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에전망대의 여름
안반데기...
참 토속스러운 지명이다.
이름답게 넓은 안반의 느낌이 묻어난다.
어렸을 때 우리 엄마는 엉덩이가 큰 사람을 일컬어 "궁둥이가 안반만 하다"라고 하셨다. 그때는 그게 무슨 뜻이었는지 몰랐고 살면서도 딱히 의미를 유추해 볼 일이 없었다. 그러다가 우리나라 하늘에 고기압 골이 넓게 형성되어 습하고 푹푹 찌는 무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7월 중순에 하루 짬을 내어 안반데기에 다녀왔다.
오늘 기온은 37도라고 하는데 그나마 무더위가 시작되는 그날은 그럭저럭 30도였다. 그래도 더위에 아직 적응되지 않았던 터라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였다.
아무튼 서울을 피신하기로 하고 무작정 달려 강릉으로 갔다. 남편의 기억으로 찾아 올라간 안반데기. 장기전인 코로나에서 우울하지 않게 살아남는 방법은 자동차를 이용하는 것이다. 자동차로 여기저기 전국을 누비되 되도록 차 안에 머무는 여행이다. 비행기를 타고도 목적지에 도착하여 착륙은 하지 않고 다시 돌아오는 여행 패키지기 있듯 자동차로도 그 비슷한 걸 하는 거다. 물론 한 지붕이고 사는 가족끼리만 가능이다.
안반데기는 처음이라 호기심과 기대감이 좀 있었다. 한적하고 꼬불꼬불한 오르막길이다. 해발 1,100미터라고 하니 아무리 완만히 올라가도 오르막은 오르막.
오르막 끝에 말 그대로 안반과도 같은 넓은 고원이 펼쳐있다. 안반은 떡을 칠 때 사용하는 넓고 우묵한 나무절구 모양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안반의 언덕에서 안반덕길이라 이름 하다가 강원도 사투리가 배인 데기로 바뀌어 안반데기가 되었단다. 산꼭대기에 자리한 넓고 우묵한 떡판 같은 고원에서 안반데기 주민들의 삶이 지나갔고 지나가는 중이고 또 지나갈 것이다. 이곳 고랭지에서 나는 배추는 국내 생산량의 절반이라고 하니 이곳에서 나온 배추, 양배추, 감자는 이미 내 몸의 일부가 되었겠지?
우리나라의 산하 어디에든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 등 한반도 역사가 서리지 않은 곳이 없다. 안반데기도 마찬가지. 화전을 일구어 살던 조상들의 애환이 깃든 곳이다. 1965년에 개간을 허락하여 화전민들에게 임대했던 것을 선진국에서는 화전민이 사라지는 추세라 하여 우리나라도 1900년대 말에 이곳을 정리하여 개인 소유로 이전했다고 한다. 척박한 돌무더기 구릉에서 추위와 배고픔은 많은 화전민을 떠나게 했단다. 몇 안 남은 후손들이 땅을 사서 맥을 이어가는 안반데기. 그렇게 20여 가구가 배추 농사를 지으면 살아가고 있단다. 고랭지에 맞는 채소들, 양배추나 감자도 이곳에서 나는 유명한 작물이다.
이 넓은 고원을 개간하여 불을 지르고 그 자리에 삶을 심었던 조상들의 업을 이어받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 만큼의 볼거리와 먹거리를 만들어 놓은 이곳은 끈기와 패기와 인내의 결정체, 우리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의 종지부를 찍는다. 봄, 여름, 가을이 짧다는 이곳에서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겨울에는 풍력발전기가 또 한몫을 해내고 있다니 끈기와 불굴의 정신이 시대를 넘어 대를 잇고 있다.
사방이 밭으로 펼쳐진 정상에 오르면 '멍에전망대'가 있다. 노역이 흔적이 물씬 풍기는 듯한 멍에전망대. 가까이 가보니 돌담이 무너져 내려 지금은 폐쇄되었고 지켜보는 것만 가능하다. 멍에는 소에게 지워진 농사짓기에 최적화된 기구이다. 척박한 돌밭을 일구어 농사를 지으려면 꼭 필요했을 소, 현대 농업에는 트랙터 등의 현대식 농기구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지만 이곳은 아직도 소의 힘을 빌어 농사를 짓고 있단다. 돌 많은 비탈밭을 가꾸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을 흘려야 했을지... 개간할 때 나온 돌들은 어쨌든 버려야 하니까 어디에 쌓아 놓아도 천덕꾸러기가 될 것을 기복 정신 깃든 지혜로 쌓아 올려 작품을 만들었다.
그러기까지의 애환에 감히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지금 안반데기는 나처럼 호기심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가는 명소가 되었지만 그곳에서 삶을 이루어 온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힘겨운 투쟁이었을지 생각해보니 감사의 마음이 절로 나온다.
이런저런 유래를 알고 나니 안반데기... 왠지 더 짠한 느낌이다.
후세들은 이곳을 찾아 조상들의 고뇌와 땀의 흔적을 볼 테고 더러는 해발 고지가 높은 이곳에 올라 별을 헤일 것이다. 또 요즘 같은 비대면 스트레스가 높은 시절엔 영혼의 힐링을 위하여 오고 가는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저 관광지로 알고 찾아갔다가 유적지를 탐사하고 돌아온 듯하다.
안반데기, 정말 구름이 쉬어가는 곳이었다. 올라갈 때에는 맑은 하늘이었는데 어디선지 구름이 몰려와 허리 허리에서 쉬고 있었다. 쨍한 날에는 파란 하늘과 함께 또 어떤 진풍경을 연출할지 자못 궁금하다.