를 감행하는 일은 자신의 삶의 주체성에 있어서 확신이 없으면 힘든 일이다.
보통 내집짓기라 하면 하면 단독주택으로 국한해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건축가가 보는 내집짓기는 그 주체에 내가 있는가 없는가로 결정된다. 전원주택을 포함한 도심의 단독주택뿐 아니라 일부는 임대를 주고 내 집이 있는 상가주택, 다가구 주택, 등 자신의 일터가 붙어있는 건물, 근린생활시설이 붙어있는 건물, 회사의 작은 사옥 등 건물의 주체에 내가 있다면 다 내집짓기에 해당한다. 주체적인 생각과 내 삶과 직결된 포인트 있다면 내집짓기이다.
이제 우리 도시는 특별한 애정이 필요하다.
삶과 직결된 주체적인 생각은 주거의 다양성을 낳고, 자신의 집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발생한다. 특별한 애정을 갖는다는 것은 가꾼다는 것이며, 가꿈을 받은 건물은 그 주변을 아름답게 한다. 개발자에 의해서 아니라 나 자신이 동네를 다르게 만들 수 있다. 나 자신을 위해 만든 작은 집이, 작은 건물이 동네가 좋아지는 초석이 되고, 그런 건물이 한두 개씩 더 늘어나면 자신이 속한 동네의 거주환경은 저절로 좋아질 수 있다. 거주환경이 좋아진 동네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찾게 된다.
내집짓기에 뛰어드는 사람들이 도시의 새로운 희망이다.
단지형 아파트 중심의 도시의 인프라에서 상대적으로 밀려나 있던 도심 내 많은 저층 주거지들에 최근에 조금씩 변화가 있다. 예전에 소위 집장사 집이 다수 차지했던 다가구, 다세대를 새로 짓는데 건축가들을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 전국으로 본다면 아직 그 숫자가 많다고 보긴 어려워도 이제와 다른 형식의 잘 만들어진 소규모 공동주택들이 등장하고 동네의 이미지를 바꾸고 있다. 이들은 더 이상 아파트를 못 간 계층의 집이 아닌 나름의 특색을 지니고, 자체적인 커뮤니티 공간을 가진 특히나 1인, 2인 주거로서는 손색없는 작은 공동주거를 도시에 제공하고 있다. 보통 이들의 시작에는 내집짓기의 애정을 가진 건축주가 있다. 보통 그런 집들의 한세대에 그 주인이 살고, 일부를 임대나 다른 공간으로 활용하는 형식을 취한다. 자신의 충만을 위해서 만든 집이 도시에 괜찮은 주거를 제공하고, 동네의 한 귀퉁이를 밝게 밝히는 것이다.
전원주택도 예외는 아니다. 택지 개발자가 제공하는 국적을 알 수 없는 이상한 목조 주택이 들어서던 전원주택단지에 최근 들어서는 하나둘씩 잘 지어진 전원주택이 들어서고 있다. 예전에 돈 많은 사람들이 추가로 짓는 별장이 아니라, 전원에서 삶을 영위하고픈 사람들이 소박하지만 자신의 삶에 맞추어 건축가과 오랜 대화로 만들어진 그들만의 집이 들어서고 있다. 대체로 이런 주택의 집주인들은 그 크기는 작아도 자신들의 집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곳에는 자신들의 적정한 삶을 담아낼 공간이 있고, 내재적 삶을 충분히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이렇듯 내집짓기로 만들어진 도심의 주거가 도심의 새로운 풍경이 되고, 전원주택이 한국의 자연과 어울려진 풍경이 된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사항이 도시의 저층 주거지에 정책적 지원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아파트 단지가 재개발, 재건축으로 계획에서부터 입주로 걸리는 시간은 보통 10년 이상 소요된다. 그 속도로는 주거의 공급을 수요만큼 하기 어렵다.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던 저층 주거지에 새로운 도시의 가능성이 있다. 이곳에 도시 인프라를 투입해야 한다. 아파트에 집중되어 있는 대출을 저층주거지 개발에 투입할 수 있게 정책적 지원이 있어야 한다. 개인의 애정이 담긴 하나하나의 건축물이 늘어날 때 도시는 자연스럽게 바뀌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