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책을 사 온 남편
남편이 37년 동안 젊음을 불사른 사업장에서 물러나 퇴직했다.
K 직장인의 삶에 고민과 갈등은 기본, 남편은 그 숱한 갈등을 잘 참아내고 정년퇴직을 했다.
은퇴를 앞둘 무렵, 그리고 은퇴 이후인 요즘에 만나는 사람마다 묻는다.
"은퇴 후 뭐 하실 거예요?"라고... 아마 나도 은퇴하는 지인들에게 똑같이 물을 것 같다.
"37년 동안 열심히 일했으니 이제 쉬어야죠." 우리는 이렇게 대답한다.
맞벌이 부부였던 우리는 주로 내가 살림을 맡아했으나 나는 직장 일이 더 쉬웠고 살림은 매우 서툰 아줌마였다. 하지만 직장을 다니면서 나름 최선을 다했다. 그러다 보니 나도 이제 은퇴가 3년 남짓 남아 직장 말년에 접어들었다. 그동안 선배들이 은퇴 후의 여정에 대해서 초집중 관심을 가질 때 유난스럽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나에게 닥치고 보니 예삿일이 아닌 게 맞다. 인생 2막이라고 하니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수입도 줄어들 것이고 생리적으로 노화도 진행되는 상태이다. 그러다 보니 은퇴 후의 삶이 본인도 궁금하고 주변 이웃들도 궁금할 밖에...
우리의 은퇴 후 삶, 그러니까 스케치 정도의 밑그림에서 일단 남편이 밑색을 칠하고 있다.
일단, 먼저 은퇴한 남편은 내가 은퇴할 때까지 살림을 해주겠단다. 살림 못 하는 나에게는 매우 감사한 말이다. 그러나 그동안 주방 일은 거들떠도 안 보던 남편이 과연 할 수 있을까 싶기도 했다.
드디어 남편이 은퇴한 후 첫날이었다. 남편은 나의 퇴근 시간에 맞춰 정말로 밥상을 차려 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첫 메뉴는 김치찌개였는데 양을 정확하게 2인분이 딱 맞게 끓여 놓았다. 별로 기대를 안 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남편이 차려준 밥상에 나는 감동 감동 그런 감동이 다시없을 만큼 감동을 했고 감사히 저녁 식사를 했다. 두 번째 날은 황태계란국, 세 번째 날에는 충무김밥이었다. 오징어를 안 먹으니 어묵으로 대신한 맛있는 충무김밥이었다. 이후 남편의 메뉴는 주로 단품이었고 분량도 딱 2인분이었다. 그날 이후로 하루도 메뉴가 겹치는 날이 없었다. 전에도 가끔 남편이 음식을 만들어 준 적이 있었고 그때마다 맛있었으나 정말로 몇 번 못 먹어봤다. 그때의 메뉴들은 주로 고기 요리였고 요즘 같은 아줌마 메뉴는 아니었다. 나보다 더 밥상을 잘 차리는 남편~
어느 날 남편은 혼자서 서점엘 다녀왔다며 요리책을 한 권 사 왔다. 밥상을 위한 가이드북이 필요했던 것이다. 제법 두툼한 요리책을 사 온 남편은 책에 나온 요리를 모두 도전해 보겠단다.
한 번은 남편이 들기름 막국수를 만들었다. 살림이 너무나도 낯선 아줌마인 나도 들기름 막국수를 만든 적이 있었다. 그때의 들기름 막국수는 참사 그 자체였다. 간장의 양을 못 맞췄던 그때의 참사를 브런치에 올렸었다.
그런데 울 남편, 너무나 맛있는 들기름 막국수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간도 딱 맞고, "들기름 비빔막국수"와 "들기름 동치미막국수" 두 가지를 동시에 만들어 놓았다. 그렇지~~. 이게 바로 들기름막국수지.
남편의 들기름 막국수는 성공이었다.
남편은 요리책을 사온 후 그 책을 독파하는 중이다.
그리고 나는 매일 저녁 기대에 부풀어 퇴근을 한다. 그렇게 몇 달 동안 새로운 메뉴로 저녁을 꼬박꼬박 대접받은 나는 평소의 몸에서 2킬로그램이나 살이 찌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