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번째 이야기
당신의 집에서 나의 집으로
뒤로 내리쬐는 뽀얀 햇살때문에 마주한 나는 마치 시타르타 부처의 머리뒤 후광이 비치는 듯했다. 보통 그 자리에는 나를 찾아오는 의뢰인이 앉는다. 하긴 의뢰인이라면 당연히 후광을 비칠 수 있겠다. 계약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니 얼마나 밝게 보이겠는가? 그러나 지금그곳에는 내가 앉아있다. 그는 내게 돈을 주는 사람이 아닌 내돈을 쓰게 하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타세콰이어 숲을 가득 담은 남향의 창으로 비치는 햇살 덕택에 뽀샤시한 석가모니 후광효과는 충분히 내고 있었다.
실제 이곳은 남향은 아니다. 정확히 나침판을 갖다대면 동남향을 가르킨다. 그러나 물이 흐르는 방향인 양재천변과 일렬로 마주한 건물의 배치는 마치 정남향인양 착각을 일으킨다. 나역시 정남향으로 알았다. 이동네 분들은 다 그쪽이 남향인줄 아신다. 이런 착각이 어떤 선택을 건물에 남기게 되는지 알고나면 어의 없어 할것이다. 처음 이사를 왔을때 남향으로 이렇게 창이 있는데 왜 어둡지? 어둡지? 했었다. 시간이 지나고 디지탈 나침판을 몇번 돌려보고서야 확인한 사실은 그곳은 거의 동향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이른아침이 아니면 해가 그리 많이 비치지 않는 이름만 남향. 대신 일찍 출근하는 아침이면 창가득 들어오는 메타세콰이어 숲과 함께 정말 아름다운 햇살을 볼수 있다. 나는 늘 그것을 바라보며 일할수 있게 내방의 위치와 가구를 배치하였다. 그곳에서 나의 의뢰인과 마주하고 긴 이야기를 나눈다. 좀더 친숙해지면 그 숲을 같은 방향에서 보며 담소를 나눌수 있는 그 앞 바카운터 테이블에 앉는다.
그렇다고 실제로 내가 의뢰인의 자리에 앉았다 내자리에 앉았다 하는 드라마에나 있을 법한 싸이코같은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상상속의 내가 마주한 내 모습이다. 사실 직접 그럴필요도 없는 것이 나는 의뢰인분들이 그자리에 앉아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면 나는 이미 그들에게 빙의되어 그들의 이야기에 반응하여 실시간으로 공간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무당이 굿을 할때 빙의된다는 그 신들처럼. 다만 다른것은 나는 전문가의 답변을 한다는 것. 나는 신은 아니다.
'내집을 짓는 다는 것은 나의 과거, 현재, 미래가 한꺼번에 오는 일’
의뢰인이 찾아오면 나는 우선 듣는다.
집이야기가 아니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편히 해보시라 한다. 물론 건축가를 찾아왔는데 당연히 대다수의 분들이 땅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신다. 토지대장을 보여주신다. 그런 서류를 미쳐 가져오지 않으셨다 하시더라도 내땅이 어디에 있다. 지번을 말씀하신다. 자신보다 땅을 먼저 이야기 하신다. 과연 내집을 짓는데 땅이 먼저일까?
짓기냐? 사기냐? build vs buy
집을 사는 것과 집을 짓기의 차이는 그곳에 담겨질 삶의 시간의 길이에 있다. 이미 지어진 집을 살때 보통 우리가 고려하는 것은 ‘현재’이다. 특히나 아파트와 같은 보편적 집의 형태를 가진 집을 사는 것은 지금 현재에 집중된다. 그곳에는 나의 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전의 삶은 사라진다. 이미 짜여진 아파트의 구성에 나를 맞추는 일이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가 기성복을 살때 현재에 맞춰 사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다. 이미 만들어진 옷을 사면서 나의 과거를 고려하고 머나먼 미래를 생각하고 옷을 고르지 않는다. 집을 사는 일도 비슷하다. 머나먼 미래, 더 나아가 나의 2세가 그곳에 사는 것까지 고려하지 않는다. 고려하기도 쉽지 않다. 한국형 아파트는 20년 30년이 지나면 재건축을 원하는 다수의 주민으로 나의 익숙한 삶과 공간을 지켜내기도 쉽지 않다.
이것이 아니면 다르지 않은 반복의 연속이다. 아파트에서 아파트로 이사를 갈 경우에는 지난번과 다르지 않은 반복된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 반복된 공간에는 현재와 과거, 미래의 삶의 구분이 모호하다. 누구라도 다 비슷한 일상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집을 짓는 일은 그럼 어떠할까?
내집짓기는 과거의 나로부터 시작된다. 과거라고.? “집을 짓는 것은 미래의 삶 아닌가요? ” 할 수 있다. 맞다. 미래를 꿈꾸며 찾아오신다. 그러나 그 미래에는 과거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과거에 살았던 공간이나 집에서 이런 점은 싫으니 이것은 이렇게 바꾸고 싶다. 이런 점은 좋으니 이것은 지속하고 싶다는 여러 바램들이 녹아들어간다. 그래야 그 새집에서의 삶이 행복하다고 느낀다. 이것을 적정히 조율해 주는 것이 건축가가 하는 일이다. 덧붙여 그곳에서 의뢰인은 발견하기 어려운 새로운 삶의 풍경을 선사하고 그들만의 서사를 만들어 주는 것이 건축가의 역할이다.
그래서 내집짓기의 건축작업에서 의뢰인의 일상적 이야기는 중요하다. 그만이 누릴 수 있는 앞으로의 삶의 중요한 단서들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바깥의 회사생활이 복잡하고 스트레스가 많은 직업을 가졌다면, 집에 돌아와서는 조용히 아무에게도, 가족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쉴수있는 공간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것은 크기기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이다. 바깥의 생활이 조용하고 눌려있는 시간이 긴 생활이라면 집에서는 탁트여진 세상을 볼수 있는 여유있는 공간이나 간단한 운동을 할 수 있는 활동이 가능한 공간이 필요하다. 이런 상보관계의 공간을 만들수 있는 것이 내집짓기이다. 이것은 물리적으로 공간을 어떻게 꾸미는가 와는 다른 이야기이다. 보이지 않던 공간을 만들고 가질 수 없던 시간을 갖게 해주는 것이 내집짓기 이다.
내집짓기에는 과거의 역사, 현재의 욕망 그리고 먼 미래의 안착까지 상상하고 만들어진다. 그 미래는 현재의 나를 넘어서 나의 2세의 삶까지도 연결된다. 가족과 나, 홀로 되는 시간을 가늠하여 계획된다. 집을 사는 것이 현재에 국한된다면 내집짓기는 서사도 길고, 상상의 깊이가 다르다. 자신과 엮여있는 가족, 문화, 경제 모든 것의 복합체로 그 영향의 주고받음의 결과물로 이제의 인생 그 어떤 사건보다 큰 일이다. 상상만 하던 모습이 물리적 실체로 등장해 내 삶을 이제와 다르게 만드는 일이다.
‘나랑 맞는 건축가와 함께하기 ’
보통 건축가를 찾아오는 시기가 땅이 다 결정되고 온다. 그러나 추천하는 바는 땅을 고르는 일부터 자신과 맞는 건축가와 함께하길 권한다. ‘내집을 이렇게 만들어주세요’ 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은 이렇다오. 그러니 내게 맞는 집은 무엇이오?” 대화가 가능한 건축가를 선정하는 것이 좋다.
집을 의뢰하기전에 자신과 맞을 것 같은 몇명의 건축가를 만나 상담하는 것을 추천한다. 이때 무료로 집을 그려보셔요 가 아니라, 소정의 상담료를 지불하고 자신의 인생에 대해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는 건축가를 만나는 시간을 가져보라는 것이다. 하다못해 점집을 보러가서 사주팔자를 보고, 신년이 되면 인터넷으로 토정비결을 볼때도 비용을 지불하면서, 자신의 인생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듣고, 전문가로서 그에 맞는 집을 답을 제시해 주는데, 우선 무료로 안을 보여주셔요? 라는 것은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어찌보면 인생에서 단한번일 수 있는 내집짓기인데, 우리사회는 그 비용과 시간의 가치에 대해 너무 인색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일이다. 내집짓기에 앞서 여러분의 선택은 어떠하신지요?
글쓴이: 전이서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건축가이자 교육자이다. 현재 전아키텍츠의 대표이며 성균관대학교 건축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서울시 공공건축가, 세종시 행복청 공공건축가, 서울시 교육청 학교건축가로서 공공의 영역에서 사회적 활동을 하고있다. 2015년 문화채널 Art & Culture <건축을 만나다> 건축큐레이터로서 객원진행자, 2014년 조선비즈의 <행복한 건축> 건축칼럼니스트로 활동하였다. 더 나은 삶과 도시를 만드는데 도움이 되는 건축적 시선을 전하고자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